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석묘문화
중국의 지석묘는 주로 遼寧省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요동반도가 중심권을 형성하고 있다. 요동반도의 지석묘는 남으로 大連·金縣·新金·復縣·蓋縣·庄河·岫岩·營口·海城에서부터 북으로는 淸原縣·新賓縣·開原縣에 이르는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최근에는 吉林省의 樺甸縣에도 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중국의 지석묘는 남으로는 대련·영구와 丹東지구, 북으로는 길림성의 通化와 길림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136)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遼河 서쪽의 錦州·阜新·朝陽지구에서는 지석묘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37) 향후에 발견될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요하 이서에서는 지석묘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잠정적인 결론은 큰 의미가 있다.138) 이는 곧 요령성 지석묘의 경우 서쪽 한계가 요하에서 멈추고 있다는 뜻이 되며, 이러한 사실은 요령 일대의 지석묘문화는 물론 청동기문화 전반을 이해하는 데도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지석묘의 존재가 종래 알려져 있던 요동반도 일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길림지역까지 100기 이상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 또한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요동반도의 지석묘는 전형적인 지석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한반도의 이른바 北方式 지석묘와 상통하는 것이다. 이는 곧 요동반도와 한반도의 주민이 동일한 문화권에서 생활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석묘는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걸쳐 살았던 같은 주민이 남긴 유물로서, 동일한 하나의 문화권을 설정케 하는 고고학 자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석묘는 또한 청동기시대의 주민인 濊貊族의 문화유산으로 이해된다.139)
중국학계에서는 돌멘(Dolmen)을 石棚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형태나 구조는 우리의 북방식 지석묘와 비슷한 것이며, 작은 지석이 있는 변형 지석묘도 석붕의 범주에 넣고 있다. 그러나 지석이 없고 지상에 蓋石만 있는 유형은 우리의 분류와는 달리 蓋石式 지석묘라 하지 않고 ‘大蓋石墓’라 명명하고 있다.140) 어쨌든 지석묘가 변화를 거듭하여 석관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묘제의 외양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반출되는 유물을 고려하여 역동적인 사회변화 양상을 추구해야 한다.141)
요동반도의 지석묘에서 나오는 유물의 양은 한반도의 지석묘와 마찬가지로 매우 적은 편이다.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지만 비파형동검과 같은 표지적인 유물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요동반도지역의 지석묘에서 반출된 유물들은 石斧·紅陶片·石鏃·紡輪 등인데142) 이들은 모두 청동기시대의 유물이며 한반도의 지석묘에서 출토되는 유물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지석묘와 요동반도의 지석묘는 전형적인 지석묘의 경우 반출하는 유물들로 보아 거의 동일한 시기의 유적임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지석묘가 뒤에 변형 지석묘 등으로 변화·발전되어 간 것처럼 중국도 대개석묘 등으로 변화를 해나간 것은 이 역시 같은 문화권 내에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뒤이어 靑銅短劍 등이 공통의 문화요소로 등장하는 것과 석관묘가 공통의 묘제로 자리잡는 것도143) 한반도와 요동반도의 청동기문화가 동일한 권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요동반도 및 한반도의 거대 지석묘로 구분되는 것은 대부분 평지보다 20∼30m 높은 산등성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의 지석묘는 요동반도 남부의 析木城 石棚山 지석묘들과 함께 渤海灣을 끼고 環狀的인 배열을 하고 있는데, 이같은 사실은 이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역은 東夷族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하나의 권역으로서 이곳의 지석묘는 구체적으로 濊貊族이 남긴 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석묘의 분포가 요하를 넘지 않는 범위였다는 사실은 그 시기에 넓은 의미에서 고조선의 문화가 일정한 지역에서 공통의 청동기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변형 지석묘에서 비파형동검 등이 출토되고 있으며 그에 후속되는 석관묘에서 검·경·옥을 위시한 각종 청동유물들이 반출되고 있다. 석관묘는 변형 지석묘의 지하구조로부터 등장하였는데, 한국과 중국 동북지방에 분포하는 석관묘에서 공통적으로 청동단검 등의 유물이 반출된다는 것은 지석묘 단계보다 석관묘문화가 지역적으로 더 확산·발전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석관묘가 요하 서쪽의 요서지방에서도 보인다는 것은 지석묘의 분포가 요하 동쪽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과는 다른 점이다. 이는 지석묘의 하부구조로부터 발생한 석관묘문화가 주위의 새로운 문화와 융합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맥족이 지석묘문화를 형성시키고 석관묘문화를 담당하였다는 것은 한국에서 나타나는 고고학 자료로 보아 재론의 여지가 없다.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할 때 지석묘에서 석관묘로 이행하는 시기는 바로 요하라는 문화의 경계를 넘어가는 시기와 일치한다. 이 지역이 예맥족의 활동영역에 속하므로 이같은 변화양상은 고조선의 단계적인 변천을 밝히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지석묘는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묘제로서 특히 당시 지배자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지석묘가 지역적으로 산재해 있다는 사실은 君長社會의 지배자가 일정지역을 영유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징표이다.
136) | 許玉林,<遼東半島石棚之硏究>(≪北方文物≫3, 1985), 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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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 위와 같음. |
138) | 한편 절강성 일원에서 변형 지석묘(소위 남방식 지석묘)가 40여 기 확인되어 향후의 비교검토가 요망된다. 安志敏,<中國東南部的支石墓>(≪第38回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95), 102∼103쪽. 陳元甫,<河姆渡遺蹟 주변의 支石墓遺蹟에 대하여>(≪제7회 韓國古代學會 學術發表≫, 1995). |
139) | 金貞培, 앞의 책(1973), 160∼209쪽. ―――,<韓國和遼東半島的支石墓>(≪韓國學論文集≫4, 北京大學韓國學硏究中心, 1995), 95∼105쪽. |
140) | 許玉林, 앞의 글, 18∼19쪽 ―――,≪遼東半島石棚≫(1994), 66∼67쪽. |
141) | 북한학계에서는 도유호가 지석묘를 전형 지석묘와 변형 지석묘로 분류한 바 있는데 이후 이를 대신하여 유적이 나타난 지명을 따서 沈村型 지석묘(소위 남방식 ; 변형), 五德型 지석묘(소위 북방식 ; 전형)로 구분하고 전자에서 후자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침촌형 지석묘는 돌상자무덤 즉, 석관묘에서 기원하였다고 파악하여 우리 학계의 인식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석광준,<우리나라 서북지방 고인돌에 관한 연구>,≪고고민속론문집≫, 1979, 1∼112쪽). 그러나 지석묘는 전형적인 지석묘에서 변형 지석묘로 발전되었으며 아울러 지하에 묘장이 형성되는 석관묘로 변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金貞培, 앞의 글, 1995, 99쪽 및 金貞培,<韓國과 遼東半島의 支石墓>,≪先史와 古代≫7, 1996, 34쪽). |
142) | 宋延英,<遼東半島的石棚文化-析木城石棚->(≪社會科學輯刊≫5, 1987), 72∼73쪽. 許玉林·許明綱,<遼東半島石棚綜述>(≪遼寧大學學報≫1, 1981), 10∼17쪽. |
143) | 金貞培, 앞의 글(1991), 55∼6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