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움집터
신석기시대의 움집터는 대개 큰 강이나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암사동514)이나 미사리유적515)과 같이 강이나 바닷가의 모래땅에서도 발견되기도 한다.
평면형태가 둥글거나 네 모서리를 줄인 네모꼴인 것이 주류이나 후기에 이르면 네모꼴이나 긴네모꼴로 바뀌게 된다. 크기는 대개 지름 또는 1변의 길이가 6m 내외이고 깊이는 60m 내외가 가장 많다. 집터의 바닥은 대부분 진흙을 깐 후 굳게 다졌으며 바닥 한가운데에는 불을 피운 화덕자리가 남아 있다. 화덕은 둥글거나 타원모양 또는 네모꼴로 바닥을 파고 그 주위에는 강돌로써 구덩이의 모양과 같이 돌리거나 진흙을 쌓아 둑을 돌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덕 곁에는 바닥을 판 후 항아리의 밑을 떼어내고 거꾸로 묻은 저장시설이 남아 있는데 움집 밖에 설치되는 경우도 있다.
움집 바닥에는 기둥을 세웠던 기둥구멍이 집 안쪽의 벽을 따라 6∼7개 정도 남아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들 기둥구멍을 기준으로 움집을 복원할 수 있다. 즉 기둥머리에 도리를 걸고 그 도리에 서까래를 걸쳤으며 서까래 끝은 집 바깥의 땅에 꽂고 그 위에 풀이나 짚 등으로 지붕을 덮은 원추 또는 사각추의 모양을 띠게 된다.
현재까지 조사된 집터에 대해 살펴보면 대개 별표와 같다.
이외에도 1991∼1993년 사이에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한 금릉 松竹里유적530)에서도 신석기시대의 움집터 10기가 발견되었는데 아직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평면형태는 둥근 것과 긴 네모꼴, 모줄인 네모꼴 등이 있다. 크기는 둥근 것은 지름 4.1m, 깊이 40㎝ 정도의 소형이며, 긴 네모꼴은 크기 5.0m×3.4m, 깊이(현) 10㎝와 6.5m×4.4m, 깊이 20㎝ 정도의 중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모줄인 네모꼴의 집터는 크기 7.5m×4.7∼7.4m, 깊이(현) 36∼60㎝ 정도로서 비교적 대형에 속한다.
바닥시설은 부분적으로 불탄 흔적이 남아 있으나 거의 아무런 시설이 없으며 화덕자리도 시설 없이 중앙부에 지름 1.2m 범위에 불땐 흔적만 남아 있다. 저장공은 집터 안팎에서 발견되는데 안쪽은 대개 2개가 원칙이며 주로 둥글거나 타원모양인데 타원의 경우는 대개 집터의 장축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밖의 것은 1개가 원칙으로 둥근 형태의 집터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크기는 136㎝×75㎝, 깊이 30㎝에서 3.1m×2.38m, 깊이 50㎝까지로서 대개 집터의 크기와 비례하고 있다.
514) | 金元龍,<岩寺洞江岸遺蹟 發掘報告>(≪歷史敎育≫ 13, 1970). 金光洙,<岩寺洞櫛文遺蹟 發掘槪要>(≪考古美術≫, 9-11, 1968). 金鍾徹,<서울 성동구 암사동 선사시대 유적발굴>(≪박물관뉴우스≫ 18, 1971). ―――,<서울 岩寺洞先史聚落址>(≪韓國考古學年報≫ 2, 1975). ―――,<岩寺洞 新石器時代住居址調査>(≪韓國考古學年報≫ 3, 1976). 李白圭,<岩寺洞 新石器時代住居址調査>(≪박물관신문≫ 51, 1975). 任孝宰,≪岩寺洞≫(서울大 考古人類學叢刊 11, 1985). ―――,≪岩寺洞遺蹟緊急 發掘調査報告≫(岩寺洞遺蹟發掘調査團, 1983). 國立中央博物館,≪岩寺洞≫(國立博物館 古蹟調査報告 26, 199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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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 任孝宰,<渼沙里遺蹟 緊急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年報≫ 8, 1981). 尹世英,<渼沙里住居址>(≪史叢≫ 25, 1981). 渼沙里遺蹟發掘調査團,≪渼沙里≫Ⅰ∼Ⅴ(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 1994). |
516) | 과학백과사전출판사,<토성리유적>(≪압록강·독로강유역 고구려유적 발굴보고≫, 1932), 99∼112쪽. |
517) | 김용간·서국태, 앞의 글. |
518) | 황기덕,<무산 범의구석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 6, 1983). |
519) | 도유호·황기덕, <궁산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2, 1957). |
520) | 도유호,<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2, 1957). |
521) | 김용간·석광중,≪남경유적에 관한 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4). |
522) | 과학백과사전출판사,<금탄리 원시유적 발굴보고>(≪유적발굴보고≫ 10, 1964). |
523) | 任孝宰, 앞의 글(1981). 尹世英, 앞의 글. |
524) | 國立中央博物館, 앞의 글(1994·1995), 221쪽. |
525) | 金元龍, 앞의 글(1970). 金光洙, 앞의 글. 金鍾徹, 앞의 글(1971·1975·1976). 李白圭, 앞의 글. 任孝宰, 앞의 글(1983·1985). 渼沙里先史遺蹟發掘調査團, 앞의 글(1994). |
526) | 金載元·尹武炳,≪韓國西海島嶼≫(1957). |
527) | 서울大博物館,≪鰲山里遺蹟≫(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9, 1984). ―――,≪鰲山里遺蹟≫(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10, 1985). ―――,≪鰲山里遺蹟≫(서울대 考古人類學叢刊 13, 1988). |
528) | 沈奉謹,≪陜川鳳溪里遺蹟≫(東亞大 博物館, 1989). |
529) | <淸原 雙淸里遺蹟 발굴조사개보>(≪박물관신문≫ 265, 1993. 9). |
530) | 曺永鉉,<金陵 松竹里遺蹟 發掘調査>(≪三韓社會와 考古學≫-第17回 韓國考古學 全國大會 發表要旨, 19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