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Ⅰ. 청동기문화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1. 청동기시대
          • 1)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청동기시대의 개념
            • (2) 청동기시대의 시기구분
          • 2) 인골 및 편년
          • 3) 청동유물의 분포와 사회
            • (1) 각 청동유물의 형식과 그 분포
            • (2) 청동유물의 지역적 특성
            • (3)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 2.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 1) 청동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 (3) 영동·영서지방의 유적
            • (4) 영남지방의 유적
          • 2) 청동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무덤
          • 3) 청동기시대의 유물
            • (1) 토기
            • (2) 석기
            • (3) 청동기
            • (4) 뼈연모
          • 4) 야금술의 발달과 청동유물의 특징
            • (1) 청동기의 제작 기술
            • (2) 청동유물의 성분분석
          • 5) 토기의 과학적 분석
        • 3. 청동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4. 주변지역 청동기문화의 비교
          • 1)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 2) 중국
            • (1) 청동거울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2) 청동유물의 동물문양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청동기의 성분분석을 통해 본 중국과의 관계
          • 3) 일본
            • (1) 일본 청동기문화의 성격
            • (2) 한·일 청동기문화의 교류관계
      • Ⅱ. 철기문화
        • 1. 철기시대
          • 1)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1) 철기시대의 개념
            • (2) 철기시대의 시기구분
            • (3) 문헌자료와 철기시대
          • 2) 철기시대 유적의 분포
            • (1) 유적 분포의 특성
            • (2) 주요 철기유적
          • 3) 철기시대의 유적
            • (1) 집터
            • (2) 패총
            • (3) 무덤
            • (4) 방어시설
          • 4) 철기시대의 유물
            • (1) 철기 생산기술
            • (2) 철기유물
            • (3) 토기
            • (4) 토기의 과학적 분석
            • (5) 유리공예
        • 2. 철기시대의 사회와 경제
          • 1) 생업경제
            • (1) 생업
            • (2) 교역
          • 2) 사회
            • (1) 사회구성
            • (2) 의식과 신앙·예술
            • (3) 의식주생활
        • 3. 주변지역 철기문화와의 비교
          • 1) 중국
            • (1) 여명기(은·서주시대)
            • (2) 초보적 형성기(춘추∼전국 조기)
            • (3) 형성·보급기(전국 중∼만기)
            • (4) 발전기(전한 이후)
          • 2) 일본
            • (1) 초기 철기문화의 시기별 추이
            • (2) 한·일 초기 철기문화의 교류관계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호남·호서지방의 유적
가. 요령식동검 유적

① 부여 송국리유적0119)(충남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1974년 마을 사람의 신고로 공주사대 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된 이 유적은 석관묘 유적으로 지표면에는 아무런 표지가 없이 작은 소나무가 덮인 언덕의 남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주변은 낮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구릉 사이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있어 농사에 좋은 곳이다.

 유물이 발견된 유구는 석비레층을 파고 만들었다. 지표 아래 20㎝되는 곳에 260㎝×120㎝ 크기의 장타원형 뚜껑돌이 관 전체를 덮고 있었는데 정북에서 동으로 35°기울어진 北枕이었다. 석관의 크기는 남북 205㎝, 동서 최대 폭 100㎝이며 바닥에 3장의 판석을 깔았고 네 벽은 높이 80∼90㎝의 판석을 몇 장씩 세워 조립하였다(<그림 1-①>).

<그림 1-①>부여 송국리유적 석관묘

 피장자의 왼쪽 팔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遼寧式銅劍 1점(길이 33.4㎝)·靑銅鑿(끌) 1점(길이 6.2㎝)·一段柄式 磨製石劍 1점(길이 34.1㎝)·磨製石鏃 11점(길이 19.8∼10.3㎝)·管玉 17점(길이 4.7∼3.0㎝)·飾玉 2점 등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는데 동검은 봉부가 발쪽을 향하고 있었고 동검 위에 관옥과 석촉들이 놓여 있었다. 주인공의 허리부분에서 봉부가 발치를 향한 마제석검이 놓여 있었고 석검보다 약간 위에서 동착이 발견되었다(<그림 1-②>).

