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정에서 직업 예인들의 공연
시정에서의 직업예인들의 활동은 주로 조선 후기 상업 및 도시발달을 계기로 발달한 음악과 관련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판소리, 가면극 음악, 사당패나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등과 같은 유랑예인집 단의 음악, 선소리 산타령 등이다. 이들 음악의 공통점은 그 성장배경이 18세기부터 발달한 상업 및 도시경제의 발달에 있다는 것이다.
판소리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조선 후기 상업발달 및 도시 발달에 있었다. 이는 판소리가 지극히 도시적인 예술이자 도시인들을 향유층으로 하는 음악임을 보여준다. 대략 18세기는 판소리가 태동한 시기이면서 최초로 판소리가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이다. 판소리가 발달하게 된 계기는 판소리 자체의 내적 역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적 발달이라는 외적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리광대들은 변화하는 사회를 살고 있는 시정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자신을 적응시켜가야 하였다.
판소리는 19세기 들어서 수용층의 확대와 통속성 증대, 다양한 악조의 등장, 진양조를 중심으로 한 심화된 예술성 확보 등과 같이 아주 다양하면서도 대조적인 면모들을 동시에 달성하는 독특한 면모를 보였다. 이런 현상은 판소리 수용층이 신분적 기준으로 나눠질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해 준다. 판소리가 도시의 소비적 대중들 사이에 적응하면서 내적 완성도를 기해 가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신분적으로 하층에서 상층까지 포괄하였던 판소리의 모습은 새로운 경제력을 가진 도시의 소비적 문화향유계층이라는 새로운 수용층의 등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18세기 이후 대장시의 발달과 상품유통의 거점이 지역마다 형성된 것은 가면극 또는 탈놀이(탈춤)라는 공연형태의 발달을 낳았다. 가면극은 상업이 발달된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층의 지원을 받아 성립되었으며, 주로 장시에서 공연된 예술이다. 현재 가면극 (탈놀이, 탈춤)은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수영야류, 동래야류, 통영오광대, 고성오광대, 가산오광대 등이 있고, 이 가면극은 조선 후기 장시의 발달과 상업도시의 형성을 경제적 기반으로 해서 생성된 것이다.
원래 본산대놀이 계통의 근원지는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요지인 서울의 애오개와 사직골이었다. 애오개 본산대놀이의 근거지인 서소문 밖에는 외어물전이 있었고, 서울의 3대 시장의 하나인 칠패가 인접하고 있었다. 특히, 애오개는 서강(西江)으로 가는 길로서 곡물과 수레와 사람들로 번성하였던 곳이었다. 애오개를 근거지로 한 본산대놀이의 배경에는 이런 외어물전 및 칠패 상인들의 후원이 있었다. 본산대놀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여러 상업지역에서 공연활동을 벌였으며, 지방 상업도시에 초청을 받아 공연도 하였다. 이 때문에 19세기 이후 가면극이 전국의 상업 중심지에 널리 보급되었다.
양주와 송파의 별산대놀이는 본산대놀이의 영향으로 생겨났다. 양주와 송파는 대장시를 기반으로 해서 18세기 이후 서울 근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조선 후기 서울의 시전상인의 독점권에 맞서면서 서울과 서울 근교의 상업 발달을 이 끌었던 사상도고가 활동하던 주요한 거점은 서울의 경강변 외에 송파와 양주의 누원점이다. 이들 지역은 지방의 생산품이나 물자가 서울로 반입되는 길목이면서도 시전상인이 금난전권을 행사할 수 없는 지역이었고, 서울과 비교적 가까워서 서울의 사상도고가 직접 상품을 매점하기에도 유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중요한 상업 거점이 되었다.249)
양주와 송파에서 거부거상의 경제적 지원이 산대놀이를 발달시켰으며, 이는 상업적 번창을 도모하려는 상인들의 전략이 내재해 있었다. 상품유통의 거점인 시장은 활기를 띠게 될수록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고, 사람들이 많이 운집하는 대장시일수록 그곳에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은 극대화된다. 장시의 활성화와 사람들의 운집은 단순히 다양한 상품의 진열만이 아니라 그를 위한 보조적 상업수단으로서의 각종 연희와 볼거리, 들을 거리가 폭넓게 갖춰져야 한다. 송파와 양주의 별산대놀이가 생성되고 나서, 전국 각지에 상업중심지들이 생성되면서 이들 지역에서 다투어 가면극(탈놀이)을 배워서 자신들의 지역에서 연행을 하였다.
장시의 발달과 이를 통한 전국적 시장권의 형성은 유랑 예인 집 단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이 때문에 사당패나 대광대패, 솟대쟁이패 등이 장시를 중심으로 더욱 활발한 연행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유랑 예인 집단은 천민이라는 신분적 조건과 유교적 관념에 의한 예능의 천시로 인해 자신들의 기예만을 가지고 생존하기는 쉽지가 않았지만, 장시와 같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지역에서는 훨씬 안정적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영조, 정조 무렵에 장시와 관련해서 이들의 기사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이 시기에 그만큼 그들이 장시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음을 나타내 준다.
놀량으로 대표되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선소리 산타령은 경강변을 따라서 발달한 것이다. 경강상권의 테두리 안에서 발달한 선소리는 전문적인 선소리패가 따로 있었으며, 유명한 선소리패로는 뚝섬패·방아다리패·과천패·호조다리패·왕십리패·자하문밖패·성북동패·진고개패·삼개패·애우개패 등이 있었다. 그 중에 뚝섬 산타령패가 으뜸이고 과천패가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뚝섬 산타령패나 동작강을 끼고 있는 과천패를 뛰어난 소리패로 치는 것은 이들 산타령패가 기본적으로 서울의 상업 발달지역과 경강변을 활동무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소리꾼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생존에는 이들의 노래를 향유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 선소리패는 상업발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시정에서의 다양한 직업예인들의 공연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선 후기가 엄격한 신분질서 속에서 공고한 통치력이 유지된 시대가 아니라, 상업경제와 도시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흐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신분적 지배력 뿐만 아니라 경제적 헤게모니가 중요하게 부각된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다양한 직업예인의 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249) | 유승주, 「상업, 수공업, 광업의 변모」, 『한국사』 30-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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