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토기의 쓰임새와 성분분석
토기의 쓰임새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토기의 실제 쓰임새에 관한 것이며 하나는 연구의 대상으로서이다. 연구의 대상으로서 토기는 형식분류와 시기구분을 하는데 대단히 유리하다는 점이다. 토기는, 석기처럼 돌감(石材)의 성질에 따라 미리부터 석기의 모양이 어느 정도 제한되는 경우와는 달라서 그 형태는 만드는 이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어떤 시기의 어떤 집단 속에서 빚어지는 것이므로 정형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잘 깨어지고, 자주 만들다 보니 그 가운데서 계속 변형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토기들은 그릇모양의 변화보다는 주로 그릇에 베풀어진 무늬가 자주 변화했다고 보인다. 이를 이용하여 무늬의 유형 및 무늬 베푸는 법(施文法)과 생김새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함을 살펴보는 연구가 발달하였다.
토기의 실제 쓰임새는 저장용기와 식기(집단 준비용이거나 개인식기)로 나눌 수 있겠는데 이 가운데 저장용기라는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즉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매우 거칠고 흡수율이 높아 보여 액체 등을 담아 두기보다는 열매, 마른 낟알 등을 담아 두기에 적합했을 것이란 생각에서이다. 실제로 궁산·지탑리·남경 등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는 매우 크게 만들어진 것이 많아 저장용기로 생각되고 있다. 남경유적에서 나온 토기를 예로 들면 87l나 되어622) 마을사람들의 식량창고로 여겨지고 있다.
그 다음 준비·조리용인 火食器로서의 기능이 있는데, 지금까지 토기연구자들이 여기에 대해 그다지 자신있어 하지 않았으나, 끓어 넘쳤거나 그릇가에 유기물이 붙어 있는 등 화식기로 썼던 토기들이 최근에 자주 출토됨에 따라 그 용도가 확실해졌다. 사실상 토기란 선사시대 도구 가운데 불에 직접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비가연성 소재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화식기」임이 그리 내세워지지 않았었는데, 이 또한 그 외관이 거칠고 약하므로 액체를 끓이는 동안 기벽이 녹아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등의 우려가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똑같은 걱정이「액체저장용기」라는 점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러한 토기의 쓰임새에 대한 의문점들을 해명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로 1980년대 이후 한국고고학에서 토기에 대한 여러 가지 과학분석이 발달하였다.623) 예를 들면 저장용 및 화식기 등 그릇의 기능은 그릇의 흡수율(Porosity) 및 구운 온도와 가장 관계있을 것이라고 보아 이를 측정해 보는 것이다.624) 그 밖에 흡수율이나 굳기(硬度) 등 토기의 외관에 관계되는 물리적 성질을 알아내기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토기의 재료인 찰흙과, 그 화학조성상의 특징, 토기를 구운 온도 등 화학분석에 관계되는 부분을 알아내기 어려운데, 이것은 판단하기에 변수가 많고 자연과학자와의 제휴가 필요하며 첨단의 과학기기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은 것이다.
최근에 와서 신석기시대 토기의 재료는 여러 가지의 점토광물(kaolinite·montmorillonite·illite·chlorite 등)이라는 것, 여기에 토기 만들 때의 작업성을 좋게 하려고 석영·장석·운모·활석·석면·조개껍질 등의 비짐을 섞는다는 것, 토기를 대략 700도 정도에서 구웠다는 것 등을 알아낸 것은 큰 성과라고 보인다. 그리고 토기의 실제 생김새나 만들기에 관한 추정도 과학적 방법의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토기들은 대개 테쌓기(輪積法)와 서리기(捲上法)의 두 가지 방법으로 만들며, 큰 그릇일수록 테쌓기를 한다고 여겨지고 있는데 구평리에서 출토된 토기들의 X선촬영을 통해 이를 확인한 바 있다.625) 토기의 두께는 7∼8㎜ 사이가 가장 많으며 큰 그릇이면 더 두꺼워지고 작은 그릇은 얇다. 그러나 5㎜ 이하의 두께는 찾기 어려우며 10㎜ 이상의 것도 거의 없다. 결국 어떠한 크기의 토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작정하였을 때 토기 쌓는 방법과 토기의 두께는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그릇의 균형과 안정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항상성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 토기를 바탕흙에 따라 구별해 보거나 그 쓰임새를 몇 가지로 나누는 등 결국 토기를 관찰하고 분류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기준을 과학적 수단에 요청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그 유적의 사람들은 토기의 바탕흙이나 비짐 등을 어디에서 구해 왔을까 하는 원료산지에 대한 추구가 있겠는데, 이것은 물리화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유적 주위의 지질과 지형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만큼, 보다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하게 된다. 더구나 선사인들의 교역이나 교역로에 관한 문제와도 맞물리게 되니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적어도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원료를 구하기 위하여 유적에서 그렇게 멀리 가지는 않았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626) 한편 선사시대 토기들은 그것들을 구워낸 제작소(가마터)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 원료산지에 대한 화학적·지질학적 분석과 고고학적 고찰이 종합되어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申叔靜>
622) | 김용간·석광준, 앞의 책, 66∼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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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 | 崔夢龍·申叔靜,<한국고고학에 있어서 자연과학적 연구 : 토기편>(≪國史館論叢≫ 62, 1995), 1∼23쪽 참조. 최몽룡·신숙정·이동영,≪고고학과 자연과학≫(1996). |
624) | 글쓴이들이 측정한 값,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실험한 바를 종합해 보면 신석기시대 토기의 흡수율은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실험이나 민족지학적인 관찰을 통해, 흡수율이 높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뒷손질 등을 통해 화식기나 액체저장용기로 쓸 수 있음이 잘 알려져 있다. |
625) | 정영호·신숙정 외,<토기의 관찰과 분석>(≪사천 구평리유적≫, 1993), 95∼199쪽. |
626) | 글쓴이들은 미사리와 일산지역의 지질분석 및 이 곳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들의 성분을 분석한 바 있는데, 미사리토기의 바탕흙은 유적 가까이 팔당 주위의 산록에서, 일산토기는 유적 바로 앞에서 바탕흙을 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崔夢龍·申叔靜, 앞의 글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