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개혁·반개혁과 열강의 각축
임오군란으로 자율적 역사 전개가 타격을 입은 그 틈에 열강이 경쟁적으로 침략해 왔다. 일본에 이어 1882년에는 미국과 중국이 통상조약을 맺고, 1883년에는 영국과 독일이 뒤를 이었다. 이럴 때 조선왕국의 발전을 위하여 도움을 준 나라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실이나 정객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모를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힘을 빌려 세계로 나아가거나 일본을 모방하고 그의 힘으로 문명을 달성하려고 생각한 지도자가 많았다. 오히려 전통시대 사대주의로 오해를 받던 위정척사 유림은 일본이나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배척했던 것은 물론, 유학의 성지인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정벌론(북벌론)을 일으켰던 의식이 유존하여 어느 정파보다 외세 의존성이 적었다. 그에 비하여 개량적 개화론은 청나라 문화를 배우자는 북학을 계승한 나머지 청나라에 의지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그에 반발한 혁명적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415) 그것이 1884년의 갑신정변과 그를 둘러싼 정치 정세의 성격이었다.
김옥균·박영효 등의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에서 공표한 14개 政令(政綱)을416) 보더라도 역사는 그 방향 즉, 시민이 주도한 개화혁명의 방향으로 가야 했다. 그런데 성급한 나머지 대중의 기반을 얻지 못한 채 혁명을 추진하여 갑신정변은 실패하고 말았다. 당장에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이라도 대중적 기반을 확대한 경우가 많으므로 역사적 의의를 가질 수 있다. 혁명은 혁명운동이 축적하여 끝내는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417) 그런데 갑신정변은 대중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대중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보부상 조직은 주목할만 했는데 외면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힘의 공백을 외세로 채웠다. 일본과 어렵게 어렵게, 또 군색스럽게 손을 잡고 혁명을 일으켰으므로 혁명의 실패는 물론, 일본 제국주의를 궁전 안까지 불러들인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아울러 개화의 길을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만들었다. 일본군만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청군도 진주하여 청일 각축장을 만들었다.
정상적 발전 코스라면 외세없는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실패하면 그 뒤에 다시 또 일으켜 1894년에 이르러 동학농민전쟁의 대중성을 확보하면서 갑오경장을 혁명으로 발전시키는 코스로 가야 했다. 그러한 정상적 혁명 코스가 아니라 외세에 의지한 갑신정변을 구상한 나머지 일장춘몽의 쿠데타로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혁명이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개화당과 대중이 별도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때 민씨 척족은 더욱 반동화하여 민영익·민영준(휘) 등을 주축으로 세도를 강행했다. 이에 이르러 국민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일단 혁명을 일으켰던 1884년부터 폭풍이 몰아쳐야 할 10년간에 별다른 격동이 없었던 것도 방향감각을 상실한 탓 때문이었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국민적 분위기라면 제국주의의 침략이 더욱 용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 10년간에 변화가 있었다면 열국과의 통상이 확대되면서 제국주의 경제 침략에 의한 타격이 심각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그에 대응한 정부의 상업정책에 힘입어 객주상회소와 일반상인의 상회사가 전국적으로 설립되는 등, 한국 자본주의도 다소는 성장하고 있었다.418) 독일이나 미국 상인의 진출이 변화를 불러오던 가운데419) 1876년 이후 일본 침략의 독무대였던 조선에<조청수륙무역장정>이후부터 청나라와의 무역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은 외교사적으로는 1885년의 天津條約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하지만, 그에 앞서 청일 양국의 무역경쟁이라는 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발발한 것이다. 이른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420)
1894년의 역사는 대단히 다단하였다.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던 해이다. 청일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었으므로 주체를 달리하지만,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경장은 조선이 주체이고 구시대의 봉건체제를 청산하는 역사적 작업이었다. 그러므로 동학농민전쟁의 弊政改革案과 갑오경장의 洪範14조를 비롯한 3차에 걸쳐 추진한 정치·외교·행정·경제·군사·경찰·사법·교육 등 각 분야와 사회개혁 덕목은 다 함께 한국근대사를 궤도에 올리는 데 중요한 요목들이었다.421) 동학농민군의 요구는 갑오경장에서 일부나마 반영됐다. 그런데 추진 주체는 서로 상반된 길로 갔다. 그것은 갑오경장을 추진한 시민계급이 갑신정변 이후 대중적 기반을 만회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회변동기에 중산층이나 지식인은 대중이 따를 수 있는 개혁 진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갑오경장에서 일본을 모방하기에 바빴다.
그렇더라도 갑오경장에 일본의 간섭이 없었고, 동학농민전쟁에 일본군의 토벌이 없었다면 동학농민전쟁이 성공하거나 동학농민전쟁이 갑오경장과 합류한 어떤 새 모습을 갖추어 한국근대사 발전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을 것이다. 당시의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저항을 진압할 수 없었으므로 새로운 역사를 전개하지 않으면 안될 그때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의 길은 차단되고 말았다.
