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한(조선)민족 독립운동의 전개와 의의
이상과 같은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하여 한(조선)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해서 축적한 민족역량을 깨우쳐 일으키면서, 새롭게 근대적 역량을 개발하면서, 민족운동 또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왜란을 당하여 안동과 상원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을 당해서는 전국에서 항일의병이 봉기하였다. 1904년에는 활빈당이 의병으로 전환하고, 1905년 을사늑약에 맞서서는 의병전쟁이 민족전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광무황제도 을사늑약 비준을 거부하고 특사를 파견하여 외교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르주아 지식인들도 계몽운동으로 구국전선을 형성하여 항쟁하였다. 1907년에 이르러 신민회의 경우에서 보듯이 계몽운동이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독립군으로 발전할 기반을 형성해 갔다. 의병전쟁은 유림이 주도했든, 민중이 주도했든, 전통시대의 역량을 나타낸 것이고, 계몽운동은 새롭게 개발한 근대적 역량을 나타낸 것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주로 만주 각처에서 독립군 기지개척이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1894년부터 전개된 구국 독립운동의 연장이요 발전이었다는 민족운동의 총체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475)
그렇게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한(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의 특징적 기조를 보면, ① 역사적 전통역량의 기초 위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한(조선)민족은 식민지 당국인 일본보다 우월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민족적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잠시 낮잠을 자다가 나라를 잃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식민지 민족운동 가운데 전통시대의 역량을 기초한 경우는 월남·인도·아랍제국·폴란드·아일란드가 대표적인데 전통역량을 대변한 전통시대의 역사 저술이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역사저술의 발달을 보더라도 한(조선)민족의 독립운동이 어디보다 우월한 전통 역량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전통적 역량의 기초 위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이라도 나라를 잃었던 반성과 세계적 변동기를 맞아 근대화를 동시에 추구한 독립운동이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을 전후하여 독립군기지를 개척하면서 종래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통합하여 의병전쟁의 전쟁방략과 계몽운동의 정치이론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근대적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수립해 갔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에서 독립의군부(1914)와 대한독립단(1919) 외에 어떤 독립운동 단체도 임금이 없는 근대국가 수립을 표방하였다. 3·1운동에서나 임시정부의 조직과 운영에서나 만주의 어떤 독립군 단체도 봉건적 구시대를 동경하지 않았다. 그 기초 위에서 해방 후 새 조국 건설에서 신분과 성별의 차별 없는 민주공화국과 인민공화국을 표방할 수 있었다. 남북에서 실시한 농지개혁도 독립운동의 유산이었다.
③ 독립운동의 주체세력을 보면, 각계각층이 참가한 민족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점점 대중화하여 아래로부터 이룬 민족운동이 발달한 점이 특징이다. 전통시대의 권문세가나 자산가나 부호보다 민중의 참여가 폭넓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농민운동·노동운동·여성운동·학생운동 등의 사회운동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해방 후 남한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 아래로부터 이루어진 사실로 연결되어 근현대사의 발전을 아래로부터 이루었다는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은 민주주의의 자산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아래로부터 이룬 근현대사에 지도자의 역량이 따르지 못한 한계는 반성할 점이다.
④ 독립운동의 이념은 다양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유는 독립운동 주체의 다양성에도 있고, 독립운동이 시기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양화된 것도 있고, 독립운동 무대가 세계 각처에 이른 탓으로 각처의 영향도 있었다. 1910년대에는 공화주의·보황주의·복벽주의에 한정된 듯 했으나 3·1운동을 전개하면서 3·1운동 이념인 인도주의의 실현 방법으로 자유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이념이 만발하게 되었다. 어느 길이어야 독립을 쟁취할 것인가의 고뇌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이념이 다양했듯이 방법과 전략도 다양하였다. 다양한 방략 가운데 무장독립운동인 독립전쟁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해방 당시 무장단체는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 즉, 소련88여단의 조선인부대 등 세곳에 있었다.
⑤ 이념과 방략의 다양성이 분열로 가는듯하면 통일전선 형성을 추진하였다. 통일전선은 3·1운동과 더불어 7개의 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을 곧 통합작업을 추진하여 그해 9월 통합 임시정부 결성이 서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1923년의 상해 국민대표회(김동삼)와 1924년 해삼위 국민위원회(김규식)·만주 반석의 조선노동당(김응섭)·길림의 고려혁명당(양기탁)이 대독립당·민족대당·민족유일당의 결성을 추진한 바 있었고, 1926년에는 대독립당 북경촉성회가 결성되면서 민족유일당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것이 만주에서는 3부통합으로 갔고 국내에서는 신간회(이상재·권동진·안재홍·허헌·김병로) 결성으로 일단락되었다. 그후 중국 관내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김규식·김원봉)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김구·조소앙·이청천)가 결성되고 그를 통합하기 위하여 1939년 기강에서 7당회의와 5당회의를 개최하였다. 이어 1942년에는 중경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통합되고 한편, 임시정부의 통합의회가 출범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연립정부가 형성되면서 통일전선이 더욱 진전하여 연안의 독립동맹(김두봉·무정)과 노령의 조선인부대(김일성·최용건·김책)와도 연락하고, 노령에서도 임시정부와의 통일전선을 추진하여 큰 성과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476) 바로 그때에 8·15를 맞은 것이다. 이러한 통일운동은 해방 후 미·소가 분단한 조국을 민족의 힘으로 통일하려는 남북협상의 기초가 되었다.
