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4 전환기의 삶과 음악02. 서양 음악의 유입

교회와 찬송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 제국주의의 식민지 쟁탈 시대로서 서구 열강의 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다. 일본은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여 우리나라에 식민지 침략의 위협을 가하였다.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의 불평등 조약을 계기로 ‘개항(開港)’하게 되면서 서양의 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동교회 아펜젤러 동상>   

또한, 이 시기는 미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선교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시기이기도 하여 기독교의 찬송가를 통해 서양 음악이 본격적인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와 그 뒤를 이은 수 많은 선교사들은 이 땅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찬송가와 ‘풍금’이라고 불리는 리드 오르간을 보급시켰던 것이다. 이들이 보급하였던 찬송가는 그 당시 미국에서 불렸던 표준찬송가와 복음성가였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는 <예수 나를 사랑하오>(예수 사랑하심은)와 <우리 주 가까이>(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였다. <우리 주 가까이>는 처음에는 4박자로 부르다가 몇 년 후 오늘날과 같이 6박자로 부르게 되었다.

이 두 곡을 살펴보면 서양 음악이 초기에 우리에게 어 떠한 양상으로 유입되었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두 곡의 공통점은 모두 장음계로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전통 음계와 비슷한 5음 음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 나를 사랑하오>는 도-레-미-솔-라의 음계로 되어 있고 <우리 주 가까이>는 솔-라-도-레-미의 음계로 되어 있어 한국의 전통민요 중 경토리라 불리는 선법과 유사한 음계로 되어 있다. 더구나 평조나 경토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솔-라-도-레-미 음계로 이루어진 <우리주 가까이>가 4박자에서 6박자로 바뀐 것은 3박자 계열의 리듬에 익숙한 우리 민족의 감수성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를 가까이 함>   
<예수 나를 사랑하오>   

이렇듯 전통적인 음악 어법과 비슷한 선법 및 리듬이 합해져서 <우리 주 가까이>는 전통민요에 기반하여 새롭게 창작된 신민요처럼 당시 조선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노래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 당악이라고 하는 중국음악이 들어올 때 기존의 우리 음악의 감수성에 바탕하여 향악화 된 것과 유비되는 일로서 이 역시 ‘양악의 향악화’로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찬송가(讚頌歌), 1908년 언더우드(H. G. Underwood) 편역>   
감리교회에서 부르던 찬미가와 장로교회에서 부르는 찬성시와 찬양가를 합하여 만들었는데, 양 교회의 신도들이 한 곳에서 예배를 볼 때 같이 부르기 위해서이다.[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입으로 부르면 따라 부르는 방식으로 노래가 전수되었지만, 1894년 <찬양가>와 1909년 연합찬송가집인 <챤송가>가 출판됨으로써 찬송가는 본격적인 활자 매체를 통해 전파되었다.213) 뿐만 아니라 찬송가에 수록된 노래들은 가사만 달리하여 한국 노래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이후 ‘애국가’, ‘독립군가’, ‘창가’를 낳는 모본이 되었다. 이렇듯 찬송가는 20세기 전체에 걸쳐 한국 양악문화를 정착시키고 한국인들에게 양악적 감수성을 형성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필자] 이소영
213) 민경찬, 앞의 책, p.29∼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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