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Ⅱ. 신석기문화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3) 신석기시대의 유물(1) 토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1. 구석기시대
          • 1)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1) 구석기시대의 개념
            • (2) 구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2)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1) 제4기의 지질과 자연환경
            • (2) 식물상과 동물상
          • 3) 화석인골과 편년
            • (1) 편년별 화석인골
            • (2) 화석인골의 몇 가지 특징
        • 2. 구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구석기유적의 분포
            • (1) 남한의 구석기유적
            • (2) 북한의 구석기유적
            • (3) 집자리 복원
          • 2) 구석기시대의 유물
            • (1) 유물의 분류
            • (2) 전기 구석기
            • (3) 중기 구석기
            • (4) 후기 구석기
        • 3. 구석기시대의 생활
          • 1) 생업과 의식주생활
            • (1) 생계경제
            • (2) 구석기시대의 주거지
            • (3) 구석기의 도구제작
            • (4) 구석기시대의 사회생활
          • 2) 의식과 예술
            • (1) 예술작품
            • (2) 의식
        • 4. 주변지역 구석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시기별 구석기문화
            • (2) 비교와 문제점
          • 2) 일본
            • (1) 한반도와 일본의 자연환경
            • (2) 전기 구석기시대
            • (3) 중기 구석기시대
            • (4) 후기 구석기시대
            • (5) 한국과의 비교
          • 3) 시베리아
            • (1) 구석기유적의 발견
            • (2) 전기 구석기시대
            • (3) 중기 구석기시대
            • (4) 후기 구석기시대
            • (5) 한국과의 비교
      • Ⅱ. 신석기문화
        • 1. 신석기시대
          • 1)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시대설정
            • (2) 연구사 개관
            • (3) 시기구분
          • 2)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
            • (1) 후빙기의 자연환경
            • (2) 식물상과 동물상
          • 3) 인골의 출토
            • (1) 인골의 인류학적 연구
            • (2) 인골의 해부학상 형태 비교
        • 2.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신석기유적의 분포
            • (1) 유적분포의 특성
            • (2) 주요 신석기유적
          • 2) 신석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조개더미
            • (3) 무덤
          • 3) 신석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와 뼈연모
            • (3) 예술품
        • 3. 신석기시대의 생업과 사회
          • 1) 생업
            • (1) 수렵·어로·채취
            • (2) 농경과 목축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교역
            • (3) 의식·신앙 및 예술
            • (4) 의식주
        • 4. 주변지역 신석기문화와의 비교
          • 1)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영역구분과 지역성
          • 2) 동아시아 신석기문화의 이동
            • (1) 신석기문화의 이동
            • (2) 남해안계와 규슈지역의 신석기문화
          • 3) 서북한·동북한지역과 요동반도의 신석기문화
            • (1) 미송리 하층과 후와 하층
            • (2) 서포항 Ⅰ∼Ⅲ기층 당산유적과 소주산 중·하층, 오가촌기
            • (3) 쌍학리유적, 서포항 Ⅳ기층과 소주산 상층기
            • (4) 신암리 Ⅰ기층, 농포·호곡동 Ⅰ기층과 우가촌 하층기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다. 여러 지방의 신석기토기

 이들 토기들의 형태의 유사성과 출토된 때의 밀집도로 보아 대략 남해안지방·강원도지방·동북지방·중서부지방·청천강 이북지방의 5개 지역군으로 나누어557) 각 지역군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가) 남해안지방

 남해안지방 신석기유적의 수는 약 30군데가 넘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서 남해안지방이란 조개더미유적들이 주로 찾아진 경남·전남의 해안지방과 그 부속도서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약 10여 개소의 유적발굴보고서가 나와 있는데, 부산 동삼동558)·금곡동 율리559)·범방560)·북정,561) 김해 수가리,562) 울산 신암리,563) 통영 욕지도564)·연대도565)·상노대도,566) 사천 구평리,567) 여천 돌산 송도568) 등이 중요하며 김해 농소리,569) 부산 다대포570) 등 약보고서가 나와 있는 유적이 몇 곳 있다. 흑산도유적은 지표조사만 되어 있으나 이 곳이 남해도서 가운데 큰 섬에 속하며, 도서지방의 조개더미 가운데는 육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고, 또 남해안으로부터 서해안의 신석기유적으로 연결되어 가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출토유물도 다양하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앞으로 중요한 유적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571) 1997년 8월 현재 발굴중인 제주도 고산리유적도 덧무늬토기와 좀돌날(細石刃)·좀돌날몸돌(細石刃石核) 등의 석기류가 나오고 있어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는 곳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대부분 남해안지방 신석기토기로서의 공통성을 갖고 있다. 즉 덧무늬토기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찍은무늬(押引文·押捺文 또는 刺突文)토기→태선문(太線文)토기→겹입술토기로 변천되어 감을 볼 수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 전시기를 통하여 무늬없는 토기가 같이 만들어지고 있는 점도 남해안지방 토기의 특징이다. 무늬가 있는 경우에도 입술 가까이에 주로 베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무늬가 많지 않은 것이 남해안 신석기토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가) 덧무늬토기(<그림 1> ①∼④)

 남해안지방에서 가장 일찍 만들어진 토기는 덧무늬토기인데 이는 또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가장 이른 토기로 여겨지고 있다. 덧무늬토기는 토기 표면에 덧띠를 따로 덧붙이는 것을 말하는데 순수하게 가는 덧띠 혹은 굵은 덧띠로 이루어진 세선융기문(細線隆起文)·태선융기문(太線隆起文) 등이 있으며, 토기벽에 덧띠를 붙인 후 새겨 나가기도 하고 뒷시기로 가면 하나의 토기에 덧무늬와 새김무늬가 같이 베풀어지게 된다.