그때 일본은 갑오왜란(7. 23)과 청일전쟁(7. 25)을 도발하면서 갑오경장에 깊숙이 관여하였다.<新式貨幣發行章程>(8. 11)에서 일본 화폐 통용의 길을 열고<暫定合同條款>(8. 20)으로 경제침략의 길을 넓게 닦았다. 동시에 청일전쟁의 전시동맹인 朝日盟約(대일본 대조선 맹약, 8. 26)을 강제하고 동학농민군을 토벌하였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해 갔다. 오도리 가에스케(大鳥圭介)에 이어 일본공사로 부임한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는 국왕과 각료를 협박하여 각 아문에 일본인 顧問官을 배치하고422) 借款으로 조선의 재정을 장악해 갔다. 그때 조선을 보호국으로 묶을 공작까지 진행시켰다. 이러한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노력이 갑오·을미의병으로 나타났는가 하면 국왕 중심의 외교투쟁으로 나타났는데 일제 침략에 반발하던 명성황후 민비는 일본공사 미우라 코로(三浦梧樓)의 공작테러인 을미사변을 맞아 희생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서도423) 김홍집내각은 갑신정변 때와 같이 대중보다는 일본을 더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동학농민전쟁이 후반부터 대일전쟁을 전개할 때 갑오경장 세력은 반대로 일본과 손을 잡고 농민군을 토벌하였다. 한국근대사는 여기서 민중의 길이 별도로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근대사에서 시민과 민중의 통합이 숙명적 과제라는 것도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2차 갑오경장인 을미개혁은 김홍집·박영효 등이 일본 세력을 업고 추진한 것이다. 그들은 청일전쟁을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 전쟁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공사 이노우에 카오루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하여 부임한 것이나, 청일전쟁이나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을 통해 일본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하는 국제관계를 읽지 못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조선의 독립이라고 착각한 조선의 지식인은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유인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선은 일본에 대한 왕궁 방위능력까지 상실한 가운데 왕비가 참살당한 을미사변을 맞은 것이다.
이제는 어떤 개혁도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대중은 그때까지 타도의 대상이던 봉건 유림의 손을 잡고 반제국주의 의병전선을 형성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비롯한 을미개혁에 저항한 봉건 유림이 일본 타도의 기치를 올렸을 때 봉건유림으로부터 수탈만 당하던 농민(대중)이 목전의 이해가 같은 양반 유림을 따라 대일전선에 나섰다. 자연발생적 통일전선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것이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이다.
415) | 개화당이 일본을 모방하고 일본의 힘을 빌리려고 했던 것은 개항 직후부터 시도한 중대한 오류였다. 강화도조약 이듬해인 1877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에 이어 원산·목포에 東本原寺 別院을 설치하고 조선의 승려와 개화당 인사와 교류하며 정계에도 깊이 관여한 일본 東本原寺 승려 奧村圓心의≪朝鮮國布敎日誌≫에 그때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동본원사 별원에서는 일본 청년에게 조선어를 가르치며 특수 훈련을 시켜 갑신정변에 투입했다가 희생되기도 했다. 그의 여동생 奧村五百子는 박영효와 살면서 많은 화제를 남겼다(조동걸,<奧村圓心의「朝鮮國布敎日誌」>,≪韓國學論叢≫7,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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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 | 1884년 12월 6일 발표한 개화정권의 14개<政令>은 다음과 같다. 김보경 등,<1884년 정변의 政令에 대하여>(≪역사와 현실≫30, 한국역사연구회, 1998), 10∼25쪽. ① 大院君 귀국과 淸國에 대한 朝貢撤廢 ② 門閥廢止·人民平等·人材登用 ③ 地租法 개혁·窮民救濟·財政確立 ④ 內侍府 폐지 ⑤ 貪官汚吏 숙청 ⑥ 各道 還上制 폐지 ⑦ 奎章閣 폐지 ⑧ 巡査制 실시 ⑨ 惠商公局 혁파 ⑩ 流配 禁錮 죄인의 재조사 ⑪ 4軍營을 1營, 왕세자로 대장 임명 ⑫ 財政 一元化 ⑬ 議政府 회의제 확대 실시 ⑭ 議政府 六曹외의 정부조직 개혁 |
417) |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나 중국의 신해혁명도 수많은 혁명운동의 축적 위에서 이룬 혁명이었고, 한국에서 1960년 4·19혁명부터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실패의 기록 위에서 민주화를 달성한 것이다. 혁명은 혁명운동의 축적 위에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
418) | 都冕會, 앞의 글, 174∼178쪽. |
419) | 金正起,<조선정부의 독일차관도입(1883∼1894)>(≪韓國史硏究≫39, 한국사연구회, 1982), 85∼120쪽에서 독일 자본의 도입으로 말미암은 경강상인의 몰락을 비롯한 한국 경제의 타격상이 분석되어 갑신정변 후 역사의 표본상을 적절하게 전해 준다. 이 시기 미국자본의 침투에 대해서는 하지연,<타운센드상회연구>(≪한국근현대사연구≫4, 한국근현대사연구회, 1996)가 참고된다. |
420) | 都冕會,앞의 글 참조. 그때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 상인과 함께 낭인들이 들어와 조선 침략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던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 직전인 1893년의 일본인 거주자를 보면 서울에 823(325) 인천;2.504(974) 원산;794(307) 부산;4.750(2097)명으로 총 8.871(3.703)명이었다. ( )안에 나타낸 여자 인원이 많은 것을 보면 일본인 이주가 장기 생활을 전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姜昌一,≪근대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역사비평사, 2002), 60∼61쪽. |
421) | 柳永益,<갑오경장>(≪한국사≫40, 국사편찬위원회, 2000), 281쪽. |
422) | 그때 배치된 고문관이 石塚英藏·齋藤修一郞·仁尾惟茂·岡本柳之助·楠瀨幸彦·星亨·武久克造 등이었다. |
423) | 일본 경제는 신식화폐발행장정으로 금융시장을 침식하고,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부설을 통하여 운수체계와 통신시설을 독점하고, 통신시설이 농토를 잠식하고, 어업·광업·해운업까지 박탈하고 있었는데 1894년을 분수령으로 침략이 본격화되어 조선 경제가 일본 자본주의에 편입되어 갔다. 그런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금융·교통·통신 등의 유통산업의 침략에 대하여 침략으로 인식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오히려≪독립신문≫처럼, 개발로 착각하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1차산업의 손실은 침략으로 보면서 특히 3차산업에 대해서는 침략여부를 분간하지 못한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