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간수공업
가. 농민수공업
농민수공업은「男耕女織」으로 표현되듯이 일반적으로 가내 분업의 단계에 있었으나, 일부 수공업자는 생활일용품을 만들어 시장에 팔기도 하였다. 그러나 석탈해의 야장설화에서 볼 수 있듯이 2∼3세기 무렵에 이미 상당한 부를 축적한 전업적인 민간수공업자가 존재하였다. 이러한 전업적 수공업자는 중고기까지도 집단별로 거주했는데,≪三國遺事≫桃花女 鼻荊郞條에 보이는 사량부의 石工들은 그러한 좋은 사례가 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비형랑은 국왕의 신하로, 吉達은 大臣의 신하로 되면서, 집단으로 거주하였던 장인들은 각각 새로운 신분으로 계층화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량부에 그대로 남게 된 장인들은,≪三國史記≫권 46, 强首傳에 보이는 釜谷冶家와 같이 지방에 머무르면서 전업적 수공업자로서 생활을 영위하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고, 길달과 같은 이는 성덕왕 24년(725) 上院寺銅鐘을 조성한 照南宅匠 仕□大舍나 혜공왕 7년(771) 皇龍寺鐘을 조성한 里上宅 下典과 같은 장인으로 되었을 것이며, 비형랑과 같은 이는 8세기 중엽 분황사약사동상을 주조한 强古奈麻나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한 관등을 가진 장인이 되었을 것이다.0410)
결국 중고기 신라가 신분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전업적 수공업자들은 그 직능에 따라 계층화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농사와 함께 수공업기술을 발휘하는 농민수공업자로, 일부는 귀족들이 경영하는 수공업장이나 국가의 수공업장에 귀속된 장인으로 위치지워짐으로써, 각각 민간수공업과 귀족들의 사영수공업, 그리고 관영수공업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농민수공업자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잘 나타나지 않으나, 대체로 농민이 다루는 호미ㆍ낫과 같은 농구를 비롯하여 수레의 부품, 건축에 필요한 철제품, 일상생활에 필요로 하는 칼ㆍ마치ㆍ바늘 등의 철제품 등을 비롯하여 사원이나 주택의 건설, 기와의 제조 등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분업이 확대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전업적 수공업자로서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입역과 함께 工價를 받고 작업에 나아가 자기 영리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장인 사회가 분화됨으로써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장인이 등장하게 되었고,0411) 4∼6두품의 官匠에 한정되었던 博士의 칭호가 일반승장이나 장인들의 범칭으로 일컬어지게 되었으며, 아울러 장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전대에 비하여 향상되었다.
장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된 데는 慈悲·布施·福田·一如平等 등의 불교사상과 중국 고대사회에서 장인들의 노예적 노동을 사상적으로 희석시켰던≪瑜伽論≫의 工巧明思想0412)이 신라사회에 유입되어 영향을 끼친 일면도 있을 것이다. 결국 장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의 향상으로 말미암아 일부 장인들은 나말려초의 전환기와 맞물려 고려 건국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회에 四民觀念이 뿌리를 내리면서 절대 다수의 예속적 장인들은 工匠案이나 百工案牘 등에 등록되어 신역을 바치거나, 금소·철소 등의 수공업 집락에 편제되어 身役을 바치는 단순 생산자로 전락하였고, 일부 장인만이 武散階를 받는 등으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0413)
0410) | 朴南守,<新羅 上代 手工業과 匠人>(≪國史館論叢≫39, 國史編纂委員會, 1992), 76∼7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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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1) | ≪日本三代實錄≫권 17, 淸和天皇 貞觀 12년 2월 20일 및 권 18, 淸和天皇 貞觀 12년 9월 15일. |
0412) | 공교명사상은 “보살이 베풀어야 할 만한 때가 아닐 때에는 이전부터 익힌 工巧業處에서 제작의 의도를 행하고, 적은 노력으로 많은 財寶를 만들어 모아 여러 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이익을 주라”는 사상으로서 진덕왕대에 신라에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朴南守,<승장의 활동과 그 사상적 기반>, 앞의 책, 249∼256쪽). |
0413) | 朴南守,<중·하대 장인의 분화와 사회경제적 지위변동>(위의 책)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