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목종 원년의 전시과-개정전시과-
(1) 전시과 개정의 배경
경종 원년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 즉 관료체제가 채 정비되지 못하여 관료는 물론 아직 관료화되지 못한 비관료집단까지를 흡수해야만 했던 정치적 상황에서 창설된 始定田柴科는 제도 자체의 한계성으로 인해 오랫 동안 존속되기는 어려웠다. 즉 관료체제의 정비와 함께 불가피하게 개정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료체제의 정비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바로 성종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제도적 개혁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성종은 즉위 초년에 중앙의 관제를 정비하여 3省 6部制를 마련하였고, 崔承老의 건의를 받아 들여 전국의 12牧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아울러 향리직제를 개편함으로써 지방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통제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통제를 계기로 나말려초 이래 강력한 지방세력으로 군림하였던 호족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인으로 변모하거나 향리로 격하되는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성종 14년에 단행된 官階制의 일대 개편은 이러한 변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즉 이전까지는 국초에 마련된 재래의 관계와 광종 연간에 중국에서 들어 온 문산계를 병용하였으나, 이 해의 개편을 계기로 문산계가 관인사회의 유일한 공적 질서체계로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재래의 관계는 鄕職化되어 관인과 구별되는 특정의 부류에게 영예적인 칭호로 주어졌다.0064) 따라서 재래의 관계만을 소유하고 있던 지방의 호족들이 이전의 지위에 못지 않는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중앙의 관인으로 진출하여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향리로 전락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해에는 지방 관제를 대폭 재정비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한층 강화시켰다. 종래의 12牧을 12軍으로 개편하여 節度使를 두었으며, 거의 전국에 걸쳐 都團練使·團練使·刺史·都護府使·防禦使 등의 外官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중앙의 관제도 재정비하였다고 하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목종 원년의 전시과 규정에 그 개편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주목된다.0065)
이와 같이 성종대는 내외 관제의 개편과 함께 지방세력, 즉 호족(향리)에 대한 강한 통제가 이루어짐으로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의 정비가 상당한 정도로 진척된 시기였다. 그러므로 호족이나 공신들이 개국 또는 후삼국의 통일에 협력한 공으로 얻은 재래의 관계만으로 관인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한 종래의 시정전시과는 더 이상 관인에 대한 보수체계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이를 대신할 새로운 보수체계의 출현이 요구되었고, 그 요구는 결국 목종 원년의 전시과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에 대해≪高麗史≫食貨志에는 “文武兩班 및 軍人田柴科를 개정하였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이 때 개정된 전시과를 흔히「개정전시과」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