 덧무늬토기가 베풀어진 토기들은 그다지 크지 않으며 대개 납작밑을 가지고 있다. 이들 토기들은 모두 찰흙질로 빚어졌으며 여기에다 토기가 잘 빚어지도록 주위의 화산암편들을 깨어 보강제로 집어넣기도 하였다.572) 남해안지방의 토기들은 특히 토기를 만든 후 끝손질을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덧입힘(Slip)이나 물감칠의 발달 등이 그것이다. 흰색의 두꺼운 덧입힘층 위에 다시 붉은 물감을 칠한 붉은간토기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림 1>남해안지방의 덧무늬토기와 찍은무늬토기

(나) 찍은무늬토기(<그림 1> ⑤∼(17))

 찍은무늬(押引文)토기는「부산기」토기573)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것은 덧무늬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시기 다음에 나타나며 이 때부터 덧무늬토기의 빈도는 감소하게 된다. 이 토기는 입술 및 그 가까운 부분에 미세한 생선뼈무늬(魚骨文)나 빗금무늬(斜線列文) 등을 찍거나 누른 것이 대표되나 그 밖에도 문살무늬(斜格子文) 등이 눌려 찍힌 것도 나오고 있다. 어느 경우나 무늬들이 매우 작고 미세하며, 따라서 그릇의 두께도 얇은 경우가 많다. 토기에는 목이나 손잡이·귀때(注口) 등이 달리기도 한다. 대개 둥근밑의 작은 바리나 목단지류가 많다. 또 입술 자체에 금을 새긴 이른바 구순각목(口脣刻目)토기도 나오기 시작한다.

 찍은무늬토기가 나오는 시기에 해당하는 방사성탄소연대로는 동삼동 부산기의 4945BP, 상노대도 5층의 6430BP, 송도의 5440·5430BP, 연대도의 6090·6010BP 등이 있다. 대체로 기원전 4000년 전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 태선문토기(<그림 2>)

 太線文시기에 오면 덧무늬토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沈線文계통인 문살무늬·빗금무늬(短斜線文)·집선문·생선뼈무늬 등이 주로 쓰이게 되는데 대개 무늬를 굵고 힘있게 새겨서 태선문이라고 불린다. 이 시기를 두도기574)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가 우리 나라의 신석기 시기구분상 중기에 해당한다. 무늬는 토기의 입술 가까운 데서 점차 밑부분에까지 베풀어지지만, 중기의 늦은 시기로 가면 다시 입술 쪽에 가까운 윗부분에만 무늬가 베풀어지는 쪽으로 회귀하여 토기에 무늬를 많이 베풀지 않는 남해안토기의 특징이 살아 있다. 그리고 태선문이 새겨지는 만큼, 토기살도 두터우며 무늬가 베풀어진 토기의 입술 쪽이 몸체 이하보다 약간 더 두터운 경우도 있다. 토기의 밑은 거의 둥근-뾰족밑으로 바뀌며 드물게 작은 그릇에 납작밑이 만들어진다.

 태선문토기는 남해안의 거의 전 유적에서 나오는데, 이 무늬와 토기의 모양은 모두 암사동을 비롯한 서해안지방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것으로, 이 때에 와서 한강유역과의 교류 혹은 한강유역문화의 전파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입술부분에 자주 베풀어지는 삼각형·마름모형의 집선문은 일본 규슈지방에서 출토되는 토기무늬에도 많아서 규슈지방과의 교류도 추정되고 있다. 태선문시기에 해당하는 탄소연대는 수가리에서 많이 얻어졌는데 4510·4490·4430·4380·4290BP 등이 나와 대략 기원전 3000년을 전후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 2>태선문토기와 손잡이

(라) 겹입술토기(<그림 3>)

 겹입술토기는 남해안 신석기 만기(또는 영도기575))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토기이다. 이 토기는 입술을 겹으로 덧대어 만들었으며(二重口緣), 예외없이 둥근밑을 가졌다. 무늬는 퇴화된 빗금무늬가 주종을 이루지만 늦은 시기에 가면 그마저 생략되어 민무늬로 되는 경향을 보여준다. 겹입술토기는 남해안에서 발굴된 모든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사천 구평리·금곡동 율리·김해 농소리 등 겹입술토기만의 층으로 이루어진 단순유적들도 나타난다. 이것은 신석기 만기 무렵에 사람들이 널리 퍼져 나가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겹입술토기와 함께, 조가비를 비짐으로 쓴 단단하고 검은 토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 토기들은 흡수율이 매우 낮으므로,576) 여늬 그릇들과 구별되는 쓰임새를 갖는 토기들로서, 아마도 액체저장용으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어떻든 겹입술시기에는 여러 형태와 용도의 그릇들이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가락바퀴(紡錘車)도 출토된다. 겹입술토기의 실제 연대는 수가리 3문화층, 율리, 상노대도 2층, 동삼동 영도기 등에서 잰 방사성탄소연대로 볼 때 대개 기원전 1500년 무렵에 해당된다.

