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미의 책략과 일본 제국주의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제1단계로 1876년 강화도조약을 성공시킨 후 1884년 갑신정변에서 제2단계의 야욕을 달성하려다가 실패하고 제3단계로 1894년 갑오경장의 우위를 잡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민족적 저항과 정부의 외교적 노력, 그리고 열국의 견제도 있었으므로 그들의 뜻대로 달성될 수 없었다. 조선이 그때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중흥을 꾀하려고 했던 것을 보면 독립의지가 조야에 충만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가 영·미 제국주의와 합작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새로운 단계에서 추진한 것이 1900년대 초두의 동북아 정세였다. 즉, 러시아 제국주의의 팽창을 크리미아전쟁(1854∼56)과 아프가니스탄전쟁(1878∼80)으로 막고, 다시 극동지방으로 터져나오는 러시아를 일본의 손을 빌려 막으려고 계산한 것이 영국과 미국의 속셈이고, 그의 대가로 일본에게 한국침략의 우선권을 보장했다. 이것은 한국 침략을 소망하던 일본 제국주의로서 절호의 기회였다. 영일동맹(1902. 1. 30, 제2차 1905. 8. 12)을 맺고, 러일전쟁을 도발하고(1904. 2. 8∼2. 10) 한편, 미일협정 즉, 테프트·가쓰라 비밀협정(1905. 7. 29)을 맺은 것이다. 이듬해에 노일강화조약-포츠머드조약(1905. 9. 5)을 체결하여 일본은 한국침략의 국제적 보장을 확실하게 끝냈다. 이것이 제4단계의 일제 침략이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국제적 보장을 배경삼아 한국 침략을 법 절차도 무시하고 난폭하게 추진하였다. 러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의 국외중립선언을 무시하고439) 한반도 전 영토와 해역에 일본군을 진주시켰던가 하면440) 한국파견대를 편성하여 서울의 왕궁 정면의 남산 일대에 군영을 설치하고441) 창덕궁·원구단·문희묘·광제원 같은 공공시설도 모자라 민가까지 숙영지로 징발하여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듬해인 1904년 2월 23일에 韓日議定書를 강제 체결하였다. 체결에 반대한 탁지부대신 겸 내장원경 李容翊을 납치하고 보부상의 두목 吉永洙와 육군참장 李學均과 참령 玄尙健은 연금하고 체결하였다.442) 이것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국제 협약이 될 수 없다.
더구나 주권의 제약을 규정한 협약이 군대를 주둔시킨 협박 속에 체결되었다는 것은 불법인 것이다.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施政改善에 관한 忠告를 받아 들일것”(제1조), 일본정부는 “軍略上 필요한 地點을 隨機收用함”(제4조), 그리고 제5조에는 제3국과 의정서에 위배되는 협약을 맺을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443)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위하여 그해 8월에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정부 부처에 고문을 배치하고, 그것을 비판한≪帝國新聞≫을 일본 헌병사령부에서 정간시켰다. 전국 곳곳에 군략상 필요한 지점이라 하여 요소 요소를 점령하던 일제는 獨島를 영토에 편입시켰다.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카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1904년 11월 典圜局을 폐쇄하고<화폐제도정리안>을 만들어 백동화를 정리하여 한국 화폐를 일본 화폐에 종속시켰다.444) 그러니까 대한제국은 1904년 한일의정서의 체결부터 일본의 준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그후의 침략과정에서 형식상 체결한 1904년 8월의 한일협약,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445) 1907년 7월의 한일신협약, 1910년 8월의 병합조약들은 1904년 한일의정서의 구체화 과정에 지나지 않았고, 그나마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은 없었다.446) 일본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는 대한제국의 강점과 동시에 중국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1909년에 間島協約으로 한중간의 국경분쟁을 종식시키면서 만주에서 安奉철도 부설권 등 여러 가지 이권을 침식하며 만주 침략을 구체화하였다.
439) | 한국정부의 열국에 전달된 局外中立宣言은 1904년 1월 21일었으나 일본정부에는 그에 앞선 光武 7년(1903) 9월 3일이었다. 당시 주일공사 高永喜 명의로 일본 외무대신 小村壽太郞에게 전달하였다(≪日本外交文書≫제36권 제1책, 72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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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 金正明編,≪朝鮮駐箚軍歷史 日韓外交資料集成 別冊1≫(巖南堂書店, 소화 42년:1967), 33쪽. |
441) | 지금의 필동·회현동·동자동·청파동·이태원·삼각지·이촌동 일대가 일본군의 주둔지였는데 뒤에 일본인 거주지가 됐다. 옛 거주지 동쪽 끝에 위치한 영희초등학교는 일본인의 日出소학교였고, 서쪽 끝의 용산고등학교는 9할이 일본인 학생이었다. |
442) | 尹炳奭,<을사5조약의 신고찰>(≪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36쪽. |
443) |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한국 침략을 구체화하는<帝國 對韓方針>과<對韓施設綱領>을 만들어 5월 30일 원로회의에서 확정하고 6월 11일에는 ‘天皇’의 재가를 받았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다는 기본방침을 천명하고, 그를 위한 시설강령 6개항에서는 ①한국의 국방은 일본군이 맡는다 ②외교 감독을 강화한다 ③재정을 장악하여 재정에 부담이 되는 군대를 해산하고 주외국 공관을 철수한다 ④교통기관의 장악 ⑤통신기관의 장악 ⑥농업·임업·어업·광업의 척식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한일의정서에 근거한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한일의정서에서 준식민지상태가 전개된 것이다. |
444) | ‘화폐제도정리안’의 ‘정리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①한국화폐의 기초와 발행화폐를 일본과 동일하게 한다 ②한국화폐와 동일한 일본화폐의 유통을 인정한다 ③본위화폐와 태환권은 일본화폐로 하거나 또는 일본 태환권을 준비시켜 일본정부가 감독 혹은 보증하는 은행권으로 한다. |
445) |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을 궁전 안팎에 포진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려다가 이완용을 비롯한 5대신(을사5적)의 찬동을 얻기는 해도 참정대신을 비롯한 3대신의 반대가 있었고, 광무황제의 비준을 얻지 못하여 실패했다. 그런데 강압적으로 이행시켜 ‘늑약’이 되었다고 해서 선인들은 ‘乙巳勒約’이라 불러 왔다. 을사늑약의 원문에는 협약의 이름조차 없어 ‘乙巳無名條約’이라 부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韓日協商條約’·‘乙巳條約’·‘乙巳五條約’·‘제2차 韓日協約’·‘乙巳保護條約’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여러 호칭 가운데 ‘을사늑약’이 선인들이 부르던 이름이고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446) | 李泰鎭,<서론-“보호”에서 “병합”까지>(≪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9∼2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