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종 원년의 전시과-시정전시과-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관직에 복무하거나 職役을 부담하는 자들에 대한 반대급부로 토지를 주는「전시과」라는 제도가 있었다. 이에 대해≪高麗史≫食貨志 田制條의 序에서는 “墾田數를 종합하고 肥塉을 나누어 문무백관으로부터 府兵·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고 또 樵採地도 주었으므로 전시과라 불렀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전시과의「田」은 곡물을 생산하는 田土를 뜻하고,「柴」는 땔감을 채취하는 산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전시를 받을 수 있는 인물 내지는 계층이 매우 포괄적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전시과는 고려시대 토지분급제도의0045)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전시과 제도가 처음으로 창설된 것은 경종 원년의 일로,≪高麗史≫에서는 이를 ‘始定職散官各品田柴科’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 이 경종 원년의 전시과를「시정전시과」라 부르고 있다. 이후 이 시정전시과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변개를 거듭하였는 바 목종 원년(998)에 있은 改定(改正田柴科)과 문종 30년(1076)의 更正(更定田柴科) 사실이 주목된다. 그리고 위 전제조 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정전시과를 비롯한 이들 전시과는 문무관료(양반)와 군인·한인 등의 각종 직역 부담자를 주된 지급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兩班 및 軍·閑人田柴科’ 또는 ‘兩班田柴科’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양반전시과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전시도 지급되고 있었다. 5품 이상의 고급 관료에게 주어진 ‘功蔭田柴’라든지, 무산계 소유자에게 지급된 ‘武散階田柴’, 지리업 관계자 및 승려들에게 분급된 ‘別賜田柴’ 등이 바로 그것인데, 현재 이것들을 양반전시과와 구별하여「別定田柴科」로 통칭하고 있다.
0045) | 흔히 田柴科를 고려시대「토지제도」의 근간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토지사유제가 인정되는 한 토지지배의 일차적인 본질은 소유권적 지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수조권의 분급을 기본적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전시과를「토지제도」의 근간이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당시 토지제도의 근간은 어디까지나 토지사유제에 있다고 해야 하며, 전시과는 이를 바탕으로 한 토지분급제 또는 수조지분급제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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