<그림 3>겹입술토기와 가락바퀴

나) 강원도지방

 강원도지방에서 최근의 지표조사로 알려진 유적은 비교적 많으나 현재까지 발굴·보고된 유적으로는 교동577)과 오산리578) 두 곳이 있다. 유적의 수는 적지만 두 유적이 우리 나라의 신석기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편이다. 오산리유적을 발굴함으로 해서 강원도지방 신석기문화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때까지는 남해안지방과 함북지방 사이의 기나긴 공간이 문화상으로 과연 비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많았던 것이다.579)

 오산리토기가 가져온 가장 큰 파문 가운데 하나는 유적의 나이가 우리 나라의 신석기 연대 가운데 가장 이르게 측정됨에 따라 한국 신석기토기의 기원이 어디인가라는 논의를 새로이 하게 된 점이다. 보정연대가 기원전 6000년 무렵으로 올라가는 데다가(탄소연대 7120·6780·6130·6080·6070BP 등으로 모두 6,000년을 넘어가는 값이다) 이른 시기의 토기들은 납작밑을 가지고 있어 종래의 시베리아기원설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확실히 우리 나라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가 그 생김새나 무늬를 베푸는데 있어 시베리아 특히 바이칼지역과 닮은 점은 많으나580) 그 사이의 거리와 시간상의 공백을 설명할 수 없다면 바이칼지역으로부터의 전파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또 1960년대에 보고된 교동유적의 위치에 대해서도 새로운 논의가 시작되었다. 교동유적에서는 많은 간도끼류·끌종류와 대롱구슬, 그리고 입술 가까이에만 찍은무늬가 베풀어진 납작밑토기가 나와 석기 및 토기로 볼 때 신석기 후기라고 오랫동안 여겨져 왔으나, 이 곳의 토기들이 오산리 이른 시기의 것과 생김새가 거의 같은 점, 또 공반유물인 묶음낚시 등의 존재로 해서 오산리와의 연관 아래 신석기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편년하는 견해가 나온 것이다.581)

 두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강원도지방의 토기는 세 시기의 것으로 나뉘어지는데, 아래 1문화층의 것이 전형적 납작밑토기로서 서포항이나 남해안지방의 찍은무늬토기들과 가장 비슷하다. 2문화층의 토기도 역시 납작밑이며 전체 유물조합의 성격이 1문화층과 비슷하여 여기서는 같이 다루었다. 3문화층이 되면 서해안지방과 생김새가 같은 뾰족밑의 새김무늬토기가 나온다.

(가) 납작밑토기(1문화층과 2문화층 : 6000∼4500BC 무렵)(<그림 4>)

 오산리의 토기들은 모두 납작밑이며 밑이 좁아 입술지름보다 상당히 줄어드는 것이 전형적이다. 일찍부터 손잡이가 달리거나 목이 있는 토기들이 많이 나온다. 몸체부분의 지름이 가장 큰 독모양의 토기도 많은 편이다. 입술 가까이부터 무늬를 3∼4줄 눌러 찍은 종류가 가장 많으며 무늬없는 민토기도 나와 전체로 무늬가 적다는 점에서는 남해안지방과 비슷하다. 눌러 찍은 무늬에는 평행으로 된 점무늬나 짧은빗금무늬 및 손톱무늬가 가장 많다. 문살무늬나 생선뼈무늬 등 새김무늬(陰刻文)의 비중은 적으며 드물게 덧무늬토기도 나오고 있다.

 오산리 1·2문화층 토기들의 바탕흙은 가는 모래를 섞은 찰흙이 주로 쓰였다. 토기들은 대개 적갈색을 띠며, 토기의 겉면을 덧입힘을 하거나 공들여 문질러서 광택이 나는 것이 많아 끝손질에 신경을 많이 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도 남해안지방의 토기들과 비슷하다.

<그림 4>오산리 1·2문화층의 여러 토기들

 제2문화층의 토기도 납작밑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 약간 달라지는데, 토기 몸체가 줄어들며 바닥이 상대적으로 넓어져 안정감을 주게 되었다. 그리고 목단지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바탕흙에 굵은 모래를 섞은 것이 많으며 무늬를 베푼 것이 적어지고 토기의 색깔은 이전보다 밝아 매우 밝은 황갈색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교동에서는 평균 높이 10㎝ 정도 되는 토기 5개체가 나왔는데 모래가 많지 않은 고운 찰흙으로 빚었으며 모두 납작밑이다. 1개의 민토기와 함께 점렬무늬가 찍힌 토기 3개체, 평행의 빗금무늬가 두 줄 있는 토기들이 나왔다.

(나) 뾰족밑토기(3문화층)

 이 시기의 토기는 서해안의 전형적인 뾰족밑빗살무늬토기와 같다. 그리고 오산리 1·2문화층의 토기들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토기무늬는 입술부분에 평행 밀집된 빗금무늬를, 그리고 몸체부분에는 생선뼈무늬를 베푼 것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때로는 입술에서 몸체에 이르는 부분을 모두 생선뼈무늬로 새긴 것과, 생선뼈무늬 대신 문살무늬나 組帶文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밑부분에까지 무늬를 베푼 것이 나오기도 한다.

 바탕흙을 보면 찰흙질에다 석영·장석·운모 등을 넣은 것이며 적지만 석면을 섞은 것도 있다. 그리고 1·2문화층과는 달리, 덧입힘이나 갈기(磨硏) 등의 끝손질을 공들여 하지 않아 거친 느낌을 주고 있다.

다) 동북지방

 동북지방의 유적으로는 신석기유적이 밀집하여 분포된 두만강 하류 및 동해안지역이 중심이 되는데, 굴포리 서포항 이외에 농포동·송평동·범의구석·검은개봉·원수대·나진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농포동조개더미는 油坂貝塚이라는 이름으로 원수대와 함께 1934년에 조사되어 발표된 바 있고582) 1956년에 다시 한 번 발굴되었다.583) 범의구석에서는 동북지방의 신석기 최말기에 해당되는 층이 있다고 보고되었다.584) 검은개봉과 나진유적은 널리 알려졌으나 발굴되지는 않았다.585) 그러므로 동북지방에서는 역시 잘 알려진 서포항유적586)을 중심으로 서술하게 된다.

