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대10권 발해Ⅱ. 발해의 변천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1) 발해유민의 의미
    • 01권 한국사의 전개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08권 삼국의 문화
    • 09권 통일신라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1. 발해의 건국
          • 1)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과 말갈족의 동향
            • (1) 고구려유민의 동향
            • (2) 말갈 부족들의 상태
          • 2) 676년 이후 동북아 국제정세
          • 3) 대조영집단의 동주와 건국
        • 2. 발해의 발전
          • 1) 대외적 팽창
          • 2) 국가체제의 정비
        • 3. 발해국의 주민구성
          • 1) 요·금대의 발해인과 여진인
          • 2) ‘토인’과 말갈
          • 3) 발해 왕실의 출자
          • 4) 발해인의 귀속의식
          • 5) 발해국의 성격에 대한 인접국인의 인식
      • Ⅱ. 발해의 변천
        • 1. 발해의 융성
          • 1) 내분의 발생
          • 2) 해동성국의 구현
          • 3) 발해국의 위상
        • 2. 발해의 쇠퇴와 멸망
          • 1) 멸망의 배경
          • 2) 요동의 상실과 멸망
        • 3. 발해유민의 부흥운동
          • 1) 발해유민의 의미
            • (1) 발해유민과 발해유예
            •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 2) 전기 부흥운동-후발해와 정안국-
          • 3) 후기 부흥운동-흥요국과 대발해국-
            • (1) 대연림의 흥요국
            • (2) 고영창의 대발해국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1. 신라와의 관계
          • 1) 발해 건국기의 남북교섭
          • 2) 발해 왕권확립기의 남북대립
          • 3) 신라 귀족항쟁기의 남북교섭
          • 4) 발해의 영토확장과 신라·당 밀착기의 남북대립
          • 5)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
        • 2. 당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 2) 양국의 전쟁과 교섭
          • 3) 전쟁의 경과와 신라·발해의 대립
        • 3. 일본과의 관계
          • 1) 발해 건국 초기의 양국교섭
          • 2) 발해와 일본의 신라협공계획과 양국교섭
          • 3) 신라협공계획 무산 후의 양국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1. 중앙통치조직
          • 1) 조직의 정비과정과 성격
          • 2) 조직의 내용
        • 2. 지방·군사제도
          • 1) 지방제도
          • 2) 군사제도
        • 3. 사회·경제구조
          • 1) 사회구조
            • (1) 신분제도
            • (2) 토인과 수령
            • (3) 사회생활
          • 2) 경제구조
            • (1) 경제생활
            • (2) 대외무역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불교와 기타 신앙
        • 2. 유학과 한문학
          • 1) 유학
          • 2) 한문학
        • 3. 예술
          • 1) 건축
            • (1) 성곽과 건물지
            • (2) 사원과 탑
            • (3) 고분
          • 2) 미술
            • (1) 회화
            • (2) 공예
          • 3) 음악과 무용
        • 4.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 국내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 2) 국외의 발해사 인식과 연구
          • 3) 주요 연구 주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42권 대한제국
    • 43권 국권회복운동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46권 신문화운동 Ⅱ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2) 발해국 지배층의 성씨 분포와 그 유민

 발해유민을≪고려사≫나 중국이나 일본측의 기록에서 가려내는 작업은 ‘발해유예’를 그 범주에 포함시킬 때에 쉽지 않은 일이다. 좁은 의미의 발해유민은 ‘발해 아무개’와 같이 국적이 확실히 밝혀진 사람들을 뽑으면 된다.166) 그러나 ‘거란(요) 아무개’도 때에 따라서는 발해유민으로 보아야 한다. 이름이 밝혀진 사람들 중에 거란 국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발해유민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우선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 ‘거란’으로 표기되는 경우와, 그 다음으로 거란사람들 중에서 발해 지배층에 많이 나타났던 사람들의 성씨, 이를테면 ‘高아무개’, ‘大아무개’와 같은 사람들, 끝으로 앞뒤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유민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위의 세 가지 경우 중 첫번째의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두번째와 세번째의 경우를 통해서 거란 국적을 가진 발해유민을 구별해 낼 수 있다.

 우선 여러 사료들 가운데서 발해인으로 이름이 밝혀진 성씨를 종합해 보기로 한다. 물론 성씨가 밝혀진 고아무개나 대아무개만이 발해유민이 아닐 것임은 분명하다. 오히려 성씨가 밝혀져 있지 않은 이를테면, 고아무개나 대아무개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몇 십·몇 백·몇 천의 사람들도 이름이 밝혀져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발해인이었기 때문이다. 金毓黻의≪渤海國志長編≫에 의거하여 발해인의 성씨를 종합하면 다음의<표 1>과 같다.167)

宗 臣 諸 臣 士 庶 遺 裔























기타

1명씩
49

























32

8

13

2

6

8

3

2

3

2

2

1


1

2

2



2


2


32


1











1


1



1

2


1



3

41

23

14

5

11

5

1


1





2




1



1



30

90

56

22

18

13

11

9

3

3

3

2

2

2

2

2

2

2

2

2

2

2

2


65

49 132 8 137 317

<표 1>발해 지배층 성씨 분포표

 표에 나타난 사람들의 성씨 분포를 보면 大氏가 90명, 高氏가 56명, 王氏가 22명, 李氏가 18명, 張氏가 13명의 순이다. 이것은 발해와 고구려 왕족이었던 대씨와 고씨가 발해 왕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씨 다음으로 나타난 王·李·張·烏·楊氏들도 발해사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 발해의 지배층이었다.

 앞의<표 1>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료는 중국측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옛날 그(발해) 왕은 姓이 大氏였고, 右(貴)姓으로는 高·張·楊·竇·烏·李氏의 몇 종류에 불과했으며, 部曲·奴婢·無姓者는 모두 그들 주인의 姓을 따랐다(洪皓,≪松漠紀聞≫권 上, 渤海).

 이것은 대부분 앞의 성씨분포표와 일치하는데, 단지 竇氏가 분포표에서 1 명도 없다는 것이 예외라 하겠다. 또한 위의 여섯 개의 右姓(貴族姓) 외에 발해의 庶姓으로 49개의 성씨가 있었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다.

賀·王·任·馬·馮·呂·裴·崔·已·慕·郭·木·史·辛·解·趙·劉·朱·衛·吳·洪·林·申·夏·梁·羅·文·安·朴·胥·茹·卯·門·隱·周·列·公·多·聿·受·智·壹·怱·古·阿·達·冒·謁·渤海(金毓黻,≪渤海國志長編≫권 16, 族俗考 3).

 이들 성씨는 앞의 성씨분포표에서 대부분 2명 내지 1명씩 있었던 사람들로서, 김육불은 이들을 모두 庶姓이라 하였으나 오히려 우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7세기말에서 10세기 초엽에 성씨를 가졌던 사람들은 발해에서 비교적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66)李鍾明,<高麗에 來投한 渤海人考>(≪白山學報≫ 4, 1968).

權兌遠,<高麗初期 社會에 미친 歸化人의 影響에 관한 考察>(≪忠南大 人文科學論文集≫19, 1981).

金昌謙,<後三國 統一期 太祖 王建의 浿西豪族과 渤海遺民에 대한 政策硏究>(≪成大史林≫4, 1987).

朴玉杰,<高麗時代의 渤海人과 그 後裔>(≪退村閔丙河敎授停年紀念 史學論叢≫, 1988).
167)金毓黻의≪渤海國志長編≫ 宗臣·諸臣·士庶·遺裔列傳에 의거하여 작성하였으며 위의 釋은 승려로서 俗姓은 알 수 없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