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Ⅰ. 전시과 체제2. 공전·사전과 민전2) 민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1. 전시과 제도
          • 1) 건국 직후의 토지지배관계와 역분전의 설치
            • (1) 토지지배의 내용
            • (2) 식읍과 녹읍
            • (3) 토지(수조지) 사급과 역분전의 설치
          • 2) 경종 원년의 전시과-시정전시과-
            • (1) 전시과 제정의 배경
            • (2) 시정전시과의 내용
            • (3) 시정전시과의 한계와 의의
          • 3) 목종 원년의 전시과-개정전시과-
            • (1) 전시과 개정의 배경
            • (2) 개정전시과의 내용과 특징
          • 4) 문종 30년의 전시과-갱정전시과-
            • (1) 전시과 갱정의 과정
            • (2) 갱정전시과의 내용과 특징
          • 5) 별정전시과
            • (1) 무산계전시
            • (2) 별사전시
          • 6) 전시과의 운영과 그 성격
            • (1) 전시과 토지의 실체
            • (2) 전시과의 운영
            • (3) 전시과의 성격
          • 7) 녹봉제
            • (1) 녹봉제의 성립과정
            • (2) 녹봉제의 정비와 운영 및 그 성격
        • 2. 공전·사전과 민전
          • 1) 공전과 사전
            • (1) 공전·사전의 개념과 그 변천
            • (2) 공전의 세 유형과 공전·사전의 지목
            • (3) 공전·사전의 형성과정과 경영형태
            • (4) 공전·사전의 수조율
          • 2) 민전
            • (1) 민전의 소유자와 존재 시기 및 지역
            • (2) 민전의 사유지적 성격-민전 소유권의 내용-
            • (3) 민전의 경영형태와 조세 수취
            • (4) 민전의 국가경제적 기능과 그 규모
        • 3. 공전의 여러 유형
          • 1) 장·처와 내장전
            • (1) 장과 처
            • (2) 내장전
          • 2) 공해전
            • (1) 공해전 분급의 내용
            • (2) 공해전의 성격과 그 경영
          • 3) 둔전과 학전·적전
            • (1) 둔전
            • (2) 학전과 적전
        • 4. 사전의 여러 유형
          • 1) 양반과전
            • (1) 양반과전의 실체
            • (2) 양반과전의 운영과 지배의 내용
          • 2) 공음전
          • 3) 한인전
          • 4) 구분전
          • 5) 향리전
          • 6) 군인전
          • 7) 궁원전
          • 8) 사원전
            • (1) 사원전의 형성과 그 성격
            • (2) 사원의 농지경영과 경작농민
            • (3) 고려 후기 사원의 전토확대와 문제
            • (4) 사원경제 확대에 대한 대책
          • 9) 식읍 및 기타의 사전
            • (1) 식읍
            • (2) 투화전
            • (3) 등과전
        • 5. 전시과 체제 하의 토지지배관계에 수반된 몇 가지 문제
          • 1) 토지국유제설의 문제
            • (1) 토지국유제설의 대두
            • (2) 화전일랑 등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 (3) 유물사관 학자들의 토지국유제설에 대한 비판
            • (4) 왕토사상의 실상
          • 2) 균전제의 시행여부에 관한 문제
            • (1) 균전제설의 대두
            • (2) 균전제설에 대한 비판
          • 3) 전결제
            • (1) 신라의 결부제
            • (2) 고려 전기의 결부제
            • (3) 고려 후기의 결부제
            • (4) 1결의 실적
          • 4) 농업생산력의 발전문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1. 조세
          • 1) 조세의 개념
          • 2) 수조율과 조세의 감면
            • (1) 사전조
            • (2) 민전조와 공전조
            • (3) 조세(민전조)의 감면
          • 3) 수조물품과 국가 재정
            • (1) 수조물품
            • (2) 조세와 국가재정
        • 2. 공부
          • 1) 공부의 개념
          • 2) 품목과 수취방식
          • 3) 수취기준
          • 4) 수취구조
        • 3. 요역
          • 1) 요역의 용례
          • 2) 요역의 내용
          • 3) 부과의 대상
          • 4) 수취체제
        • 4. 잡세
        • 5. 조운과 조창
          • 1) 포 중심의 조운
          • 2) 조창의 설치와 운영
            • (1) 조창의 설치
            • (2) 조창의 운영
          • 3) 조운제의 동요와 세곡의 육운
            • (1) 조운제의 동요
            • (2) 세곡의 육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 수공업
          • 1) 관청 수공업
            • (1) 관청 수공업의 관리체계
            • (2) 관청 수공업의 내부 분업
            • (3) 관청 수공업자들의 존재형태
          • 2) 소 수공업
            • (1) 소 수공업의 형성
            • (2) 수공업 소의 구조
            • (3) 수공업 소민들의 존재형태
          • 3) 민간 수공업
            • (1) 민간 수공업의 분업과 관청 수공업
            • (2) 농촌의 가내 수공업
            • (3) 민간 수공업자의 사회·경제적 존재형태
          • 4) 사원 수공업
