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부여국 후기의 왕성
≪자치통감≫晋紀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 처음에 鹿山에 거주하였는데 東晋 永和 2년(346) 백제의 침입으로 서쪽으로 燕 가까이에 옮겼다가 연 慕容皝 자제의 공격을 받아 왕 이하 5만여 명이 포로로 잡혀갔다”459)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하여 동쪽에 왕성을 두고 있던 부여는 346년에 백제로 표현된 세력의 침략을 받아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음을 알 수 있다.
부여 전기의 중심지였던 길림 일대에서 서쪽에 위치한 후기 扶餘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長春·農安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 일찍이 제기되었다.460) 문헌상 뚜렷한 시기인≪삼국지≫단계의 부여국은 東遼河 상류 송화강유역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는 바, 원부여 서쪽에 해당하는 도읍은 오늘날의 장춘 북쪽 伊通河畔의 농안 부근이라는 의견이 유력하다.461) 농안은 曹廷杰(1850∼1916)의≪東三省輿地圖說≫서문462)에서도 동삼성을 지배하려면 이 농안을 장악하여야 한다고 역설한 만주의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예족이 거주하면서 농사를 지어온 비옥한 평야지대로, 하천유역의 비옥한 땅과 넓은 초원은 농업과 목축 발전에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346년 백제로 표현된 세력의 침입으로 옮긴 부여성의 위치로 농안 일대는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부여국의 후기 왕성과 관련하여≪遼史≫지리지의 通州와 龍州黃龍府에 관한 내용이 주목되고 있다.463) 이 기사에 의하면 통주는 용주황룡부였고, 발해의 부여성이며 부여국의 王城이었다. 그런데 이 용주황룡부는 1020년 이후 그 위치를 동북방인 지금의 농안 일대로 옮기게 되는데, 따라서 원래의 용주황룡부는 농안의 서남쪽 부근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464)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는 원래의 황룡부가 농안과 가까운 서남쪽, 즉 농안 부근에 있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부여가 “서쪽으로 연 가까이에 도읍을 옮겼다”는 기사를 다시 살펴보면 당시는 타국의 침략을 받아 급하게 피난을 가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山地가 있고 험한 곳,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역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평야지역인 농안·장춘지역은 일단 피난지로는 부적절했다고 판단된다.
부여가 피난간 지역은 4세기 당시 연과 가까운 곳으로 뒤이어 부여는 연의 침입을 받게 된다. 346년 당시 부여 서쪽에 있던 연은 전연 모용황의 세력을 말한다. 이 당시 전연은 龍城(지금의 朝陽)으로 중심을 옮겨 서요하 이남지역과 요동의 鐵嶺·撫順·本溪를 포함하여 淸原까지 세력이 미치고 있었다.465)
이러한 전연의 세력분포 범위를 고려한다면, 길림시 일대에 있던 부여가 왕성을 서쪽 연 근처로 옮겼다고 할 때 그 지역은 당연히 연의 以東지역과 가까운 四平·昌圖·西豊·遼源 등지였을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이는 당시의 세력판도를 지도에 나타낸 다음의<그림 6>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또한 346년 당시에는 길림 동북부의 挹婁 혹은 勿吉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여 부여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466) 그리고 도리어 부여가 물길에게 쫓기는 상황이었다. 따라서≪자치통감≫에서 부여를 공격하였다는 백제는 물길, 구체적으로는 伯咄靺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467)
최근 부여가 피난한 지역으로 西豊縣 城山子山城을 든 견해가 나왔는데468) 경청할 만한 주장이라 생각된다. 이 지역에서는 漢·魏시기의 유물은 보이지 않고 주로 고구려시기의 유물이 출토되는데 이는 부여시기의 부여성을 고구려가 그대로 사용했던 데서 나타난 결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길림 일대에서 서남쪽으로 이동하는 교통로를 분석한 결과 송화강 상류의 輝發河와 柳河를 따라 이동하는 것이 고대의 주된 교통로였다고 한다. 이는 346년 당시 부여의 피난경로를 추정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으며서풍현 성산자산성을 후기 왕성으로 비정하는 데 하나의 방증이 된다고 한다.469) 특히 4세기 이후인 慕容廆시기 연의 위치는 朝陽과 錦州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역과 서요하의 동북부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는 분석470)이 있다. 이에 근거할 때 ‘西徙近燕’했을 때의 부여의 위치는 길림지역의 서북쪽보다는 서남쪽인 서풍 일대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한 4세기 이후에 農安 서북지역에는 室韋나 烏洛侯의 선조들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여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는 것이다.471)
백제의 요서진출설과 관련하여 앞으로 연구가 더 필요하겠지만 한강유역의 백제가 고구려지역을 지나서 부여를 공격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므로 이를 기록 그대로 백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또한 백제를 단순히 고구려의 誤寫로 보는 것도472) 문제가 있다. 만약 당시에 남쪽에 있던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가 피난하였다면 길림 북쪽 방면으로 도읍을 옮겨갔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므로 서쪽으로 연 가까이 옮겼다고 한 기록과는 어긋나는 셈이다.
따라서 4세기 중엽 부여는 동북쪽에 존재한 물길·읍루 등의 세력에 밀려 피난하였고 그 방향은 서북쪽이 아닌 서남쪽의 어느 지역에 비정하는 주장도473) 충분히 고려하여 앞으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고학계에서 지금의 農安城지역을 수차례 조사한 결과 유물의 연대는 빨라야 발해 이후의 遼·金시대를 넘지 않으며, 근본적으로 早期 유적과 유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474) 후기 왕성의 비정에 참고해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전성기인 3세기까지 부여의 영역은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가장 합리적이나, 그 이후 단계의 중심지문제는 종래의 통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고고학 자료를 참조하여 다시 한번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宋鎬晸>
459) | ≪資治通鑑≫권 97, 晋紀 19, 穆帝 永和 2년 정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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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 | 池內宏, 앞의 글. 日野開三郞,<扶餘國考>(≪史淵≫34, 九州大, 1946), 1∼104쪽. |
461) | 盧泰敦, 앞의 글(1989), 35∼36쪽. ≪中國歷史地圖集釋文彙編≫東北卷 夫餘條(中央民族學院出版社, 1988), 32쪽. |
462) | 傅朗雲,<評曹廷杰的歷史公的>(≪博物館硏究≫2期, 1989) |
463) | ≪遼史≫권 38, 志 2, 地理 東京道 通州·龍州 黃龍府. |
464) | 盧泰敦, 앞의 글(1989), 34∼36쪽. |
465) | ≪中國歷史地圖集≫4, 東晋十六國 南北朝時期, 9∼10쪽. |
466) | ≪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挹婁. |
467) | 당시 史家들은 伯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音이 가까운 百濟를 써서 표기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孫進己·馮永謙 主編,≪東北歷史地理≫2,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89쪽). |
468) | 王綿厚, 앞의 글, 83쪽. |
469) | 王綿厚·李健才, 앞의 책, 178∼185쪽. |
470) | 池培善,≪中世東北亞史硏究≫(一潮閣, 1986), 54∼56쪽. |
471) | ≪魏書≫권 100, 列傳 88, 庫莫奚國·契丹國·烏洛侯國. |
472) | 盧泰敦, 앞의 글(1989), 49쪽. |
473) | 王綿厚, 앞의 글, 82쪽. |
474) | 王綿厚, 위의 글, 82∼8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