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1) 토지제도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변화된 여건에 따라 체제를 정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새로 제기된 과제들을 해결해가는 데는 영토의 확대와 주민의 증가라는 물질적 기반의 확충과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전쟁의 승리에 따른 왕실의 위상 제고가 큰 몫을 하였다.
왕실은 왕권을 견제하던 진골세력의 상당수를 제거하여 정부기구를 정비하는 등 관료체제를 다져갔다. 국가체제 정비과정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이 같은 작업을 가능케 하는 기반으로서 토지제도의 정비가 수반되었다. 토지제도는 삼국의 통일에 따른 지배체제의 재편 등에 따라 개혁의 여지가 있기도 하였지만, 여전히 본 신라의 영역과 주민이 전 국토와 주민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데서 오는 제약이 따랐다. 완전히 영토화한 백제지역도 그 지배세력과 주민의 일부가 唐이나 倭로 갔다고 하나 대다수 주민은 여전히 종래의 토지에 긴박된 채 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영토화한 고구려지역의 주민과 토지의 관계도 결코 크게 단절된 양상이었다고 말할 근거는 적다.
이 같이 종래의 토지와 주민간의 관계가 상당부분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현실은 통일기 신라정부의 토지정책을 삼국시대 이래의 농업 및 토지소유 역사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도록 하였다. 신라를 위시한 삼국시대 후반, 토지는 사적소유의 기초위에서 귀족들의 大土地所有와 일반민의 小土地 自作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은 전체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조장하여 주민들간에는 사회경제적 분화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에서는 3등호제가 실시되고 있었는데 신라의 경우도 형편은 유사하였다고 보인다. 전쟁물자의 조달과 국가체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재정수요가 증대되면서 조세수취의 필요성은 점차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의 재산에 대한 파악과 수취가 당연히 증대되었다.0368)
이러한 과정에서 토지에 대한 計量이 점차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文武王 3년(663) 金庾信에게 주어진 500結의 토지에서 結積이 사용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이 같은 토지의 사여는 김유신 이외에도 적지 않은 자들에도 있었을 것인데0369) 토지에 대한 국가적 計量의 가능성을 추정할 수 있다.
사료를 통해서 토지의 기증이나 교환·매입 등의 사실도 몇 군데서 확인할 수 있다.≪三國史記≫新羅本紀 文武王 4년 8월 14일조를 보면 財貨나 田地를 함부로 절에 기증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전란의 마지막 고비에서 신라인들이 불교에 크게 의존하면서 재물이나 토지를 절에 기증하는 일이 흔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의 매매나 기증의 사실은<大崇福寺碑銘>과<智證大師寂照塔碑銘>등 현전하는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들은 통일신라에서는 토지에 대한 사유권이 엄존했던 것은0370) 물론 동시에 토지에 대한 측량이 있었을 것을 짐작케 해준다.
이제 7세기말 8세기 전반, 통일신라에서 일관되게 추진된 주요 토지시책에 보이는 토지의 품목별 제도의 정비 내용과 그것이 갖는 역사성을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