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기 양명학 수용자들의 현실 인식
이처럼 양명학을 배척하고 체제교학적인 주자학에 의존하던 조선왕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정치·경제·사회 등 제분야에 있어서 점증되는 사회모순과 함께 급속한 사회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사화를 거치면서 성숙되어온 사림정치가 차츰 붕당정치로 바뀌게 되면서 학파의 정치적 유착과 함께 붕당은 당쟁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무엇보다도 三政의 문란이 심각해져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삼정의 문란을 통해 야기된 생산관계의 양극화 현상과 함께 일부 농민들의 서민지주 내지 자영농민층으로의 발전, 그리고 노비계급의 신분해방을 위한 운동 등 사회적 신분제의 동요를 통한 신분분화현상을 초래하였다.
한편, 사상계는 주자학의 심화과정을 통하여 道學이 정통이념으로 정립되면서 義理論과 禮說 등 사회규범적 측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룩하였다. 성리학의 의리론은 인간이 물질에 의해서 지배받을 수 없다는 자주성과 주체성의 문제를 강조한 것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을 통해 불의에 대한 의의 신념과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구한말에는 민족주체의식으로 승화되었으며, 예설은 사회정의의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공헌하였다.
그러나 정통이념으로서의 주자학은 양대 전란을 계기로 중첩되는 모순을 극복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자학의 학문적 성격에서 기인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실의 문제보다는 그러한 문제가 야기되는 논리적 근거로서 명분과 의리와 같은 가치의 문제를 중시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 역사 속에서 주자학은 외세의 침략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당할 때에는 명분과 의리를 통한 살신구국의 정신으로 승화되었지만, 현실적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주자학이 지닌바 사상적 교조주의와 의리론적 이념은 거듭된 전란을 통해 야기된 국토의 황폐화, 인구의 격감, 민생의 궁핍화 등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문제로부터 더욱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등장한 사상이 곧 實學이다. 바로 이러한 때 양명학도 실학과 함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전후로 하여 제기되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浦渚 趙翼(1579∼1655), 谿谷 張維(1587∼1638), 遲川 崔鳴吉(1583∼1647) 등 몇몇 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조익의 학문은0577) 주자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주자학적 이론 속에는 인간의 주체적 판단을 중시하는 양명학이 내함되어 있다. 그의 양명학적 성격은 良心本善說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는 인간의 良心과 知覺을 일원적으로 파악하여, 양심에 입각한 지각은 언제나 선하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良知를 인간의 본심이면서 동시에 본심의 인식능력으로 이해하고 있는 양명학의 양지설과 동일한 것이다.0578) 그는 양대 전란을 통해 노정된 전반적인 사회적 병리현상과 관련하여 당시의 정치행태가 지닌 因循姑息的 명분론과 규범적 형식성을 비판하고 구체적 현실에 입각한 因時制宜的 更張論을 제시하였다.0579) 그의 인시제의적 경장론이란 현실의 문제를 대처함에 있어 어떠한 선입관이나 미리 정해진 규범을 전제로 하지 않고 그 구체적 사태에 입각하여 본심의 판단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었다.0580) 그는 이러한 인시제의적 경장론에 입각하여 당시의 현실문제였던 方物·貢納의 폐단과 號牌法의 문제점 등을 소상히 지적하고, 大同廳의 설립을 진언하는 등 구체적인 해결책을 건의하였다.
