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5 전통음악 공연에 대한 역사적 엿보기03. 현장 돋보기1-조선시대민간에서의 사적인 공연

유람 및 사냥

연회뿐만 아니라 양반층의 유람이나 사냥 같은 행사에도 음악가들이 동행해서 공연을 펼쳤다. 다음 장면들이 그 분위기를 그려볼 수 있게 한다.

<나주 금성관>   
전라남도 지방의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 규모가 웅장하다.
<조선시대 수렵 병풍>   
[국립민속박물관]

동복(同福)은 호남에서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며, 기이하면서도 아주 뛰어난 최고의 명승지로는 적벽(赤壁)이 있다. 나(김성일)는 계미년(1583) 가을에 금성(錦城) 목사로 있었는데, 그 경치 좋은 곳을 지척에 두고 바라보기만 한 채 한 차례 유람하지도 못하였다. 병술년(1586) 가을에 동 복 현감으로 있던 돈서(惇敍) 김부륜(金富倫)이 편지를 보내 오기를, “가을이고 또 기망(旣望)인데, 바람과 달빛이 둘 다 맑으며, 강과 산은 예전과 같습니다. 만약 옛날의 고사를 이룰 수만 있다면 바로 소선(蘇仙)이 되는 것이니 한번 유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5일에 말을 타고 남평(南平)으로 가서 경연(景淵) 이길(李洁)을 방문하고자 남계정사(南溪精舍)로 찾아가니, 시내와 산은 소슬하면서도 깨끗하였고, 달빛은 그림 같았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면서 술을 마시니 이미 티끌 세상을 벗어난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경연을 데리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길을 떠났는데, 금사(琴師)인 황복(黃福)이 우리를 따라 나섰다 …… 홀연히 동쪽편에서 맑은 기운이 자욱하게 끼인 가운데 마치 여름날에 뭉게구름이 피어나 기이한 산봉우리 모양새가 된 것 같은 것이 나타났다. 백성이 말하기를 “여기가 적벽입니다.” 하였다. 이에 말을 채찍질해 앞으로 나아가 두 개의 시냇물을 건너 그곳에 도착하니, 주인은 거창 군수를 지낸 중명(仲明) 양자징(梁子澂)과 그 고을 선비인 하대붕(河大鵬), 정암수(丁巖壽), 정형운(丁亨運) 등 몇 사람을 데리고 와 물가에다 자리를 펴 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 주인이 이때 가자(歌 者)에게 명하여 채릉가(采菱歌)와 백빈가(白蘋歌)를 노래하게 하니, 노래 소리가 교대로 일어났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만 부르라. 오늘 같은 이런 밤에는 소동파(蘇東坡)의 적벽가(赤壁歌)가 아니면 귀만 시끄러울 뿐이다.” 하니, 좌중에 있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노래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읊어서 노래하는 것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다. 어찌 아녀자들의 입을 빌려 맑은 노래를 더럽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조화우가 전적벽부(前赤壁賦) 한 장(章)을 노래하자 종자(從者)로 하여금 퉁소를 불어 화답하게 하였다. 금사(琴師) 황복이 이어서 아양곡(峨洋曲)으로 받았다. 노랫가락이 맑고 메아리 소리가 바위 골짜기 사이로 퍼져 나가니, 항아(姮娥)가 하늘 위에서 배회하고 어룡(魚龍)이 물 아래에서 춤을 추었으며, 좌중은 적막하고 강과 하늘은 아득하였다. 그리하여 마치 자진(子晉)이 부는 구산(緱山)의 퉁소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아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듯하였다.247)

나는 전국의 경승지를 유람하고서 일찍이 안 가본 곳이 없다고 스스로 여겼는데, 입암(笠巖) 빙호(氷湖)의 수렵를 보지 못하였다. 갑자년(1684) 늦겨울에 벼슬을 떠나 한가로이 있을 때 영릉 김중옥이 연말 전 6일에 그의 형님과 사촌동생 조석미, 사촌 자형 박군미에게 부탁하여 자애회(煮艾會)를 만들었는데, 나도 거기에 가게 되었다. 후에 중길과 문보 두 사람이 왔고, 송골매 두 마리와 8∼9명의 사냥꾼을 데리고 갔다. 무사(武士) 윤익과 송골매 주인 임신(林藎)도 함께 해서 입암 고개를 올랐는데, 입암은 영릉 동쪽 기슭 외곽으로, 호수 가운데로 들어가기가 험하고 덤불과 물과 마주하고 있다. 호수는 상하 십리이고 길이와 깊이가 같은데, 얼음이 굳게 얼어 평지와 같고 눈이 쌓여서 은빛 세계를 이루었다. 덤불에서 뛰쳐나와 날거나 달리는 놈을 쫓으면 나무들 사이로 숙이고 들어가도 그 자취를 찾기 어려웠다. 이 때 무리들이 10여 마리를 쫓았는데, 왼쪽, 오른쪽으로 달아나면서 도망을 갔다. 눈앞에서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었지만 그물에 걸리지도 않고 매 에게 잡히지도 않아서 모두 도망가버렸다. 마지막으로 새 한 마리가 덤불로부터 호수 위로 날아올랐는데, 바위에 이르러 매를 만나 앞으로 떨어졌고, 다시 한 번 날아 오르다 매에게 잡히자 모두가 시끄럽게 소리치며 즐거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오늘 관렵(觀獵)은 이 정도면 족한 것 같다. 많이 잡을 필요 있겠는가”하였다. 함께 간 사람들을 정리하고 사슴 한 마리와 꿩 4마리를 얻고, 잡은 자에게 큰 잔을 상으로 주었다. 날이 저물어갈 무렵 이중뢰가 술을 가지고 왔다. …… 이중뢰는 <고금보(古琴譜)>를 해독해서 나를 위해 음악 한곡을 연주하였는데, 그 음이 충화(沖和)하고 담백(淡泊)해서 마음에 깨달음이 있는 것 같았다. …… 무릇 사냥은 고제(古制)이고 금(琴)은 아악기인데, 문무의 일을 다스리는 것은 이것에 말미암아야 한다. 사냥이 황무지에 다다르고 금 연주가 음란한 데에 이르면 그것은 말류(末流)로 가는 길이다. 나는 대여섯 명 친구들과 함께 동호회를 이루어 산수에서 즐기다가 여기에서 해후하였는데, 사냥으로 끝장을 보지 않고 금으로 지나치게 방탕한데 까지 가지 않았다. 비록 문무의 도를 논함이 부족하긴 하였지만 또한 옛 사람들이 남긴 뜻에 거의 근접하였다.248)

사대부들의 경승지 유람이나 관렵(觀獵)은 단순히 유람이나 사냥 구경만이 아니라 음악 연주가 함께 하였으며, 역시 음악가들이 여기에 동원되었다. 연회만이 아니라 이런 다양한 행사에 음악가들의 공연이 함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필자] 전지영
247) 김성일, 「遊赤壁記」.
248) 이여, 「奉呈寧齋郞兼示九楊延村後浦僉同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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