⑥ 독립운동은 격정적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식민통치의 수탈성·잔인성·직접통치 등의 특성에 대응한 것이었다. 한국독립운동에서 무장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고, 의열투쟁이 끊임없이 전개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의열투쟁은 테러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다르다. 의열투쟁은 목적이 인류 정의를 실현하는 데 있고, 테러는 야만적 보복에 있다. 때문에 의열투쟁은 대상이 불의를 자행하는 인간과 시설인데 테러는 대개 불특정 다수인과 불특정 물자를 대상으로 한다. 의열투쟁은 자기를 떳떳이 밝히는데 테러는 자신을 숨긴다. 이러한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의 이론으로 정립한 것은 1923년 신채호의<조선혁명선언>이었다.
⑦ 한편 온건한 문화운동으로도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식민통치가 민족동화정책을 식민문화를 통하여 추진했던 데 대응한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문화운동이 민족을 지키기 위한 어문운동과 역사운동으로 전개된 것은 의미가 있지만, 그를 핑계하여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한 것은 자치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
⑧ 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에서 시작되어 1945년 전야까지 끊임없이 전개된 지속성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러한 지속성은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특징이다.
⑨ 독립운동은 조선 안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만주·중국·일본·러시아·미주·유럽 등 세계 각처에서 전개한 세계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므로 한국독립운동은 국제연대를 개척, 형성하면서 전개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나 광복군이 중국국민당과 연대하고,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중국공산당과 연대하고,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부대가 중국공산당이나 소련과 연대하고, 그리고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한 민족운동 단체가 미국정부와의 유대를 추구했던 것도 국제연대의 모색이었다. 국제연대의 모색에서 잊지 못할 것은 아시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과 유대를 맺고 있었던 사실이다. 그리고 국제사회당이나 세계무정부주의연맹이나 에스페란토운동과 연계하고 있었던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로 말미암아 해방 후 국제적 패권주의에 현혹되어 민족역량이 분열된 이유가 되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한다.
⑩ 그와 같이 독립운동이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강력하고 찬란하게 전개되었는데 그의 소득은 뜻밖이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영·미·불 등의 연합국의 식민지에서는 1930년대 이후 프랑스의 인민전선 형성처럼, 본국의 민주화에 힘입어 식민지 통제가 간접식민통치 이상으로 완화되어 그 기회에 식민지 민족의 역량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인도와 월남의 경우에 네루나 호치민의 영도력도 그것이었지만, 그를 뒷받침하는 민족 역량이 성장하고 있었으므로 해방 후의 민족운동을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에 비하면, 추축국 일본은 1930년대 이후 파쇼화와 침략전쟁을 강행하면서 식민지 통제가 강화되어 그 기회에 한국인의 독립운동이나 민족역량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그것은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에서 민족역량의 회생을 위하여 새로운 정비와 노력이 요구된 이유가 되었다. 그 틈에 미국과 소련의 패권주의가 국토를 분단 점령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민족역량은 더욱 손상을 입었다. 그때 분단정부 수립을 주도한 행각은 역사의 심판을 받겠지만, 그러나 민족역량의 회생이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가운데 6·15공동선언이 그를 입증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에 항거하여 한(조선)민족은 끊임없이 국내외 곳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일제 강점과 그의 식민통치가 민족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대한제국을 강점할 때 위조와 기만으로 만든 일련의 조약을 통한 강점이었으므로 식민통치는 국제법까지 위반한 폭거였다. 여기서 1963년 유엔 국제법위원회의 ‘조약법에 관한 보고서’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폭거를 잘못된 사례로 지적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477)
475) | 여기서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관계를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민족운동은 민족(시민)혁명운동·민족해방운동·민족통일운동 등, 세 가지 유형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근대적 민족개념이 형성되면서 일어난 시민(민족)혁명운동에서 민족운동이 출발하고 있다.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이 그에 근접한 성격이고 세계적으로는 프랑스혁명이나 신해혁명이 대표적이었다. 다음에 민족해방운동인데 이것은 반식민지 종속(반식민지)해방운동·식민지해방운동·사회주의 계급해방운동으로 나뉘어진다. 독립운동은 원칙적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일컫는다. 반식민지해방운동은 중국의 경우처럼,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에 끝내면 독립운동으로 이어지질 않으나 한반도처럼 의병전쟁이나 계몽운동의 반식민지해방운동이 제국주의 침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면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독립운동사의 序章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계급해방운동은 독립운동에서 계급해방운동을 동시에 추진하여 독립운동 기간에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독립한 연후에 다시 계급해방운동을 전개하여 해방전선을 형성한 경우를 말하는데 북한이 밟은 길이다. 다음에 민족통일운동은 현재 한(조선)민족의 당면한 과제로서 세계적으로는 이탈리아통일(1861)·독일통일(1871)에서 비롯되었고, 베트남통일(1975)과 독일통일(1991)이 근래의 사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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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 | 백범김구선생전집편찬위원회,≪白凡 金九全集 8≫(대한매일신보사, 서울, 1999), 927쪽. |
477) | 박태균,<해방 후 한일회담 과정에 나타난 1900년대 “한일협약”에 대한 인식고찰>(≪일본의 대한제국 강점≫, 까치, 1995), 34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