조익은 당시 민폐의 문제점이 여러 가지 계층간의 불공평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는데, 첫째 방납자들이 유통이익을 과중히 함에 따라 애매하게 농민만 몇 배의 값을 물어야 하는 점, 둘째 세력가들은 부역에서 교묘히 빠지고 소작민만이 부역할 뿐 아니라 세력가의 부역까지 감당해야 하는 점, 셋째 각 도가 제공하는 부역의 형평성이 없을 뿐 아니라 도내의 대소읍에서도 소읍이 항상 중한 부역을 맡는 점, 넷째 州郡 내의 천한 사람들은 처자를 먹여살리기도 부족한데 부자들은 일년간의 소비가 수천 석에 이르는 점 등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불균형을 해결할 수 있는 대동법의 시행을 건의하였다.0581) 또한 당시 거듭되는 전란 속에서 호패법이 백성을 얽매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법이 됨을 지적하고, 이 법 대신에 임란 이후 실시되고 있는 束伍法을0582) 확대 실시해서 백성들이 호패를 기피하고 기찰을 피하여 도적떼가 되는 폐해를 없애야 한다고 진언하였다.0583)
장유 또한 조익과 같이 당시를 경장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난세로 파악하고 있다.0584) 그는 당시의 현실적 난국의 타개책을 묻는 인조에게 “국가가 불행히도 대란을 만난 이후 백가지 법도가 무너지고 만가지 法式이 질서를 잃었습니다. … 그러나 인군께서 혼자 있을 때에 마음 속에서 스스로 공경하거나 방자해지는 경우와 본원상에 있어서 본심을 간직하거나 버리는 공부는 모두 신들이 엿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잘 알 수는 없지만 전하께서는 이 점에 대하여 과연 ‘實心’으로 ‘實功’을 이루었습니까”0585)라고 하여 군주로서 구체적 현실에 대처하는 실심을 가지고 구체적인 실공을 거두기를 간청하고 있다.0586) 장유의 이러한 현실인식은 곧 인간주체의 본심에 바탕을 두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의 양명학적 사유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사유체계에 입각하여 당시의 조정이 부족한 군역을 채우기 위해 良賤의 구별없이 모두 군적에 올려려 하는 상황에 이르자, 상소를 통해 외아들이나 年滿者들은 식솔을 보호할 수 있도록 군적에서 제외하는 조처를 취해줄 것을 건의하는 등의 위민책을 올렸다.0587)
최명길은 당시의 인순고식적인 세태를 개탄하여 “대개 名은 實의 그림자니 명분만을 따라 실질을 책한다면 잃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자취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니 자취를 가지고 마음을 구한다면 잃는 것 또한 많을 것입니다. … 오호라 지금 세상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은 명분이지만 신이 힘쓰는 바는 실질이요, 세상이 의논하는 바는 자취이지만 신이 믿는 바는 마음입니다”0588)라 하여, 명분에만 빠져 현실의 문제를 절실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당시 世儒들을 비판하였다. 최명길이 생각하는 바는 실질이며 그가 믿는 것은 마음이었다. 양명학을 학문의 기저로 하고 있는 그로서는 마음에 돌이켜 부끄러움이 없으면 그것이 곧 天理였다. 그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주자학자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主和’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이러한 평소의 학문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주화’의 논리는 이념적 大義보다는 현실을 중시하여 현실적 상황과 주체가 합치는 곳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실리적 입장이었다. 그에 의하면 의리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常道와 權道이다. 치세에는 상도로서 가능하지만, 난세에는 현실적 상황에 입각한 변통성 있는 권도가 중요하다. 지천이 추구하였던 의리는 권도로서의 의리였다. 그러므로 최명길이 자신에게 닥쳐올 불명예를 감수하고<주화>를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주자학에서 중시하는 이념적 명분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수호하려는 현실에 대한 주체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은 항복하는 國書를 두고 이를 찢어 버리고 통곡하는 淸陰 金尙憲(1570∼1652)과 웃으면서 찢어진 문서를 줍는 최명길의 행동 속에 잘 나타나 있다.0589) 청음의 입장이 주자학적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의리론적 주체사상이었다면, 지천의 입장은 이념적 대의보다는 현실을 중시하여 현실적 상황과 주체가 합치는 곳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양명학에 입각한 실리적 주체사상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정신은 이후 霞谷 鄭齊斗(1649∼1736)에게 계승되어 한국 양명학파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宋錫準>
0577) | 조익은 어릴적부터 친우였던 장유·최명길 등과 함께 양명학을 공부한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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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78) | 宋錫準,≪韓國 陽明學과 實學 및 天主敎와의 思想的 關聯性에 관한 연구≫(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2), 51∼66쪽. |
0579) | 趙 翼,≪浦渚集≫권 12, 申論治道仍進先朝所獻四事箚. |
0580) | 趙 翼,≪浦渚集≫권 11, 論瀋陽送使箚 丙子. |
0581) | 趙 翼,≪浦渚集≫권 2, 論宣惠廳疏 癸亥. |
0582) | 束伍法은 임진왜란 때 役을 지지 않은 良人과 賤民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軍으로 편성하여, 평시에는 군포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하는 법이다. 포저는 이 법을 통해 良賤의 구별이 없이 쌀을 거두어 군역의 운용을 보충하며, 한편으로는 혼인이나 가짜 호패를 이용해 천민이 되어 國役을 피하는 폐해를 시정함으로써 양민의 고충을 덜고자 하였다. |
0583) | 趙 翼,≪浦渚法≫권 2, 因求言論時事疏. |
0584) | 張 維,≪谿谷集≫권 18, 求言應旨箚. |
0585) | 張 維,≪谿谷集≫권 17, 求言應旨疏. |
0586) | 위와 같음. |
0587) | 張 維,≪谿谷集≫권 17, 論軍籍擬上箚. |
0588) | 崔命吉,≪遲川集≫권 8, 論典禮箚 丙寅. |
0589) | 崔錫鼎,≪明谷集≫권 29, 行狀, 先祖令議政完城府院君文忠公行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