<그림 1-②>부여 송국리유적 출토유물

② 고흥 운대리유적0120)(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1926년 주민이 집을 짓기 위하여 터를 고르던 중 유구가 발견되었다. 지하에 놓여 있는 커다란 돌을 들어내자 석관 구조가 나왔고 여기에서 마디가 일단인 석검 1점이 묻혀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4기의 고인돌을 조사하게 되었는데 원래는 주변에 32기의 고인돌들이 흩어져 있었다.

 운대리유적의 유구는 모두 개석의 아래에 매장부가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었으며 커다란 개석 아래에 네 벽을 할석으로 쌓았다. 별다른 유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고인돌떼의 서쪽 끝부분에서 지하유구의 일부가 노출되어 조사한 결과 동검 1점(현재길이 14.0㎝)이 나왔다. 그런데 이 동검은 요령식동검으로 하반부 파편으로 날부분이 깨져나가 형태를 알 수 없었으나 원래부터 부러진 동검을 부장한 듯하며 정확한 유구에서 동검이 나온 최초의 예가 된다(<그림 2>). 유구는 길이 185㎝, 폭 130㎝, 깊이 40㎝ 정도의 석곽으로 네벽을 할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은 판석을 깔았다. 이 석곽의 바닥 중간에서 동검편이 나왔다. 조사 당시에는 지상에 아무런 표시가 없었으나 주변 상황으로 보아 남방식 고인돌이 개석을 잃어버린 하부구조로 보인다.

<그림 2>운대리유적출토동검

③ 여천 적량동 상적유적0121)(전남 여천시 적량동 전 392번지)

 1989년 3월 호남정유공장 확장공사 중 부지 안에 있는 고인돌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장 확장으로 지형이 바뀌어 지금은 공장부지의 최남단에 해당한다. 자연 지형은 영취산(표고 510m)에서 광양만쪽으로 흘러내린 여러 갈래의 산줄기 사이에 형성된 계곡 평지중의 하나이다. 남북으로 내려온 얕은 산기슭 끝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는 30여 기의 고인돌이 있었던 듯하나 개석이 이동되고 훼손이 심한 상태였다.

 7호 고인돌:괴석형의 상석 아래에 6개의 지석이 있었는데 원래는 10여 개가 있었던 듯하다. 그 아래에서 적석이 깔려 있고 가운데 할석을 이용해서 만든 석실이 나왔다. 석실 중앙에서 서쪽에 치우친 바닥에서 목제의 칼집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요령식동검 1점(길이 33.6㎝)이 출토되었다(<그림 3>).

<그림 3>여천 적량동 상적 7호 고인돌과 출토동검

 2호 석곽형 석실:상부의 상당부분이 깎여나가 원상을 알 수 없다. 표토 아래에서 적석시설이 노출되었는데 이 가운데에서 할석의 평면을 이용하여 만든 석곽형 매장부 윤곽이 나왔다. 내부에서 요령식동검 1점(추정길이 35.0㎝)·동모 1점(복원길이 28.0㎝), 관옥 5점(길이 0.76∼0.95㎝)이 나왔고 주변의 적석 사이에서 有溝石斧 1점, 숫돌 2점과 약 200여 편의 민무늬토기편들이 나왔다.

 4호 석곽형 석실:표토를 제거하자 바로 석곽 구조가 나왔다. 바닥에는 먼저 판석과 잔자갈을 이용하여 깔고 그 위에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는데 벽의 일부는 잔자갈을 이용하여 쌓았다. 내부에서 원래의 길이가 35㎝ 정도되는 긴 요령식동검 편 1점과 민무늬토기·홍도 등의 토기편들이 나왔다.

