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악 군악대와 서양 음악
1853년 일본은 미국의 페리제독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 1858년 구미 각국과 수교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국하게 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당한 일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하여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고 이에 따라 우리 역시 개항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수교통상조약이나 조선의 강화도조약은 모두 강대국의 무력으로 강요된 불평등 조약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불평등 조약은 내부적으로 ‘우리도 서양식 무기를 만들고 강력한 근대국가를 만들어 서구 열강에 대항하자’는 근대화의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1897년 국호가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국왕이 황제로 격상된 변화는 외부적인 압력과 내부적인 근 대화의 열망이 중첩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대한제국과 황제는 전 세계에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하기 위해 이를 뒷받침하는 힘과 상징을 필요로 하였다. 특히, 외세의 침략을 막아 낼 수 있는 근대적인 군제 개편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올랐다. 그 군제 개편에는 새로운 신호 체제와 군대 기능을 반영하는 근대식 군악대 설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가 만들어지고 ‘동호수(銅號手)’라는 서양식 신호 나팔수가 편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식 신호 나팔곡은 ‘부국강병의 음악’으로 새롭게 부상하였다. 이후 동호수는 군제개편과 함께 나팔수-곡호수-곡호대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전 부대에 확대·편성되었다. 동호수·나팔수·곡호수는 소편성에 해당하였지만 1888년에 설치된 곡호대는 군악대의 전 단계였던 만큼 편성 규모가 확대되었음을 의미하였다. 또한, 지방 부대에 이르는 전군에까지 곡호대 편성이 확대됨으로써 양악 편성의 군악대가 급속히 자리잡게 되었다.211)
우리나라 최초의 양악대 지도자는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의 한사람으로서 갑신정변에 앞장선 이은돌이다. 최초의 음악 유학생으로 일컬어지는 이은돌은 1881년 11월에 일본에 유학하여 프랑스 출신의 다그롱(Gustave Charles Dagron)으로부터 신호나팔, 양악대 교육과 군사 교육을 받고 1882년에 귀국한 뒤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까지 나팔수를 양성하였다.
20세기 들어 양악 군악대가 본격화된 것은 독일 출신의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가 군악교사로 초빙되면서부터이다. 에케르트는 이미 오랫동안 일본의 양악대를 육성한 경험을 가졌던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에는 1901년에 입국하였다. 1901년 9월 9일 고종 황제의 생일을 맞아 에케르트 부임 데뷔연주회를 갖게 된 양악대는 황실과 정부의 각종 행사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양악대는 시민을 위한 공개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서양 음악을 소개하고 보급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212)
에케르트 지도하에 양악대는 양악 전문 음악가를 다수 배출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어 보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 찬송가 개정 작업에도 협조하였다. 이어 1907년 일본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고 한일강제 병합 이후 양악대가 해산될 때 까지 짧은 기간 동안 큰 역할을 하였다.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된 뒤 ‘이왕직 양악대’로 축소 및 개편되는 고비를 맞는 동안에 도 한국인으로서 에케르트의 뒤를 이은 백우용은 최초의 클라리넷 연주자로서 수많은 관악주자를 양성하면서 한국 관악의 초석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