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시과의 성격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시과의 과전은 기본적으로 관료·군인·한인 등이 관직이나 특정 직역에의 종사를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반대급부로 주어진 것이었으나, 이와 함께 그들의 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물적 기반이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과전이 처·자손에게 전수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성격에 기인하는데, 소위 전정연립과 구분전의 지급이 이의 법적 규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전은 세록으로 관념되기도 하였으며, 무기 영대적인 영업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전시과의 과전은 강한 세전성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전시과는 蔭敘制와 함께 지배신분층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한 양대 축이었다고 하겠다. 즉 당시의 지배신분층은 과전의 세전을 통해 경제적인 기반을 확고히 함으로써 이산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음서를 통해 대를 이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과전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지배층의 이산, 곧 신분질서의 혼란을 예방함으로써 신분제 사회를 지속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한편 전시과는 분급토지에 대한 수급자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으며, 개정을 거듭하면서 그 분급대상이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지급액 또한 크게 감소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전시과는 군·현 규모, 최소한 몇 개의 촌락을 합한 규모로 지급되어 전조는 물론 공부와 요역의 수취권까지 인정한 녹읍제를 극복하고 출현하였으며, 시정전시과에서 과전법에 이르는 동안 그 분급대상과 지급액은 계속 감축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분급대상의 경우 갱정전시과의 성립과 함께 개정전시과의 대상이었던 散職이 제외되었으며, 다시 과전법으로 바뀌면서 이속과 군인이 탈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급액의 경우 시정전시과(紫衫層)→개정전시과→갱정전시과로 변천하면서 전지의 평균액이 각각 68결→58결→53결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에 들어 와서도 계속되었다. 職田制의 실시와 함께 지급대상은 현직의 관료로만 국한되었으며, 급기야는 토지분급제 자체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직전제의 시행으로 수신전·휼양전이 회수되면서 분급토지(과전)는 세전성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변화는 중앙집권체제의 정비 내지 왕권의 강화와 흐름을 같이 한다. 즉 그 변화의 이면에는 강화된 왕권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내외 관제의 정비가 수반되었던 것이다. 광종에 의한 일련의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전시과가 제정될 수 있었고, 성종 연간에 중앙과 지방의 관제가 정비됨으로써 개정전시과가 출현할 수 있었으며, 문종 30년의 갱정전시과 또한 같은 해에 단행된 관제의 개편을 토대로 마련되었다. 사실 국왕의 입장에서는 녹봉 외에 과전을 추가로 지급하는 이중적인 보수체계, 또는 실제로 관직이나 직역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신분 내지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과전을 수여하는 수조지 분급제 자체가 바람직하였을 리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왕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의 지급대상과 액수를 감축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제도 자체를 폐지시키고자 하였을 것이다. 전시과는 바로 이러한 성격을 지닌 수조지 분급제였다. 요컨대 전시과는 신라 말의 녹읍제에서 조선 초의 직전제 폐지에 이르기까지 분급토지가 양적으로 축소되고 그에 대한 수급자의 지배력이 질적으로 약화되는 과정, 말하자면 중앙집권체제 및 왕권이 강화되는 과정의 중간 단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金載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