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의 서예
고구려는 일찍부터 중국과의 문화교섭을 통해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특히 고조선이 멸망한 뒤 한반도 서북부에 설치되었던 漢四郡(B.C. 108∼A.D. 313)을 멸망시키고 그 문화를 흡수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금석문 가운데 414년 고구려의 옛 도읍이던 국내성(中國 吉林省 集安)에 세워진 廣開土大王碑가 단연 대표적이다. 이 비는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던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비로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 淸 光緖年間을 즈음하여 세상에 알려진 이래 고구려의 건국신화, 광개토대왕의 행력 및 고구려의 대외관계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서 금석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높이 6.4m에 달하는 巨碑로서 빗돌(碑身)은 회록색 凝灰岩을 네모진 기둥 형태로 대략 가공한 것이다. 비문은 빗돌 4면에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비 표면의 마멸로 인해 140여 글자는 식별되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는 漢代의 隷書에 기본을 두었는데 자형에 있어 漢隷의 납작한 경향과는 달리 정방형에 가까운 편이다. 획법에 있어서는 篆書의 필의를 가미하고 파책(波磔)을 억제한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당시 통용되었던 楷書와 行書 및 草書의 자형이나 획법을 가미한 예도 보인다. 짜임의 변화가 매우 천연스럽고 획이 질박하고 웅혼하여 고구려인의 기상이 잘 나타나있는 듯하다(<그림 1>).380) 이와 관련하여 太王陵·千秋塚·大石塚 등 集安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磚의 명문이나 경상북도 경주의 壺杅塚에서 출토된 靑銅壺杅의 명문도 광개토대왕비의 서풍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는 예들이다. 또한 1979년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中原高句麗碑(5세기 후반)는 長壽王(재위 413∼491) 때의 남하정책에 의해 새로 편입된 지역에 세워진 拓境碑이다. 높이 2m 정도의 화강암제 빗돌은 광개토대왕비처럼 네모진 기둥 형태인데 표면이 좀더 판판하게 정비되었다. 서체는 예서의 기미가 조금 남아 있는 해서로서 당시 중국 남북조시대의 서풍과 같다는 점에서 당시 통용되었던 글씨체를 살펴볼 수 있다.381)
한편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집안과 평양 일대에 산재한 80여 기의 벽화고분 가운데에는 墨書가 써있는 예가 몇몇 전한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안악군 安岳 3호분(357)과 평안남도 대동군 德興里 고분(408)의 묵서는 중국의 東晉時代에 해당되는 보기 드문 진적이다. 특히 안악 3호분의 묘주인공에 대해서는 고구려에 귀화한 중국인 또는 고구려의 왕이라는 설로 나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든 고구려 지역에 조성된 고분이라는 점에서 4세기 후반의 행서풍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또한 광개토대왕 때 大使者를 지냈던 牟頭婁의 무덤(5세기, 集安 소재)에 묵서되어 있는 墓誌는 당시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서체의 時代性을 잘 보여주는 예로서 자연스러운 운필과 생동하는 필치가 매우 돋보이는 명품이다(<그림 2>).
이 밖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인 6세기 후반경 都城을 쌓았을 때 축성을 맡아본 책임자들이 성벽에 새긴 刻石이 몇 점 전한다. 남북조시대의 해서에 바탕하여 행서의 기미를 더한 것으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졸박한 서풍에서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백을 엿볼 수 있다(<그림 3>). 또 소형의 금동불상의 光背에 새겨진 造像記가 몇 점 전하고 있어 당시의 불교신앙과 함께 대중적인 글씨체를 살필 수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서예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통용서풍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면서도 서풍에 있어서는 웅건하고 활달한 특성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는 중국의 북방에서 五胡十六國이 흥망을 거듭하던 시기에 해당되는 귀중한 예로서 당시 통용되던 해서체를 사용하지 않고 漢代의 고풍스런 예서체로 쓰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금석문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