 서포항유적의 발굴은 우리 나라의 신석기문화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한 의의가 있다. 즉 궁산-지탑리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 서북지방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가 가장 이르다고 보아 온 그 때까지의 시기구분을 바꾸어 동북지방의 납작밑토기가 시기상 더 앞선다고 여기게 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도 서포항을 중심으로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587) 어떻든 서포항의 시기구분은 남북에서 계속 인용되어 왔다. 서포항의 시기구분은 5기로 나뉘는데, 1기층에서 2기층으로 가면서 찍은무늬에서 새김무늬로 변한다는 점에서는 남해안·오산리 등의 변화양상과 같지만 나머지 2·3·4·5기층에 있어서 무늬를 베푼 부분의 범위와 무늬 종류, 그릇의 생김새 등이 일정한 변화의 경향을 보여주지 않으며 그 변화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도 않다. 이것은 1기층에서 나온 토기의 수량이 완형 2개체로서 워낙 적은 데다가 서포항문화층의 설정이 처음부터 갖고 있는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고 북한고고학이 원래부터 유물의 형식분류와 시기구분에 주력하지 않아서588)일 수도 있겠다. 토기의 무늬가 일정한 모티프로부터 변화, 발전하는 양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대신 북한에서는 각 기별로 독특한 무늬나 제작수법이 등장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5기의 구분 가운데 서포항 3기가 신석기 중기로 여겨지고 있으므로 1·2기는 신석기 전기 그리고 4·5기는 신석기 후기에 해당된다.

(가) 서포항 1·2기의 토기(<그림 5> ①·②와 ③·④)

 1기층에서 나온 완형의 토기 2점을 보면 곧은 입술에 납작밑을 한 바리모양이다. 무늬는 입술 가까이에 4∼5줄의 짧은 빗금을 눌러 찍은 것이다. 바탕흙은 찰흙에 조개가루와 가는 모래를 섞었으며 토기는 갈색을 띈다.

 2기층의 토기도 역시 모두 납작밑이나 입술 바로 밑이 들어가서 짧은 목이 생겨난 그릇이 나타난다. 무늬는 주로 점줄무늬류를 몸체부분에까지 베풀었으며 새김무늬 특히 어골문이 쓰이기 시작한다. 또 가로로 짧은 금을 띄엄띄엄 돌린 것도 있다. 한편 무늬가 없는 민토기도 공반된다. 2기층의 바탕흙에는 모래·운모·조개가루 등이 섞여 있으며, 토기는 흑회색·황갈색·적갈색을 띠는데 이는 구울 때 산화가 불충분했다는 뜻이다.

<그림 5>서포항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나) 서포항 3기의 토기(<그림 5> ⑤∼⑨)

 3기층이 되면 서포항 신석기의 집자리는 모두 네모꼴로 바뀌는 변화를 겪는다. 토기도 여기에 따라 상당한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이를 가장 특징지어주는 것은 새로이 덧무늬와 타래무늬(螺旋文)가 출현하게 되는 점이다.

 남해안지방과 달리 북한지방의 덧무늬는 늦게 출현하여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가 나올 때까지 쓰이는 특징이 있는데, 동북지방에서는 서포항 3기에 처음 나오고 있다. 여기서는 덧무늬를 입술 가까이 한 줄 돌린 것이 나온다. 한편 타래무늬도 이 때에 출현한다. 타래무늬란 두 줄의 선을 서로 꼬여 들어가게 한 사이에 선이나 점줄로 채운 것이다. 이는 함북지방에서도 드물지만 원래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무늬양식 가운데 곡선 모티프가 드문 편이어서 주목된다.

 그런데 북한의 신석기 시기구분이 서포항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는 동안 동북지방과 궁산·지탑리·암사동 등 서해안지방과의 양 지역간에 뚜렷한 관련성을 찾기 어려운 애로점이 있었다. 이 때 서포항 3기의 타래무늬가 곡선무늬인데 주목한다면 서해안지방의 곡선무늬인 점물결무늬(波狀點線文)와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타래무늬와 점물결무늬의 해당시기가 모두 신석기 중기 무렵으로 이미 편년되고 있는 데서도 양자의 대비는 가능하다.

(다) 서포항 4기의 토기(<그림 5> ⑩∼(16))

 토기는 납작한 사발류가 많으며 들린 굽이 출현한다. 이전 시기에도 계속 나오던 무늬없는 민토기가 무늬토기의 양보다 많아진다. 4기 토기의 특징이라면 번개무늬가 출현한다는 점이다. 번개무늬는 우리 나라의 서북 및 동북지방의 신석기유적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연해주지방의 글랏까야유적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589) 시기상으로는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를 의미한다. 이 번개무늬는 3기층의 타래무늬가 직선화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풀이되고 있다. 붉은 칠을 한 토기에 번개무늬가 베풀어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 밖에 토기의 생김새나 무늬가 베풀어진 위치 등은 3기층의 것과 거의 같다. 이 때부터 흙으로 만든 가락바퀴(紡錘車)도 나온다.

(라) 서포항 5기의 토기(<그림 5>(17)·(18))

 5기가 되면 무늬없는 토기들이 많이 만들어지며 무늬로는 생선뼈무늬·번개무늬 등이 간혹 쓰인다. 5기 토기의 특징은 무늬의 변화에서보다는 끝손질(表面處理)에서 찾아진다. 이 시기가 되면 대부분의 토기는 겉면을 매끄럽게 갈아 윤이 나고 갈색을 띠며 바탕흙에는 단일하게 모래만 섞었다. 다음 시기인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면 민토기들과 갈색간그릇만 만들어지며 이러한 데서 신석기-청동기의 자연스러운 이행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590) 토기의 이러한 변화를 층위상으로 잘 보여주는 곳이 범의구석이나 회령 오동이다. 범의구석 1기층이 신석기 최말기에 해당한다. 突帶文과 구멍무늬토기도 이 무렵부터 나오게 된다.