 9호 석곽형 석실:표토 제거작업 중 적석이 노출되어 조사하였다. 비교적 큰 할석을 써서 장축이 남북인 곽을 만들고 할석 사이를 자갈돌로 채웠다. 주변의 상황으로 보아 지석이 있었고 그 위에 상석이 있는 고인돌로 추정된다. 내부에서 동검 파편 1점(현재길이 10.0㎝)이 나왔고 주변 적석층에서 민무늬토기 바닥과 홍도의 胴體部 1점, 그리고 적석 외곽에서 숫돌(길이 4.5㎝)과 石鑿 1점(길이 5.0㎝)이 나왔다.

 13호 석곽형 석실:교란과 파괴가 심하며 지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보이지않는데 만약 상석이 있었다면 지석이 없이 적석 위에 상석이 놓여 있었을 듯하다. 장축이 북동-남서이고 자연석과 할석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으며 자연석을 바닥 전면에 깔았는데 바닥 돌틈을 진흙으로 메웠다. 12호 유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동검 1점을 발견하였다.

 발견된 동검은 돌기부 바로 아래부분만 남아 있어 전체 형태를 알 수 없으나 꼬다리나 하반부의 확장상태로 보아 요령식동검으로 보인다(현재 길이 18.0㎝).

 21호 석곽형 석실:단면에서 석실을 확인하여 조사되었다. 지석으로 쓰였던 괴석들이 보이지 않고 뚜껑돌로 쓰였음직한 판석만 5개 보인다. 석실은

 할석으로 쌓은 석곽형이며 장축은 동서방향이고 바닥에는 자갈을 깔아 놓았다. 내부에서 요령식동검 1점, 셰일 계통의 석재편이 몇 점 나왔다. 동검은 돌기부와 봉부가 없어졌는데 일부가 부러지고 심하게 굽어 있다. 짧은 꼬다리 한쪽에 홈이 나 있고 돌기부에 해당하는 등대 단면은 타원형에 가까운 6각형으로 양면이 돌출되어 있으나 그 이하는 타원형이다. 꼬다리에는 자루에 끼워 결박하였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고 밑바닥을 수습 처리한 결과 목질의 흔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나무자루를 쓴 것 같다. 하반부가 둥글게 기부에 이행하고 있다(현재 길이 25.8㎝).

 22호 위석형 석실:표토작업 중 돌들이 원형으로 돌려져 있었는데 표토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동검 1점이 발견되었다. 결실이 심하여 원형을 알 수 없으나 꼬다리 한쪽에 홈이 파여져 있으므로 요령식동검의 파편인 것을 알 수 있다. 등대의 단면이 타원형이고 갈린 흔적이 없다(현재 길이 7.8㎝). 상석이나 지석이 없어 석실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하부에는 자연석 10여 개가 둥글게 놓여 있을 뿐 바닥에도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④ 여천 평려동유적0122)(전남 여천시 평려동 산본마을 137·158·197번지)

 제일모직 여천공장 확장공사에 따라 198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36기의 고인돌이 발굴되었다. 영취산 아래 계곡의 골짜기에 형성된 퇴적층에 3군의 고인돌이 있었다. 동검은 나군 2호 고인돌에서 나왔다. 상석 아래 지석이나 뚜껑돌이 없이 할석으로 축조한 석실만 드러났는데 대부분이 유실되어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장축을 동서방향으로 두고 할석으로 곽을 축조하였다. 발굴된 동검 1점은 부식상태가 심하여 등대와 날 일부만 남았는데 등대 단면이 타원형일 뿐 아무런 특색이 없으나 전남지방의 고인돌에서 나오는 요령식동검의 파편으로 추정된다(현재 길이 14.5㎝). 주변에서 민무늬토기가 몇편 수습되었다.

⑤ 여천 오림동유적0123)(전남 여수시 오림동 오림정이 마을 묘 77·103, 전 135-2번지)

 1989년 진남체육공원 조성을 위한 지표조사 중 여러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즉 77번지에 5기, 103번지에 5기, 135-2번지에서 1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지금은 체육공원내에 포함되어 있다. 8호 고인돌과 5호 석곽에서 동검편들이 나왔다.

