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제3장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원인이 본 우리3. 명의 조공-책봉 체제 확립과 조선관중화와 소중화, 그리고 『조선부』

인식 텍스트의 교체

중국인이 고려에 대해 알고자 하였을 때 가장 먼저 접한 책은 『고려도경』이었다. 『고려도경』은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인종 1)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저술한 대표적인 고려 견문기로 영향력이 대단하였다. 고려로 오거나 고려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대개 이 책을 참조하였다. 앞서 서술하였듯이 금나라 관리인 왕적(王寂)조차 고려 왕계를 알고 싶어 살펴본 책이 『고려도경』이었다. 원나라 사람의 견문기가 여러 편 알려져 있었지만,233) 『조선부』가 편찬되기 전까지 명나라 사람도 고려나 조선에 대한 정보를 『고려도경』에서 얻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 송렴(宋濂, 1310∼1381)은 『고려도경』을 통해 김부식(金富軾)과 김부철(金富轍) 형제가 박학하고 글을 잘 짓는다는 사실을 들었다고 하였다.234) 게다가 『조선부』 를 저술한 동월조차 조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조선에 대한 사전 정보 수집을 위하여 『고려도경』을 살펴보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도경』이 고려관이나 조선관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예를 들어 조선인이 동월에게 수정을 요구한 “이를테면 개울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하고 역에서 일하는 이는 모두 과부라고 한다.”는 것은 『고려도경』에서 와전(訛傳)되었던 것이다.235) 『고려도경』에 “고려인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에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236) 구절이 ‘개울에서 남자와 함께 목욕’한다고 와전되었던 것이다.

『고려도경』의 영향력이 이처럼 컸던 만큼 조선인은 그곳에 수록된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로 편찬된 결과물이 바로 『조선부』였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조선부』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여러 번에 걸쳐 출간하였으며, 조선의 사신이 명나라에 도착하면 언제나 동월의 안부를 물었다.237) 마찬가지로 이후 조선으로 오는 명나라 관리는 이전에는 으레 『고려도경』을 읽었던 것처럼 출발 전에 『조선부』를 참고하여 사전에 조선의 풍습을 알고자 하였다. 나아가 몇몇 사신은 『조선부』를 견문록의 모범적 저술로 인정하여 『조선부』의 속편을 쓰고자 하는 개인적 바람을 밝히기도 하였다. “동 선생이 일찍이 『조선부』를 지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서면(西面)의 한쪽 길만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저는 사방을 모두 알고 싶습니다.”라든가,238) “동 한림(董翰林)의 『조선부』는 미비한 것 같아 또 다른 부(賦)를 지으려고 청한 것입니다.”라는 말이 그것을 보여 준다. 물론 『조선부』의 속편은 이후 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풍속에 대한 기본 텍스트로서의 자리는 『고려도경』에서 『조선부』로 교체된 뒤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필자] 이정란
233)장동익, 앞의 책, 1994, 199, 200, 220쪽.
234)송렴(宋濂), 『송학사문집(宋學士文集)』 6, 「증고려장상서환국서(贈高麗張尙書還國序)」 ; 장동익, 앞의 책, 1997, 379쪽.
235)신태영, 앞의 글, 135쪽.
236)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23, 잡속(雜俗)2, 한탁(澣濯).
237)신태영, 앞의 글, 113쪽.
238)『중종실록』 권84, 중종 32년 3월 갑오(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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