라) 중서부지방

 여기서 말하는 중서부지방이란 대동강유역으로부터 한강유역에 이르는, 신석기유적이 밀집된 평남·황해·경기지방 및 서해 도서지방을 가리킨다. 이 곳에서는 모두 뾰족밑의 달걀 반쪽 모양에 빗살무늬를 베푼 토기들이 출토되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160여 신석기유적 가운데 80여 곳 정도가 서해안지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발굴된 유적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대동강유역에서 보자면 평양 부근의 금탄리591)와 남경,592) 용강 궁산리,593) 봉산 지탑리,594) 해주 용당포595)유적 등에 대한 발굴보고서가 나와 있으며, 한강유역 가운데 한강 본류에서는 암사동596)과 미사리(하남시 미사동),597) 일산,598) 시흥 초지리 별망,599) 오이도600) 및 시도601) 등이 있다. 북한강유역의 교동유적은 앞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남한강유역의 신석기유적으로는 금굴과 단양 상시,602) 그리고 황석리603)의 세 유적이 있다.

 중서부지방의 빗살무늬토기들은 끊임없이 주목을 받아 왔고, 그 동안의 신석기연구는 거의 토기연구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므로 빗살무늬토기에 대한 연구의 전통과 업적은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토기무늬 및 생김새의 형식변천과 이를 이용한 시기구분은 우리 나라의 신석기 시기구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서해안지방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는 입술·몸체·밑의 세 부위로 나뉘며, 각 부위별로 따로이 무늬가 베풀어지다가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늬 베푸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에서부터 무늬가 생략되어 올라온다는 것과, 무늬의 균정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그 규율이 흐트러져 간다는 관점에 입각하고 있다.604) 최근에는 각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값과 비교하여 이러한 형식 설정이 대부분 타당함을 밝히고 있다.605)

 위 논의에서 지적받는 점은 AⅡ식(입술과 몸체의 무늬가 다르며 밑부분의 무늬가 없는 것)과 BⅡ식(입술과 몸체의 무늬가 같고 밑부분의 무늬가 없는 것) 등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자료가 미흡하며, 이른 시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BⅠ식(입술부터 밑부분까지 동일한 무늬가 베풀어진 것)이 후기 늦은 시기에서도 자주 출토되어 연대가 명확치 않고, 무늬 베푸는 부위만 강조되고 무늬 자체에 대한 검토가 부족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BⅠ의 연대가 명확치 않다는 것은 북한측 자료에 비추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금탄리나 남경유적에서는 이른바 BⅠ식토기가 신석기 최말기에 넣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층위에 따른 출토양상을 우선하여 형식론과 대비해 나가야 할 것이나, 층서관계를 매우 강조하는 북한의 경우 형식론이 발달하지 않았고, 한강유역 대부분의 유적에서는 토기가 완형으로 나오는 경우가 드물거나 여러 형식이 섞여서 나와 층위적인 검토가 어려운 형편에 있다. 그러므로 이는 앞으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부분이다.

(가) 신석기 전기의 빗살무늬토기(<그림 6> ①∼③)

 토기는 모두 뾰족밑이며 입술부분에 평행밀집의 빗금무늬·점줄무늬·손톱무늬 등이, 몸체에 생선뼈무늬 또는 그 변형이라 여겨지는 빗금무늬 및 문살무늬, 밑에는 방사선식 빗금무늬 또는 조대문 등이 베풀어지는 것이 정형적인 생김새이다. 입술과 몸체 사이에 이른바 종속구연문이라고 하는 점물결무늬·무지개무늬(重弧文)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 주로 쓰이는 무늬에서 한강유역과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약간의 지역 차이를 나타내는데 대동강유역의 토기는 입술 쪽에 주로 누르거나 찍은 종류의 점줄무늬, 몸체에 세로방향의 생선뼈무늬 등이 주로 베풀어지지만 한강유역의 토기들은 입술 쪽에 새긴 빗금무늬, 몸체에는 세로와 가로방향의 생선뼈무늬가 주로 나타난다. 새김무늬보다 찍은무늬를 이른 것으로 보는 우리 나라의 시기구분에서 볼 때 역시 대동강유역의 토기가 먼저이며 이것이 한강유역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서부지방 토기의 큰 특징은 바탕흙과 끝손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해안·강원도지방의 토기들이 끝손질이 발달하여 덧입힘이나 붉은칠토기 등이 많이 나타나나 이 곳에서는 그러한 토기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신에 바탕흙에 운모 섞인 모래를 많이 넣어606)「전형적인 모래질」로 표현되며, 석면과 활석을 섞어 써서 겉면이 반짝거리거나 매끄러운 토기들이 많이 출토된다.

<그림 6>중서부지방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나) 신석기 중기의 토기(<그림 6> ④∼⑦)

 중서부지방의 중기 무렵 토기의 특징으로는 입술 바로 아래의 점물결무늬가 발전하여 허리 전체에 베풀어지거나, 입술부분에 이전의 무늬를 대신하여 문살무늬, 삿자리무늬 등이 베풀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라면 무늬 베푸는 면적이 줄어들어 밑부분의 무늬가 없어지는 현상과, 또 입술과 몸체부분이 전부 어골문으로 채워진 토기가 나오게 되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무늬가 정형성을 잃고 성의없이 베풀어진 듯한 것이 많다. 토기의 생김새를 보면 입술부분이 오므라든 항아리나 대야밑처럼 완만한 납작밑도 나오고 있다. 그릇모양과 토기무늬를 베푸는 방법에서 모두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이다.