 8호 고인돌:塊石形의 상석 아래 주변에 6개의 지석이 있고 그 주위에 적석시설이 있었다. 장축이 동서방향인 석곽을 판석과 할석으로 쌓고 그 위에 4개의 판석으로 뚜껑을 덮었다. 바닥에는 판석을 깔고 사이를 잔자갈로 채웠다. 여기에서 요령식동검의 파편으로 동질이 나쁜 동검편 1점(현재 길이 6.7㎝)과 석촉 2점(길이 9.2㎝)이 출토되었다. 석촉은 몸의 단면이 마름모꼴이고 꼬다리의 단면이 6각형인 버들잎모양의 편암제였다(<그림 4>).

<그림 4>여천 오림동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5호 석곽:원상이 크게 파괴되어 지석이나 상석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뚜껑돌로 추정되는 판석이 주위에서 발견된다. 적석 일부가 주변에 남아 있고 동벽과 남벽 일부만 남아 있는데 장대석을 이용하여 구축한 석곽형이다. 내부에는 잔자갈이 섞인 부식토로 채웠는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여기에서 동검편 3점과 벽옥제로 양쪽에서 구멍을 뚫은 관옥 2점(길이 0.5㎝, 1.6㎝)이 바닥에서 나왔다. 동검편의 꼬다리 부분은 한쪽에 홈이 나 있고 유기물질로 묶은 흔적이 보이고 있어 나무자루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검신은 등대의 단면이 6각형이고 날부분이 조금 붙어 있으나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⑥ 여천 봉계동유적0124)(전남 여천시 봉계동 전 164·528번지)

 대곡마을과 월앙마을의 경지정리 공사가 계기가 되어 1988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虎郞山(해발 401.6m)과 戰鳳山(해발 379.3m)에서 뻗은 구릉 사이에 형성된 충적대지 위에 고인돌들이 분포하고 있었다.

 월앙 10호 고인돌:전 538번지 경지 정리지구 서쪽에 있었다. 괴석형의 상석 옆에서 석곽이 발견되었는데 상석이 이동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석곽은 남동모서리가 없어졌는데 할석으로 쌓았으며 장축은 동서방향이다. 바닥 동쪽과 중앙에서 관옥 14점이, 서쪽에서 천하석제 소옥 1점과 벽옥제 관옥 1점, 동검편 1점(현재 길이 3.8㎝)이 나왔다.

⑦ 승주 우산리유적0125)(전남 승주군 송광면 우산리)

 1988년 주암댐 수몰지구 유적을 조사하던 중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내우마을에서 북으로 약 600m 떨어진 산기슭 아래 구릉 위에 있다. 이 일대에는 120여 기의 고인돌이 4개의 무리를 지어 분포하고 있었는데 남북방향으로 열을 지어 놓여 있었다. 8호와 38호 고인돌에서 요령식동검이 출토하였다.

 8호 고인돌:뚜껑돌 아래에 석관이 있는 남방식 고인돌이다. 남북 길이 310㎝, 동서 폭 180㎝의 커다란 뚜껑돌 아래에서 하부구조가 나왔는데 바닥에 얇은 판석 16장을 깔고 네 벽은 할석으로 쌓았으며 뚜껑은 길이 60∼80㎝정도의 판상석 6장으로 덮었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147㎝, 폭은 50∼56㎝로 남쪽이 더 넓으며 깊이는 55㎝이다. 장축은 남북이며 북에서 동으로 11°기울어져 있다. 벽석의 상면 주위로 할석을 한겹 깔았는데 그 범위는 210㎝×280㎝ 정도이다. 요령식동검 1점과 식옥 2점, 소옥 5점이 나왔다(<그림 5>).

<그림 5>승주 우산리 8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동검은 곽의 북쪽 서벽아래에서 서벽과 15m 정도 떨어져 벽과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동검의 끝을 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끝을 양쪽에서 갈아 뾰족하게 만들었는데 부러진 파손품을 다시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현재 길이 17.8㎝·대폭 5.5㎝·다리 길이 4.0㎝).

