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제
백제에서의 역사편찬 기록은≪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조의 薨年기사 뒤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開國한 이래 일찍이 문자로 일을 기록한 일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博士 高興을 얻어 비로소 書記를 갖게 되었다 하였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 보이지 않음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다.
우선 이 기사가 근초고왕의 졸년기사 뒤에 쓰였다는 것은 이 기사의 내용이 근초고왕(346∼374) 때 있었던 일이지만 어느 해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용하는 학자들이 종종 근초고왕 30년의 일로 이 기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개국이래 문자로 역사를 기록해 둠이 없었는데 이 때에 와서 박사 고흥이 비로소≪書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여 역사편찬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를 역사편찬으로 보지 않고 이를 역사기록의 시작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는 역사편찬으로 이해하고 있다.275) 고흥이라는 사람이 보이는 점으로 이를 단순히 역사기록의 시작으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견해가 아직까지 국가에서 역사를 기록 편찬한 일이 없었는데 이 때에 와서 자료를 모아 역사를 편찬하고 이후에 역사기록을 남기게 되었다고 종합될 수 있다.
백제의 지배집단은 고구려로부터 갈려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낙랑·대방과 밀접한 교류를 한 점으로 보아 백제에서의 한자의 사용은 국초로부터라고 생각된다. 또한 古尒王대에는 율령이 반포되었고 근초고왕 27년(372) 및 28년에는 남쪽의 東晉에 사신을 보내 문물을 교류하였으므로 이 무렵 한문화의 수용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즉 이 무렵에는 역사편찬이 이루어질 수 있는 분위기가 성숙하였다 하겠다. 또한 이 기록을 전하고 있는 고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는≪삼국사기≫·≪삼국유사≫등에 많이 등장하는 고기류의 하나로 생각된다.276) 앞에서 인용한≪삼국사기≫의 기록 중 ‘고기에 이르기를’이라는 내용은 ‘비로소 서기를 갖게 되었다’까지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그 이후의 문장은≪삼국사기≫편찬자의 기술일 것으로 생각된다. 고흥을 박사라고 한 것은 오경박사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書記≫라는 책은 비록≪日本書紀≫에 인용되지 않았으나 ‘記’자와 ‘紀’자는 상통하는 글자이므로≪일본서기≫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일본서기≫에 주로 인용된 역사서로는≪百濟記≫·≪百濟新撰≫·≪百濟本紀≫세 가지 사서가 나오고 있다. 이를 국내학자들은 僞書로 인정하는 경향이 강하나 비록≪일본서기≫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색·변형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명과 인명, 백제왕 관계의 기술 등에 있어서 이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다.≪백제기≫는 神功記로부터 雄略記에까지 인용되어 있고, 다룬 내용은 근초고왕대로부터 개로왕대 즉 한성시대 말기의 백제사가 언급되어 있으나 윤색이 가장 심하게 되어 있다.≪백제신찬≫은 웅략기에 세번 인용되어 있으며 무령왕의 계보가≪삼국사기≫와 차이가 있는데,277) 이는 무령왕릉지석이 발견됨으로써≪백제신찬≫의 왕실계보가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즉 무령왕은 동성왕이 아들이라는≪삼국사기≫기록보다는 이복형제라는 설이 타당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다.278)≪백제본기≫는 繼體記로부터 欽明記에 가장 많이 인용된 자료로서 가야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제·가야·신라의 관계가 상세히 언급되어 있으나 임나일본부라는 허위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 3서의 내용이 많이 윤색·왜곡되어 기술되어 있고,≪일본서기≫의 기록 자체가 사료로서의 가치가 극히 빈약한 것이지만 이에 인용된 3서의 내용 가운데에는≪삼국사기≫를 보완할 수 있는 인명·지명·왕실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3서의 존재는 백제에서 근초고왕대의 서기 편찬 이후에 역사편찬이 계속적으로 있었음을 반증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제에서는 금석문이 고구려·신라에 비하여 발견된 예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과 왕비의 誌石과 買地券은 백제의 역사의식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왕의 칭호에서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 칭한 점에서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대단히 중시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왕호는 당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당시 우리 나라의 왕호에 대한 관습의 일면을 알 수 있다.279) 비록 대왕이라는 칭호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중국 황제만이 사용하는「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에서 백제의 자존적인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또 年代을 표시한 경우 干支로 기록하였다. 이는 역사기록에서도 간지로 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왕실에서는 假埋葬制와 三年喪制가 실시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중국제도의 수용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습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령왕 자신이 地神으로부터 자기의 자리를 돈을 주고 사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에서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시신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횡혈식 고분의 구조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왕실의 관념과 일치하는 것이다.
275) | 吳恒寧,<史官制度의 成立史의 제문제>(≪泰東古典硏究≫14, 1997), 20쪽의 글에서 ‘未有以文字記事’를 역사를 기록하였다고 해석하여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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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 李基東, 앞의 글(1994), 31쪽. |
277) | 李根雨,≪日本書紀에 引用된 百濟三書에 관한 硏究≫(韓國精神文化硏究院 博士學位論文, 1994), 17∼18쪽 참조. |
278) | 李道學,<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韓國史硏究≫45, 1984), 15∼19쪽. |
279) | 이런 예는 신라에도 보이고 있으니 眞興王巡狩碑에도 眞興太王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황초령순수비 및 마운령순수비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