(다) 신석기 후기의 토기(<그림 6> ⑧∼⑪)

 중서부지방 후기의 토기는 위에서 언급한 유적들 이외에 서해안지방(군량리·몽금포 등)과 서해 도서지방(시도·소야도·덕적도 등) 거의 전역에서 발견된다. 신석기 후기가 되자 사람들이 여러 곳에 퍼져 나가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때에는 무늬를 베푸는 면적이 크게 줄어들어 주로 입술부분에만 새겨지며 그것도 매우 퇴화된 양식으로 되어 무늬가 거칠고 엉성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생선뼈무늬가 산만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선이 교차되어 문살무늬처럼 보이는 경우도 생겨나며, 한두 줄의 빗금무늬가 나타나는 경우에도 결국은 생선뼈무늬가 해체되는 가운데 이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중서부지방의 후기양식으로 여겨지는 무늬 가운데 금탄리 상층이나 남경에서 보듯이 그릇 전체를 가로방향의 생선뼈무늬·줄띠무늬 등으로 채운 것이 있다. 북한에서 이들은 금탄리 2기, 궁산문화 4기로서 대동강유역에서는 가장 늦은 시기로 편년되는 것이나 앞서 말했듯이 한강유역의 시기구분에서는 BⅠ식에 해당하여 이르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같은 토기모양을 지닌 한강유역과 대동강유역에 있어서 토기무늬에 따른 해당 시기가 이렇게 달리 편년되는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금탄리나 남경 등 궁산문화에서 보자면 후기에 덧무늬도 출현하며607) 무늬가 전혀 베풀어지지 않은 민토기도 나오고 있다. 밑부분이 들린 굽이 만들어진다.

 토기의 바탕흙을 본다면 서해 도서지방에서는 지금까지의 「전형적인 모래질」과는 달리 찰흙질의 토기들이 만들어진다. 한편 대동강유역에서는 석면·활석 등 여러 종류의 토기 비짐이 점차 모래 한 가지로 단일화되어 간다고 지적되고 있다.608) 그릇의 민무늬화 경향으로 보거나 비짐의 단일화 경향으로 보거나 다음 시기인 민무늬토기로의 점진적인 변이를 보여주는 시기라고 설명되고 있다.

마) 청천강 이북지방(<그림 7> 참조)

 여기서 의미하는 이북지방이란 평안북도·자강도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의주 미송리,609) 용천 신암리610)·용연리,611) 중강 장성리612)·토성리613) 등의 유적을 말한다. 거의 최근까지 이 지역이 신석기시대의 독자적인 문화권을 가질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위에서 보듯이 유적의 수도 얼마 되지 않으며, 유적의 규모나 유물의 양에서 뚜렷한 신석기문화의 양상을 보여줄 만한 유적이 거의 없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신암리의 경우 드물게 4차례나 발굴되었지만 발굴의 목적과 성과가 신석기-청동기의 계승성의 확인과 청동유물에 있었던 만큼614) 신석기연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청천강 이북의 신석기문화는 서포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지방과 유사하다고 늘 주장되어 왔다. 미송리동굴유적에 대한 발굴보고를 낸 이후 그같은 주장이 되풀이되었으나 사실 근거는 없었다. 미송리동굴은 신석기·청동기에 대한 두 문화층이 있는데, 이들이 재퇴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며 따라서 아래층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확실히 신석기유물로 볼 수 있는 것은 빗살무늬토기이다. 이들 토기도 작은 조각으로 몇 점 되지 않으며 우리 나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로서 이들이 동북지방과의 친연성을 뚜렷이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하여간 미송리는 서포항유적과 가까우며 신석기 후기(기원전 3000년기∼2000년기 초)에 해당한다고 주장되어 왔다.615)

<그림 7>미송리유적의 토기 및 중국 동북지방의 토기
①∼③ 미송리유적 출토, ④∼⑨ 후와유적 출토, ⑩∼⑫·⑭ 소주산유적 출토, ⑬ 상마석유적 출토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북한에서는 미송리유적을 기원전 6000년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보고,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미송리-소주산」유형을 설정하였다.616) 이리하여 종래 미송리를 비롯한 청천강 이북의 문화갖춤새가 서포항 중심의 동북지방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던 논의에서 결별하였다.

 미송리-소주산유형이 생겨나고, 그리하여 청천강 이북의 독자적인 문화권이 설정된 직접적인 이유는 미송리에서 나온 꼬불무늬(「之」자무늬 : 북한에서는 최근에 이를 「짧은이음 구불무늬」라고 부른다. <그림 7> ②·⑨·⑪·⑭)토기에 있다고 보인다. 최근에 중국 동북지방의 발굴보고 성과와 이와 관련된 방사성탄소연대의 소급으로, 요하 이동지방을 중심으로 丹東시 後窪유적,617) 小珠山 1기층,618) 上馬石 1기층,619) 新樂유적620) 등에서 꼬불무늬가 대량으로 출토되며 신락유적의 연대가 기원전 6000년을 넘어서자 북한에서는 이를 참고하여 신석기의 시대구분을 전면으로 재편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미송리에서 나온 자료가 질·양면에서 너무 부족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곤란하며 북한의 새로운 시기구분도 아직 논의중에 있어 학자들의 견해가 정립되지 않았으므로621) 앞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미송리를 제외하면 신암리·용연리·토성리·쌍학리 등 이 지역의 유적들은 대부분 신석기 후기-말기에 해당되며 자주 출토되는 번개무늬가 그 시기를 확정지어 준다고 여겨지고 있다. 신암리 1기층을 예로 들면 여기에는 바리·단지·굽접시 등 다양하나 특히 긴 목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종류가 특징적이다. 토기무늬로는 번개무늬·참대순무늬·덧무늬·단추무늬 등과 독특한 새김무늬(이른바 刻線文)가 많고, 간그릇 및 요동반도 일대에서 나오는 것들과 동일하게 구운 후에 채색을 한 토기들이 나오고 있다. 이들의 바탕흙은 대개 진흙에 보드라운 운모나 모래를 섞었다고 한다. 용연리에서도 번개무늬와 덧무늬가 들어 있는 신암리형의 항아리가 주류이지만 민토기가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다.

