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원의 수공업 경영
사원에서도 나름대로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한 수공업 경영이 있었다. 사원에서의 수공업 경영은 여러 불사에 나타난 승장의 활동으로 미루어 보아 짐작할 수 있는데, 대체로 중대의 寺院成典과 政法典의 전신 조직을 이루는 속관들이 사원의 건축이나 기타 불사, 그리고 사원의 토지 등을 관장하던 형태에서, 중대말 하대 초엽부터 점차로 승단이나 사원의 자율적인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는 각 사원들이 田莊을 바탕으로 하여 경제력을 성장시키고 국가의 통제로부터 일탈해 나가는 것과 흐름을 같이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8세기 중엽부터 僧匠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청정무구를 지향하던 승려들이 장인으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중고기에 유입된 工巧明思想이나 9세기 중엽에 들어온 百丈의 淸規에서 영향받은 일면도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승장은 석장계열과 철장계열로 구분된다. 철장계열은 다시 鑄造匠과 細工匠(鐫字匠)으로, 석장은 탑비 등을 조성하는 장인과 刻字僧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밖의 불사에 필요한 여러 유형의 승장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고려시대의 승장이 각자승·석공승·철장승·목수승·와장승 등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보아0414) 신라에서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들 승장 가운데「伯士」·「助博士」·「大伯士」등의 명칭으로 일컫는 이들이 있었다. 기술자로서의 博士라는 이름은 본래 官匠에게 주어진 칭호로서,0415) 대체로 4∼6두품급의 신분층이었다. 이들 명칭은 중대에 이르러 國學·漏刻典 등의 관사에 중국식 박사제를 시행하면서 보편화되어 경덕왕대를 전후하여 대박사-차박사 등으로 분화되었고, 점차 일반 장인들에게도 확대 적용되었다.0416) 이러한 명칭을 승장들이 일컫게 된 데는 저들이 해당 분야에서 관장에 버금할 만한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고, 승려들 상호간에 기술의 정도에 따라 명칭이 분화되었으며, 아울러 승장 상호간에 기술을 전수·습득하는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승장들의 존재는 사원에서의 수공업 경영의 가능성을 상정하게 하지만, 義寂이나 太賢의 저술에서 재가자의 상행위를 인정하면서도 승려들의 상거래를 금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0417) 각 사찰은 자체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하여 이들 승장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수공업을 운영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0414) | 林英正,<高麗時代의 使役·工匠僧에 대하여>(≪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1992), 765∼7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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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5) | 朴敬源,<高麗鑄金匠考-韓仲敍와 그의 作品->(≪考古美術≫149, 1981), 13∼16쪽. |
0416) | 朴南守,<新羅 匠人의 分化와 社會經濟的 地位 變動>(≪芝邨金甲周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 1994), 207∼211쪽. |
0417) | 崔源植,<新羅 義寂의 梵網菩薩戒觀>(≪何石金昌洙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 1992), 55쪽. ―――,<太賢의 菩薩戒 이해와 現實問題 인식>(≪伽山學報≫2, 1993), 12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