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라의 가무전통
가야금이 신라땅에 수용되기 이전부터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처럼 굳건한 가무전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라의 가무는 대체로 지방의 백성들이 즐기던 향토색이 짙은 노래와 춤이었다. 신라 가무에 대한≪삼국사기≫악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⑩ 會樂과 辛熱樂은 儒理王 때 지은 것이요, 突阿樂은 脫解王 때 지은 것이요, 枝兒樂은 婆娑王 때 지은 것이요, 思內樂 奈解王 때 지은 것이요, 笳舞는 奈密王 때 지은 것이요, 憂息樂은 訥祗王 때 지은 것이다. 碓樂 慈悲王 때 사람인 百結先生이 지은 것이요, 竿引은 智大路王 때 사람인 川上郁皆子가 지은 것이다. 美知樂은 法興王 때에 지는 것이요, …內知는 日上郡의 음악이요, 白實은 押梁郡의 음악이요, 德思內는 河西郡의 음악이요, 石南思內는 道同伐郡의 음악이요, 祀中은 北隈郡의 음악인데, 이들은 모두 우리 鄕人들이 기쁘고 즐거워서 지었던 것이다. 聲樂器의 수효와 歌舞하는 모습은 후세에 전하여지지 않는다(≪三國史記≫권 32, 志 1, 樂).
儒理王(24∼57) 때 만들었다는 會樂은 팔월 한가위날 길쌈을 하면서 여자들이 춤추며 노래불렀다는 會蘇曲이고, 訥祗王(417∼457) 때의 憂息樂은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던 내물왕의 아들 未斯欣이 박제상의 공로로 무사히 귀국한 것을 기뻐서 노래한 우식곡으로 드러났다. 法興王(514∼550) 때의 美知樂은 경북 의성군 丹密지방의 음악이고, 신열악의 辛熱이나 思內라는 명칭은 지방을 뜻하는 鄕의 옛날 우리말이므로635) 향토색 짙은 지방음악이라는 뜻이다.
慈悲王(458∼478) 때 경주 낭산 기슭에 살았던 百結先生이 琴이라는 현악기로 떡방아소리를 냈다는 碓樂은 기악곡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백결선생의 금은 가야금이 신라에 수용된 眞興王(540∼575)보다 1세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므로 가야금으로 보기 어렵고, 그렇다고 거문고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그러므로 백결선생의 금은 가야금의 원형으로 보이는 사료 ⑤ 변진의 고대 현악기 瑟의 일종이 5세기 무렵 신라 땅에서도 연주됐을지도 모른다.636)
白實은 지금의 경북 경산군 押梁지방의 음악이었고, 德思內는 경남 울주군 河西지방의 음악이었으며, 石南思內는 경북 영천지방의 음악이었음이≪삼국사기≫지리지에 의해서 밝혀졌으므로,637)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건대 祀中이나 內知도 경상도의 어느 지방음악이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그러한 신라의 지방음악은 대체로 기악반주가 없는 노래와 춤으로 구성된 향토색 짙은 가무였는데, 그런 가무가 6세기 가야금의 수용 이후에 기악반주에 의한 새 음악문화 곧 樂·歌·舞로 발전되었다. 이제 기악반주에 의한 악·가·무의 실례를 아래의≪삼국사기≫악지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⑪ 다만 古記에 이르기를, 政明王 九年에, 新村에 거동하여 잔치를 베풀고 음악을 연주케 하였는데, 笳舞에는 監이 六人이요, 笳尺이 二人, 舞尺이 一人이며, 下辛熱舞에는 監이 四人, 琴尺이 一人, 舞尺이 二人, 歌尺이 三人이며, …新羅 때에는 樂工을 모두 尺이라고 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樂).
삼국통일 신라사회에서 노래나 춤을 연주하던 樂工들은 尺으로 불리었는데, 노래부르는 악공은 歌尺이었고, 춤추는 악공은 舞尺이었으며, 가야금을 연주하는 악공은 琴尺이었다. 笳尺에서는 笳를 연주하는 악공과 춤추는 악공 만이 연주했지만, 下辛熱舞는 가야금연주자 1명과 춤추는 악공 2명 그리고 노래하는 악공 3명에 의한 악·가·무의 종합공연예술이었다. 삼국통일 직후의 이러한 악·가·무는 신라의 가무전통 위에 가야금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음악문화였다.
≪고려사≫악지에 의하면, 신라 속악이라는 제목 아래 東京·木州·余那山·長漢城·利見臺의 곡명이 전하는데,638) 이러한 곡명은 그 지방의 민요를 바탕으로 예술화시킨 성악곡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신라의 곡명들이 백제의 井邑이나 無等山 또는 고구려의 來遠城이나 溟州 처럼 백성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노래의 일종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음악문화를 관장하던 왕립음악기관이 바로 音聲署였다. 신라 음성서가 언제 설립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眞德王 5년(651)에 음성서에 大舍를 둔 기록이 있으므로,639) 7세기에는 설립되었다.640) 음성서는 景德王(742∼764) 때 大樂監으로 개칭됐다가 惠恭王(765∼729) 때 다시 음성서로 복원되었다. 음성서의 관원으로 長 2명·大舍 2명·史 4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樂師 출신이 아닌 행정관리들로서 악·가·무의 공연활동을 행정적으로 지도 감독했다.
요컨대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늦게 국가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6세기 가야금이 신라사회에 소개되기 전까지의 음악문화는 향토색이 짙은 각 지방의 가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6세기 후반에 가야금이 우륵에 의해서 신라사회에 수용됨으로써, 가야금반주에 의한 악·가·무의 종합공연예술이 신라음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더 나아가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에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역량을 갖추도록 발전되었다.
635) | 梁柱東, 앞의 책, 33∼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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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6) | 宋芳松, 앞의 책(1984), 71쪽. |
637) | 宋芳松,≪韓國音樂史硏究≫(嶺南大出版部, 1982), 272쪽 주 94∼96 참조. |
638) | ≪高麗史≫권 71, 志 25, 樂 2, 三國俗樂, 新羅. |
639) | ≪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 音聲署. |
640) | 于勒에게서 노래·춤·가야금을 배웠던 法知·階古·萬德이 그 당시의 王立音樂機關에 소속됐던 行政官吏 또는 樂師였다면, 音聲署는 眞興王(540∼576) 때 이미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추정을 뒷받침할 문헌적 증거가 현재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