한국문화사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3. 명의 조공-책봉 체제 확립과 조선관중국적 조공-책봉 체제의 복원

고려와 조선에 대한 차별 대우

명나라가 위압적 자세를 풀기 시작한 것은 1386년(우왕 12)이었다. 물론 이때에도 고려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의복(衣服)과 관모(冠帽)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는 고려의 외교 문서에 대한 명나라의 답변에 “짐이 사해(四海) 안에서 중국에 인접해 있는 나라를 보건대, 삼한은 최하의 나라(下下)가 아니다.”라는219)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나라의 의심을 끝까지 풀 수 없었던 요인은 요동을 둘러싼 지역에서의 몽골 세력 잔존이나 인척 관계로 맺어진 고려와 몽골의 오랜 유대 관계였다.

<태조 이성계 어진>   
1872년(고종 9)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으로,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 차림에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이성계가 사신을 보내 즉위의 승인을 요청하자 명 태조는 즉위를 승인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의 자치를 긍정하였다. 이는 명나라가 원나라와 달리 조선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외교의 상대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하였다.

고려에 대한 불편한 심기는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보인 명나라의 태도에서도 엿보인다. 위화도 회군, 우왕 폐위, 공양왕 옹립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새 왕조를 개창한 것은 1392년 7월 17일이었다. 이성계는 즉위한 이튿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즉위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명 태조는 즉위 승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국호(國號)를 정해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되묻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려는 산과 바다가 가로막혀 있으며 동이의 귀퉁이에 처해 있어 우리 중국이 통치할 바가 아니다. 너희 예부(禮部)에 문서로써 알리니 너희는 스스로 성스러운 교화로 잘 다스려라. 만약 하늘의 도리에 따르고 인심에 합하여 그대 나라 백성들이 편안하고 변방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사신도 서로 왕래할 수 있으니 이것은 실로 그대 나라의 복이다.”220) 명나라는 고려보다 조선에 대해 상당히 유연한 자세를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자치(自治)를 긍정하는 명나라의 이러한 자세는 몽골의 태도와 사뭇 다르다. 몽골은 주변국을 외교의 상대가 아니라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그에 비해 명나라는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 임금과 제후라는 상하 관계를 축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여도, 정복이 아니라 외교의 상대로 이웃 나라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전통적인 조공-책봉 체제로의 복원이 명나라의 궁극적 목표였던 셈이다.

<『대명집례(大明集禮)』>   
명 태조의 명에 따라 여러 예전(禮典)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책이다. 이 책은 『대명률(大明律)』과 함께 조선에서도 많이 이용되었다. 이 책의 「빈례(賓禮)」, 「견사(遣使)」에는 번국(藩國)에 사신을 보내는 절차, 사신의 구성, 번왕(藩王)에게 조서(詔書)를 전달하는 의례 등이 실려 있다. 사진은 번국에서 중국 황제가 보낸 조서를 읽을 때 중국 사신, 번왕, 번국 신하의 자리를 나타낸 배치도이다.
[필자] 이정란
219)『고려사절요』 권32, 신우 12년 7월.
220)『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 권221, 홍무 25년 9월 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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