557)이 분류는 기존의 신석기문화권 분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한편 최근에는 이 지역 외에 강의 중·상류나 내륙 깊숙한 곳에서도 신석기유적들이 발견되는 예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들은 대개 각 유적이 자리잡고 있는 강 하류의 잘 알려진 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닮은 양상을 띠고 있다(예를 들면 합천 봉계리·거창 임불리유적출토 토기는 낙동강 하류 김해-부산지역의 신석기토기들과 비슷하다). 그러나 앞으로 이들 강의 중상류나 내륙 등지의 자료가 축적되어 간다면 이들은 오히려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강가·바닷가 유적들과는 다소 다른 생활상을 가졌다거나, 고유의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는 쪽으로 연구가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

孫寶基,<丹陽 島潭里地區 遺蹟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 1984), 15∼99쪽.

홍현선,<상시 3바위그늘의 문화연구>(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7).

이융조·신숙정,<중원지방의 빗살무늬토기 고찰>(≪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1988), 341∼387쪽.

忠南大博物館,≪屯山≫(1995).

申鍾煥,≪淸原 雙淸里住居址≫(國立淸州博物館, 1983).

趙由典,<南江流域의 先史文化硏究(1)-山淸 江樓里 先史遺蹟의 性格>(≪韓國考古學報≫ 20, 1987), 23∼58쪽.

安春培,<居昌 壬佛里先史住居址 調査槪報>(≪嶺南考古學≫ 6, 1989), 73∼125쪽.

申鍾煥,<金陵 松竹里遺蹟>(≪嶺南考古學≫ 7, 1989), 71∼105쪽.

東亞大博物館,≪陜川 鳳溪里遺蹟≫(1989).
558)Sample, L. L., 앞의 글.
559)釜山大博物館,≪金谷洞 栗里貝塚≫(1980).
560)釜山直轄市立博物館,≪凡方貝塚≫1(1993).
561)釜山水産大博物館,≪北亭貝塚≫(1993).
562)釜山大博物館,≪金海 水佳里貝塚≫1(1981).
563)國立中央博物館,≪新岩里≫Ⅰ·Ⅱ(1988·1989).
564)國立晉州博物館,≪欲知島≫(1989).
565)國立晉州博物館,≪煙臺島≫Ⅰ(1993).
566)손보기,≪상노대도의 선사시대 살림≫(1982).

東亞大博物館,≪上老大島≫(1984).

釜山水産大博物館,≪山登貝塚≫(1989).
567)단국대 중앙박물관,≪사천 구평리유적≫(1993).
568)國立光州博物館,≪突山 松島≫Ⅰ·Ⅱ(1989·1990).
569)金龍基,≪農所里貝塚 發掘調査報告書≫(釜山大 博物館, 1965).
570)金龍基,<多大浦貝塚 發掘調査報告>(≪釜大史學≫ 2, 1971).
571)이 곳은 과거 1968년의 지표조사 때에 남해안 만기 신석기의 소흑산도에서 겹입술토기가 찾아져서 신석기 후기유적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의 조사결과 신석기 이른 시기의 덧무늬토기도 찾아져 남해안 신석기의 전기간 동안 점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金元龍·任孝宰,≪南海島嶼 考古學≫(1968).

崔盛洛,<黑山島地域의 先史遺蹟>(≪島嶼文化≫ 6, 木浦大, 1988), 43∼69쪽.
572)신숙정,<상노대도 조개더미유적의 토기연구>(≪白山學報≫ 28, 1984). 211∼271쪽.
573)Sample, L. L., 앞의 글.
574)L. L., Sample, 위의 글.
575)Sample, L. L., 앞의 글.
576)신숙정, 앞의 글, 233∼246쪽.
577)金元龍,<春川 校洞穴居遺蹟과 遺物>(≪歷史學報≫ 20, 1963), 1∼27쪽.
578)서울大博物館,≪鰲山里遺蹟≫Ⅰ·Ⅱ·Ⅲ(1984·1985·1988).
579)함북지방의 서포항유적과 강원도 오산리유적 사이에는 함남 신포시 강상유적이 있다. 강상유적은 북한에서 1950년대 말부터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1975∼76년에 발굴되었으며 최근에 일부가 보고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납작밑과 함께 수박밑처럼 완만한 둥근밑의 토기가 출토되어 흥미롭다. 또 최근 강릉 지경리지방에서는 강상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한 토기가 발굴되어 동해안을 끼고 이루어지는 문화교류의 한 유형을 보여주고 있다.

변사성·안영준,<강상리유적의 질그릇갖춤새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 1986-2), 16∼23쪽 참조.
580)최몽룡·이헌종,<러시아 고고학 : 연구현황과 과제-시베리아와 극동지역>(≪러시아의 고고학≫, 學硏文化社, 1994), 42∼43쪽.
581)안승모,<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한강유역사≫, 민음사, 1993), 59쪽 참조.

그러나 여기에 대해 회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동과 좀 떨어진 무덤유적으로 경북 울진 후포리가 있는데 여기서는 교동과 비슷하게 대롱구슬과 간도끼류가 다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이 유적의 나이는 토기가 출토되지 않아 확정하지는 못했으나 유구의 구조와 위의 껴묻거리로 보아 대략 신석기시대 후기쯤으로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교동유적의 해당연대에 대한 의문이 다시 제기될 수 있다. 교동유적에는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582)橫山將三郞,<油坂貝塚について>(≪小田先生頌壽紀念 朝鮮論集≫, 1934).
583)고고학연구실,<청진 농포리 원시유적발굴>(≪문화유산≫, 1957-4), 45∼50쪽.
584)황기덕,<무산 범의구석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 6, 1975).
585)황기덕,<조선 서북지방 원시토기의 연구>(≪문화유산≫, 1958-4), 68∼83쪽.