 식옥은 남벽 아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는 타원형의 바닥돌 양쪽에서 나왔다. 천하석제로 서쪽에서 나온 것은 머리와 꼬리부분이 뾰족하고 배가 오목하게 파여 있으며 머리쪽이 약간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구멍은 몸체 거의 중앙에 양면에서 뚫었다. 동쪽 것은 머리와 꼬리부분의 끝이 절단되었고 배가 오목하게 파여 있다.

 그리고 소옥(지름 0.4∼0.6㎝)은 모두 곽의 남쪽 부분에서 나왔다. 원형에 가까우며 구멍이 뚫려 있다.

 38호 고인돌:남북 장축 길이 190㎝, 동서 폭 130㎝인 상석 아래에 장대석 1개로 뚜껑을 마감한 남방식 고인돌이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150㎝, 폭 43㎝, 깊이 20㎝인데 바닥에는 두께 10㎝ 정도의 작은 냇돌과 잔자갈이 깔려 있었고 네 벽은 모두 판석을 세워 석실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요령식동검은(1점) 양쪽 날부분이 거의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는데 꼬다리 한쪽에 홈이 나 있다. 꼬다리 부분에는 주조 때 생긴 주조흔적이 두껍게 남아 있는데 이것은 부러진 동검의 상반부를 다시 가공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현재 길이 18.5㎝).

⑧ 보성 덕치리유적0126)(전남 보성군 문덕면 덕치리)

 덕치리 신기마을과 척치마을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즉 이 유적은 척치마을 남쪽 해발 324.6m에 있는 산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언덕에 있는데 마을에서 동북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1호 고인돌:괴석형 상석 아래 지석이 있는 형식이다. 주변에 적석부가 있었고 가운데 빈 공간이 석곽부분이었다. 장축이 동-서 방향이었는데 편마암과 냇돌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고 바닥에는 납작한 냇돌과 편마암을 섞어 깔았다. 서쪽으로 치우친 중앙부분 남쪽 벽 아래에서 동검 1점과 홍도 파편이 발견되었다.

 동검은 칼 끝을 서쪽으로 둔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칼 아래쪽에서 목질부분흔적이 있다. 이는 나무 칼자루가 썩은 흔적인 듯하다. 한쪽 날 대부분이 결실되었고 꼬다리 일부도 부러져나갔다. 동질이나 형태로 보아 요령식동검의 파편인 것으로 확인된다(현재 길이 23.0㎝).

 석곽내 바닥에서 수습된 홍도 파편의 목부분은 두께가 0.2㎝ 내외로 매우 얇고 바깥에 암적색의 칠이 칠해져 있다.

 15호 고인돌:개석 아래에 뚜껑이 보이지 않는 석곽이 있다. 북이 터진 ㄷ자형 석곽인데 북으로 20°기운 동서향을 장축으로 하고 있으며 냇돌로 벽을 쌓았다. 바닥 군데군데 넓적한 냇돌을 깔았다. 서쪽으로 치우친 곽의 중앙부에 석검 1점(길이 28.5㎝)이 있었고 석검에서 남벽에 걸쳐 석촉 21점(길이 6.3∼12.5㎝)이 한꺼번에 나왔으며 또 동쪽에 8점의 석촉과 동촉 1점(길이 8.2㎝)이 나왔다(<그림 6>).

<그림 6>보성 덕치리 15호 고인돌과 출토유물

0119)韓國考古學會,<扶餘 松菊里出土 一括遺物>(≪考古學≫3, 1974).

金永培·安承周,<扶餘 松菊里 遼寧式 銅劍出土 石棺墓>(≪百濟文化≫7·8, 公州師大, 1975).

姜仁求 외,≪松菊里≫Ⅰ (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국립중앙박물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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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2)李榮文·崔仁善·鄭基鎭,≪麗川 平呂洞 산본 支石墓≫(全南大 博物館·麗川市,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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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