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시정전시과의 한계와 의의
시정전시과가 지닌 내용상의 특징은 대체로 위에서 살펴 본 정도인데, 이를 종합해 볼 때 그것은 아직 미숙한 수준의 토지분급제도였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의 하나는 전시과의 지급기준이 관직과 관계의 이중체계에 입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물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복제를 전시과의 기본 틀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위 관계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관직에 종사하는 다른 계층보다도 많은 전시를 받는 특수계층으로서의 자삼층을 등장시켰는데, 이 자삼층의 존재는 관료체제의 하나인 공복제의 미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토지분급체계로서의 전시과의 미숙성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시정전시과의 미숙성은 관품과 함께 인품을 그 지급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인품을 기준으로 각 복색 내의 품위를 구별함으로써 관계 내지 관직의 고하가 급여되는 전시의 다과와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역으로 수급한 전시의 다과가 반드시 관계 또는 관직의 상하를 의미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 결과<표 1>과 같이 결코 체계적이라고 할 수 없는 병렬적 분급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토지분급제도로서의 시정전시과가 지니는 이 같은 미숙성은 기본적으로 관료체제의 미비에 그 원인이 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광종대에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정치로 국초 이래의 호족 및 공신세력이 많이 약화되고 새로운 관료집단이 출현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는 하였지만, 경종의 즉위를 계기로 기왕의 호족 및 공신세력이 다시 등장하면서 양자 간에는 적지 않은 갈등이 빚어졌다. 이처럼 경종 초까지만 해도 아직 관료화되지 못한 채 정치에 관여하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시과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제정되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 두 정치세력의 이익을 모두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미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공복제가 주목되었고, 마침내 전시과의 기본 틀을 짜는 데 채택되었다. 즉 관계를 기준으로 설정된 자삼층에는 국초 이래 쓰여 온 고위 관계만을 소유하고 관직이 없는 호족과 공신세력을, 관직을 기준으로 구분된 단·비·녹삼층에는 광종대 이후의 관료로 대표되는 관료집단을 편입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시정전시과는 이미 관료화된 관료집단과 아직 그렇지 못한 호족·공신 등의 비관료집단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로 등장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시정전시과의 개정을 촉진시켰고, 드디어 목종 원년에 이르러 전혀 다른 분급체계를 갖춘 소위 개정전시과가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정전시과가 지니는 다음과 같은 의의는 간과될 수 없다. 우선 이것은 모든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보수·대우 규정으로서 이의 제정을 계기로 그들을 하나의 통치체제 내에 흡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다시 말해 토지분급제도 자체로서는 아직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미비점이 있으나, 바로 이 때문에 성격을 달리하는 두 지배층(관료집단과 비관료집단)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유일한 기준은 아니었지만 관직이 중요한 분급기준으로 활용됨으로써 후일 관직을 중심으로 하는 분급체제를 만드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된다. 전시과가 인품과 공로만을 보아 토지를 지급한 役分田보다 일보 전진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金載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