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귀족의 수공업 경영
귀족들의 수공업 경영상은 3세기 말경 昔于老가 동해안에서 鹽奴를 부렸음직한 기록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선덕왕 11년(642) 大買縣 豆斯支沙干이 고구려와 군사적 동맹을 체결하기 위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 김춘추에게 靑布 500보를 증여했다는 것에서도 지방의 유력자가 독자적으로 수공업을 경영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궁중수공업의 성립과정은 6부의 자치권을 인정받았던 6宮의 수공업 관사를 왕실에 귀속시키는 과정이었거니와, 이는 역으로 6부의 각 궁에는 귀족들이 나름대로 수공업장을 경영하였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문왕 2년(682) 본피궁을 설치하면서 궁중수공업의 체계를 확립하였다고 하지만, 진골귀족들은 여전히 기왕의 생산체계를 유지하였다. 신라 중대말 하대 초엽의 상황을 보여주는≪新唐書≫新羅傳에서 “宰相家에는 祿이 끊이지 않으며 奴僮이 3천 명이다. …”라고 하였듯이, 이들 재상가에 속해 있던 노동 가운데는 이상택의 하전이나 조남택 장인과 같은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궁중수공업장에서 하급관리들이 수공업장을 경영하였던 것과 유사한 형태로 수공업 생산에 종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일본 正倉院에 소장된 꽃문양이 있는 花氈에 덧붙인 貼布記와 자주색의 毛氈에 덧붙인 첩포기의 ‘行卷韓舍’나 ‘紫草娘宅’ 등은 화전과 色毛氈을 생산하였던 귀족들의 수공업장 경영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들 화전과 색모전은 대체로 진골귀족들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하여 생산된 것이 일본에 보내졌던 것으로서, 진골귀족이나 두품신분들이 경영하였던 수공업생산의 면모를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