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 대상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텍스트, 『조선부』
『조선부』는 그 이전 시대의 여느 견문기(見聞記)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인식의 대상이었던 조선인이 서술 내용에 적극 개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히 배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사실 조선인은 명나라 사신을 맞 이할 때마다 틈만 나면 중국에 잘못 알려진 조선의 정보를 수정하기 위해 애썼다. 명나라가 고려 말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을 이성계의 조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점에 대해 조선은 계속 시정을 요구하여 끝내 관철하였다.230) 이러한 노력은 왕실 가계(家系) 같은 문제뿐 아니라 조선의 풍속에 대한 사소한 오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허종(許琮, 1434∼1494)은 어느 날 동월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니 ‘우리나라의 풍속에 아버지와 아들이 한물에서 목욕하고 남녀가 서로 좋아하며 결혼한다.’고 쓰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옛 역사책에서 전하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결코 그런 풍속이 없는데도 『대명일통지』에는 옛 사서의 기록에 따라 그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동월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흔쾌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마땅히 그 나라의 현재 풍속을 기록해야지 옛 사서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전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조선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모두 써서 주면 실록을 편찬할 때 이를 황제에게 아뢰어 올리겠습니다.”라고231) 하였다. 그리고 실제 『조선부』에 “이를테면 시내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驛)에서 일하는 이는 모두 과부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상당히 해괴하더니 지금은 이미 다 고쳐 없어진 것을 알았도다.”라고 서술하였다. 물론 조선에 대한 기존의 정보를 그대로 노출하기는 하였지만, 마지막 부분에 지금 그와 같은 풍속이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인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인은 이처럼 틀린 대목이나 잘못된 정보를 그때마다 고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조선을 알리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견문기의 저자에게 조선에 관한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일일 것이다. 『조선부』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 저술된 책이었다. 그것은 『조선부』의 주요 내용을 허종이 제공한 『풍속첩(風俗帖)』에 의거하였다고 밝힌 동월의 설명에서 알 수 있다. 물론 『풍속첩』의 제공이 조 선의 일방적인 의지에서만 나온 행위는 아니었고, 동월의 요구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동월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든 아니든, 『풍속첩』의 제공은 결국 『조선부』의 서술 내용에 조선인이 깊숙이 개입한 결과를 만들어 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인 조선이 견문기의 서술에 개입하여 조선에 대한 중국인의 인식을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상제(喪制)나 직전(職田)뿐 아니라 재혼한 여자의 후손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막는 제도 등과 같은 내용을 해당 관청에서 모두 기록하여 (동월에게) 송부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던 허종의 말에서 알 수 있다.232) 이러한 조선인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조선부』에 “조선의 아들에게는 삼년상(三年喪)이 있으니, 비록 그가 노복(奴僕)이더라도 삼년상을 행하는 것을 허락하여 효를 이루게 하였다.”라든가 “조선의 혼인은 조심스레 중매로 하며 재가(再嫁)하여 낳은 자식은 비록 많이 배워도 사류(士類)에 끼이지 못하였다.”는 문장을 수록할 수 있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