―――,<두만강유역의 신석기시대 문화>(≪문화유산≫, 1962-1), 1∼32쪽.
586)김용간·서국태,<서포항 원시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론문집≫ 4, 1972).
587)서포항유적에서는 집자리들이 겹놓여서 드러났는데, 이러한 층위상의 중첩을 별개의 문화층으로 편년했다는 비판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 북한에서의 시기구분은 1990년대에 가서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으나 서포항을 중심으로 하는 종래의 관점이 바뀐 것은 아니다.
588)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신숙정,<북한 고고학계의 신석기문화 연구동향>(≪박물관기요≫ 6, 1990), 49∼76쪽.

―――,<북한의 신석기문화 연구 40년>(≪북한의 고대사-연구와 성과≫, 1994), 45∼79쪽.
589)Chard, Chester, Northeast Asia in Prehistory, The Univ. of Wisconsin Press, 1974, pp. 93∼96.
590)황기덕, 앞의 글(1975), 124∼226쪽.
591)김용간,≪금탄리 원시유적 발굴보고≫(1964).
592)김용간·석광준,≪남경유적에 관한 연구≫(1984).
593)도유호·황기덕,≪궁산 원시유적 발굴보고≫(1957).
594)도유호·황기덕,≪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1961).
595)김용남,<해주시 룡당리 룡당포 조개무지유적 조사보고>(≪고고민속≫1963-1), 49∼54쪽.
596)서울大博物館,≪岩寺洞≫(1985).

國立中央博物館,≪岩寺洞≫(1995).
597)任孝宰,<渼沙里遺蹟 緊急發掘調査>(≪韓國考古學年報≫ 8, 1981).

尹世英,<渼沙里住居址>(≪史叢≫ 25, 1981).

渼沙里先史遺蹟發掘調査團·京畿道,≪渼沙里≫ Ⅰ∼Ⅴ(1994).
598)한국선사문화연구소·경기도,≪자연과 옛사람의 삶≫(일산새도시개발지역 학술조사보고, 1992).
599)金元龍,<草芝里(別望)貝塚 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 7, 1979), 1∼47쪽.
600)서울大博物館,≪烏耳島貝塚≫(1988).
601)國立中央博物館,≪矢島貝塚≫(1970).
602)孫寶基, 앞의 글.

홍현선, 앞의 글.
603)李隆助·申叔靜·禹鐘允,<堤原 黃石里 B地區遺蹟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發掘調査綜合報告書≫, 1984), 391∼464쪽.
604)任孝宰,<土器의 時代的 變遷過程>(≪韓國史論≫ 12, 1983), 615∼654쪽.
605)任孝宰,<編年>(≪韓國史論≫ 12, 1983), 707∼736쪽.
606)지금까지 암사동·미사리 빗살무늬토기의 운모는 일부러 넣은 「비짐」이 아니라 바탕흙에 원래 섞여 있던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글쓴이들의 여러 번에 걸친 실험·분석의 결과 이 운모는 비짐으로 집어 넣은 모래에 부수된 것으로 밝혀졌다.

崔夢龍·李東瑛·申叔靜,<渼沙里遺蹟의 地質과 出土土器의 分析>(≪渼沙里≫ 1, 1994), 613∼672쪽.
607)북한지방에서는 신석기 중기 무렵으로 잡는 서포항 3기층에서 덧무늬토기가 약간 나오며, 위의 금탄리유적의 덧무늬토기는 신석기 후기로 편년되어 있다. 최근에 발굴된 남경유적의 덧무늬토기도 역시 양은 많지 않으며 신석기 가장 늦은 시기로 편년된다. 그리고 심귀리·공귀리 등 청동기시대의 이른 무렵에 덧무늬토기가 약간 나오고 있다. 따라서 북한지방의 시기구분에 의하면 덧무늬토기는 신석기 중기 이후부터 청동기 이른 시기까지 존속했던 토기로 볼 수 있겠다.
608)변사성,<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질그릇재료의 변천>(≪조선고고연구≫ 1988-3), 7∼10쪽.
609)김용간,<미송리 동굴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 3, 1963).
610)김용간·리순진,<1965년도 신암리유적 발굴보고>(≪고고민속≫ 1966-3), 20∼31쪽.
611)강중광,<룡연리유적 발굴보고>(≪고고학자료집≫ 4, 1974).
612)김종혁,<중강군 장성리유적 조사보고>(≪문화유산≫ 1961-6), 44∼51쪽.
613)리병선,<중강군 토성리 원시 및 고대유적 발굴중간보고>(≪문화유산≫1961-5), 46∼63쪽.
614)신숙정, 앞의 글(1994), 57∼59쪽.
615)이같은 주장은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서국태,≪조선의 신석기시대≫(1986), 19쪽 참조.
616)서국태,<질그릇을 통하여 본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문화유형>(≪조선고고연구≫ 1990-3), 2∼6쪽.
617)許玉林·傅仁義·王傳普,<遼寧東溝縣後窪遺址發掘槪要>(≪文物≫ 1989-1), 1∼22쪽.
618)遼寧省博物館·旅順博物館·長海縣文化館,<長海縣廣鹿島大長山島貝丘遺址>(≪考古學報≫ 1981-1), 63∼109쪽.
619)旅順博物館,<旅大市長海縣新石器時代貝丘遺址調査>(≪考古≫ 1962-7), 349∼350쪽.
620)沈陽市文物官吏辨公室,<沈陽新樂遺址發掘報告>(≪考古學報≫ 1978-4).
621)북한은 전통적으로 통일된 견해가 제시되는 곳이지만 불과 1년 사이를 두고 간행된≪조선고고학전서≫ Ⅰ과≪조선전사≫(1991)의 신석기시대 시기구분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숙정,<신석기시대와 문화>(≪북한선사문화연구≫, 백산자료원), 148∼157쪽 참조.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의 신석기유적들을 한국의 신석기문화권내에 편입시키는 문제에 대한 논의는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