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문학과 예술
1. 언어와 문학
1) 언어
역사시대의 역사가 주로 문자로 기록된 사료에 의거하여 기술되는 것과 같이, 역사시대의 언어사는 그 시대 언어로 기록된 ‘언어자료’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또한 일반 역사가 사료의 내용에 따라 취급될 수 있는 주제와 범위가 한정되는 것과 같이, 언어사도 전하는 언어자료의 성격에 따라서 포함될 수 있는 내용이 한정된다.
우리에게 전해진 삼국의 언어자료는 당시 국어의 실상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못하다. 온전한 문장의 형태까지 보여주는 자료는≪三國遺事≫에 수록된 鄕歌 14수뿐이고, 그 외는 주로 인명·지명·관직명 등 고유명사들에 국한되어 있다. 대부분은≪三國史記≫와≪삼국유사≫및 각종 金石文 등 우리 나라의 자료에 등장하는 이름들이지만,≪三國志≫·≪隋書≫·≪北史≫등 중국의 역사서,≪日本書記≫등 고대 일본의 기록들에 등장하는 이름들도 적지 않다. 이들 언어자료에 의하여 삼국어 어휘의 일단을 추정할 수 있고, 몇 가지 금석문과 古기록에서 문법적 특징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의 언어자료는 전부가 漢字로 기술된 자료이다. 이것이 삼국 언어의 실상을 추정하는 데 어려움을 더해 준다.285)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자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는 우수한 문자이지만 발음을 표기하는 데는 심히 부적당한 表意音節文字이다. 더욱이 漢字音은 시대에 따라 변하였고 지역에 따라 달랐다. ‘國’자의 독음이 국어로는 [국], 중국의 북경어로는 [구오], 일본어로는 [코쿠]이다. 본래 동일한 고대 중국어음에서 유래하였지만, 국어·중국어·일본어에서 각각 다르게 변화하여 온 결과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讀音이 달랐던 한자로 표기된 삼국어 어휘를 당시의 국어음으로 정확히 복원하기는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한 자 한 자가 의미를 표시하는 表意文字이지만, 이미 甲骨文에서부터 의미와 상관없이 다만 독음만 표기하기 위하여 이용된 假借字들이 존재하였다. ‘來’자의 갑골문자는 원래 곡식 이삭을 象形한 것이었으나, ‘오다’라는 의미를 가진 同音異意語의 표기에 假借됨으로써 후세에는 오히려 그 것이 이 글자가 시현하는 기본 의미가 되었다. 중국에서 한자로 외래어를 표기하는 방법은 일찍부터 가차가 아니면 번역이었다. 예를 들면, 佛陀(부처)·菩薩(보살)·彌勒(미륵)은 가차표기(산스크리트어 Buddha·Bodhisattva·Maitreya)이고, 淨飯王(부처 아버지의 이름)은 번역이다.286)
삼국시대 선조들이 한자를 빌어 국어를 표기할 때도 역시 개별 한자의 의미와 독음을 혼용하였다. 예를 들면, 향가에 등장하는 ‘心音’은 현대국어의 ‘마음’(중세국어 ‘’)에 해당하는 신라어의 표기로서, 첫 글자는 의미, 둘째 글자는 독음을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한자의 의미를 취하여 표기한 것을 釋讀(혹은 訓讀)표기, 독음을 이용한 것을 音讀표기로 부른다. 석독과 음독에 의하여 국어를 표기하는 방식을 전통적으로 吏讀(이두)라고 불렀고, 그 중 국어 문장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표기한 鄕歌의 표기방식을 鄕札이라 구별하기도 하였다. 근래에 한자를 빌어 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포괄적으로 借字표기로 지칭하기도 한다.287)
삼국의 언어자료가 모두 한자로 기술된 것이 삼국어의 실상 파악을 어렵게 하지만, 다행히≪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한 가지 이름을 석독과 음독 두 가지로 표기한 예들이 있어서, 일부 삼국 어휘의 추정·복원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居柒夫 或云荒宗”(≪三國史記≫권 44, 열전 4, 거칠부)에서 ‘居柒’(거칠)과 ‘荒’이 일치되어 앞의 것은 음독, 뒤의 것은 석독으로 판단되고, 음독표기로부터 중세국어 ‘거츨(다)’(현대국어 ‘거칠(다)’)과 의미와 음상이 같은 신라어 단어를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삼국사기≫권 34∼37, 지리지에는 통일 신라의 강역 안에 있는 지명들을 수록하면서 옛 지명들을 병기하였다. 그 중에 새 지명과 옛 지명이 석독과 음독의 관계에 있는 것들이 일부 있어서 역시 당시 어형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며, “永同郡 本吉同郡 景德王改名”(≪삼국사기≫권 34, 雜志 3, 지리 1)에서 ‘永’과 ‘吉’이 일치되며, 전자는 석독, 후자는 음독표기로, 현대국어 ‘길(다)’와 같은 신라어 단어를 복원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삼국이 시작된 기원전 1세기 중·후반에 이미 한자가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中原에는 고도의 문화를 구가하던 漢朝가 흥성하고 있었고, 그 세력은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지역까지 뻗치고 있었으니, 즉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漢四郡이다. 한사군이 점유하고 있던 지역 내, 혹은 인접한 지역에서 발흥한 삼국에 漢文化와 더불어 한문과 한자가 소개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듯하다.
한자로 기술되는 漢文語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公式文語로 채택되었던 듯하다. 현전하는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357년에 축조된 고구려 美川王陵의 壁書, 414년에 건립된<廣開土王陵碑>등이 한문어이다. 또한, 한문어와 문법구조가 현격히 다른 국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도 점진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어순을 한문어의 ‘(주어+)동사+목적어’ 형식을 따르지 않고 국어의 ‘(주어+)목적어+동사’ 형식으로 바꿔진 문장들이<광개토왕릉비>등에서부터 간간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대략 6세기경부터 吏讀 표기방식이 공식문어가 아닌 일반인의 상용문으로부터 점차 발전되기 시작한 듯하다.
대략 삼국시대 초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문과 한자의 도입은 우리 민족의 언어 및 문자생활, 나아가 문화의 전반적 발전에 영원히 남겨질 영향을 끼쳤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에 의하면, 한자는 삼국시대에 우리 민족이 사용한 유일한 문자였고, 한문어는 19세기 후반까지 우리 나라에서 공식 문어로 사용되었다. 한자어, 즉 ‘한문어식 단어’는 이미 삼국 초기의 국어에도 상당히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