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적 조선관과 『조선부』
명나라의 대외 정책이나 인식은 명나라를 세계의 중심에 두고 여러 외국의 조공을 요구하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근간으로 하였기 때문에 외국은 모두 오랑캐에 불과하였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여느 오랑캐보다 조선의 문화 수준이 높다는 점은 인정하였다. 따라서 명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대체로 학식이 높은 문사(文士)를 선발하였다. 즉, “조선은 중국과 가까워 스스로 제왕(帝王)의 감화를 입었다고 하면서 조정을 예로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여 울타리의 나라(藩邦)와 같이 되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융숭하게 대우하여 비루(鄙陋)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조선에 사신으로 가는 자는 모두 학식 높은 신하로 충당하였다.”224) 다시 말해 명나라 사람은 조선을 단순히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置簿)하지 않고, 어느 정도 문명을 갖춘 나라로 인식하였다. 문제는 그것이 명나라의 교화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이 “조선은 기자가 책봉받은 나라이다.”로 시작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 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문명국인 중화가 오랑캐인 조선을 교화하여 문명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5세기 명나라 사람의 이와 같은 생각을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조선부(朝鮮賦)』이다. 『조선부』는 1487년(성종 18)에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저술한 견문록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선의 풍습을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동월의 객관적 태도는 “만약 조선에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면 써서 동 선생(董先生, 동월)에게 주시오. 전에 부탁한 일인데 어찌 지금까지도 써 오지 않습니까? 동 선생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시어 선제(先帝)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할 때 당신들의 풍속을 마땅히 황제께 아뢰어 사책(史策)에 쓸 것입니다.”라며225) 꾸짖었던 중국 사신 일행의 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동월은 자신이 직접 본 것뿐 아니라 조선인이 저술한 기록까지 섭렵함으로써 서술에 정확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조선부』에는 궁궐이나 관가의 모습, 시가지 풍경, 한강의 경치, 가난하고 부유한 백성의 일상, 고유한 풍습, 자연물과 특산품 등 조선의 다양한 풍속과 풍물이 객관적이며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어 “포(布)의 정밀함은 세밀하기가 고운 명주와 같고, 종이 가운데 귀한 것은 통처럼 말아 묶어 놓는다. 기름을 먹이면 비도 막을 수 있고, 폭을 이으면 바람도 막을 수 있도다.”라고 하여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개진(開陳)해 두거나,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걸이가 보이지 않는다.”거나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부르는 명이 있으면 또한 구부리며 달려가서 대답한다.”라고 하여 구체적인 사람들의 모습이나 행동거지까지 낱낱이 묘사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풍속을 적은 마지막 부분에 “이런 것들은 모두 기자가 그 풍속을 남겨 준 탓이며 중국의 제도를 본뜻 것이다.”라고 서술함으로써 조선의 훌륭한 문명과 풍속은 모두 기자의 유풍(遺風)이며 중국을 본받은 것이라 결론지었다.226) 즉, 중국 중심적 화이론을 바탕으로 동월 역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 정도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조선부』의 중국 중심적 인식은 자비령(慈悲嶺)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실 1270년(원종 11)에 원나라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여 이북의 60성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아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다가 20년 뒤인 1290년(충렬왕 16)에 고려에 되돌려 준 적이 있다. 다시 말해 자비령이 잠시 중국과 고려의 국경선이었던 적이 있는 셈인데, 훗날 중국 사신은 이를 근거로 중국의 영토를 조선에게 떼어 준 것인 양 생색을 내며 황제의 크나큰 은혜라고 억지를 부렸다.
『조선부』를 지은 동월 역시 이에 대해 “이전 원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지만 우리 왕조에 이르러서는 이내 황제께서 사랑을 베풂에 안과 밖의 구별이 없음을 보이셨다.”라고 하였으며,227) 나아가 “만일 그렇다면 본래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중국 땅이 될 것이니, 이는 조선이 통치하는 팔도(八道) 가운데 한 도를 떼어 내고도 남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황제께서는 그 땅을 모두 너희에게 넘겨주었으니, 너희는 마땅히 공손히 예를 행하여 옛날과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여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강조하였다.
그 밖에도 동월의 이러한 중국 중심적 인식은 『조선부』 곳곳에 산재한다. 그는 조선의 국호를 결정하고 한양으로 천도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황제의) 명을 받은 뒤에 마침내 지금의 한성부로 천도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국호의 결정은 물론 수도를 옮기는 일까지도 조선이 명나라의 명령을 따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조선의 예속성을 더욱 부각하였던 것이다.
조선을 문명국으로 바라보며 우수함을 시로 읊었더라도 그의 몸에는 중국 중심적 사고의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는 그가 조선인을 대는 태도에도 그대로 묻어나 있다. 노사신(盧思愼, 1427∼1498)이 조선의 사신으로 북경에 있다가 마침 동월이 조선 사신으로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동월은 노사신에게 “너희 나라 임금은 몇 살이냐?”, “역참에 준비된 말은 좋으냐?” 등을 묻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바로 지금의 황제가 동궁(東宮)으로 계실 때 시강(侍講)이었소. …… 이제 조정에서 그대의 나라가 사대하는 정성이 지극함으로써 특별히 나와 같은 늙은 사람을 사신으로 선발하였으니, 이 뜻을 그대 나라의 재상에게 말로 전하시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관리가 “주인께서는 동궁의 옛 시강으로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되었으니, 그대의 나라에서는 마땅히 존경하여야 할 것입니다.”라며 거들었다.228) 자신이 높은 벼슬아치임을 과시하며 그러한 사실을 조선의 웃전에 알릴 것을 종용(慫慂)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에 와서도 동월은 한동안 거드름을 피우며 조선인이 조금만 잘못을 하여도 “우리는 너희 나라의 ‘고자(鼓子)’가 아닌데 어찌하여 감히 무례히 구느냐?”며 화내고 욕하였다.229) 이 말은 당시 명나라 사신 가운데 조선 출신 환관이 많았던 사실에 빗대어 말한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자신은 조선인 환관이 아니라 당당한 명나라 고관임을 내세우며 남다른 대접을 요구한 행위였다.
224) | 조영록, 「동월의 『조선부』에 대하여」, 『전해종 박사 화갑 기념 논총』, 전해종 박사 화갑 기념 논총 간행 위원회, 1979 ; 『근세 동아시아 삼국의 국제 교류와 문화』, 지식 산업사, 2002, 20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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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 『성종실록』 권214, 성종 19년 3월 계미. |
226) | 조영록, 앞의 책, 215쪽. |
227) | 신태영, 「명사 동월의 『조선부』에 나타난 조선 인식」, 『한문학보』 10, 우리 한문학회, 2004, 121쪽. |
228) | 『성종실록』 권212, 성종 19년 윤1월 경진. |
229) | 윤호진, 「조선부에 대하여」, 『조선부』, 까치, 1995, 1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