        • 2. 상업과 화폐
          • 1) 국내상업
            • (1) 도시상업
            • (2) 지방상업
          • 2) 대외무역
            • (1) 송과의 무역
            • (2) 거란·요와의 무역
            • (3) 여진·금과의 무역
            • (4) 일본과의 무역
            • (5) 아라비아와의 무역
          • 3) 화폐 및 차대법
            • (1) 화폐
            • (2) 차대법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민전의 경영형태와 조세 수취

민전은 민의 사유지일 뿐 아니라 그의 경작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흔히 민전은 所耕田·耕作田·執耕田·耕田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0418) 이러한 민전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경영되었다. 자기경영과 전호제 경영이 그것이다. 자기경영은 파종에서 수확까지의 전 생산과정에 민전주가 직접 참여하는 대신 생산물을 모두 자기가 차지하는 경작형태를 말하는데, 민전주와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경작하는 순수 자기경영과 소유 노비나 雇工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경작하는 직영형 자기경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반면 전호제 경영은 자기의 토지를 남에게 빌려 주어 경작시키고 그 대가로 생산량의 일정한 비율을 수취하는 경영형태를 말하는데, 소작제라고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경영형태 중에서 자기경영, 그 가운데서도 순수 자기경영이 민전 경영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정 농민이 민전의 주된 소유계층이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백정 농민이 소유한 민전이 민전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비록 예외적인 경우는 있더라도 이들 백정 농민이 소유한 민전은 대부분 소규모에 불과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소유자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도 충분히 경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 모든 민전의 소유 규모가 소규모였던 것은 아니다. 민전 중에는 중앙의 양반관료를 비롯하여 富民·豪右·民長 등으로 불리었던 지방 유력자들의 토지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지방 관아의 재정이 곤궁할 때 부면에게서 도움을 받은 사실을0419) 고려하면 이들의 소유 토지는 비교적 규모가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규모가 큰 유력자들의 민전은 가족노동력만으로 경작될 수 없었으므로 자연히 소유 노비나 고공의 노동력을 동원한 직영형 자기경영을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관직에 나가는 것을 본분으로 하고 있던 양반 관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金富儀의 家僮이 채마밭을 경작하다가 銅印을 주웠다는 일화나,0420) 이규보의 가노가 정원의 풀베기에 자주 나섰다는 이야기,0421) 李需의 노비가 토란을 재배하였던 일0422) 등은 노비가 주인의 민전을 경작한 적극적인 예는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을 시사하는 좋은 사례이다. 그리고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는 살아 갈 수 없어 남의 집 고용이 되었다”는 충렬왕 때의 기사에서0423)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공을 통해 민전을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 기록이 고려 후기의 실정을 말해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민전의「傭作」은 그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부자집의 고용살이를 해서 자그마한 토지를 마련했다는 大城의 사례에서 보듯이 고공의 존재는 이미 신라 때부터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소규모로 존재할 대부분의 민전은 순수자기경영의 형태로 경작되었으며, 가족노동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규모의 일부 민전은 노비나 고공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경작되었지만, 가족 및 소유 노비와 고공의 노동력만으로는 도저히 경작할 수 없는 대규모의 민전도 적지 않았다. 중앙 귀족층과 지방 토호층의 민전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즉 이들은 이미 신라 말부터 대규모의 토지를 소유하여 왔고, 소유 규모에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았으므로 개간이나 매득 등을 통해 자신의 민전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었다. 특히 중기 이후로는 국가 통치력의 균열에 편승, 불법적인 탈점까지 자행하여 소위 대규모의 농장을 형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생계 유지가 곤란할 정도의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경작함으로써 오히려 가족노동력이 남아 도는 백정 농민도 적지 않았고, 토지가 없는 농민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약한 많은 백정농민들은 그나마 소유하던 소규모의 민전조차 처분함으로써 점차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전락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각종의 재해와 부채가 이를 더욱 촉진시켰을 것이다. 단주에서 임춘이 사려던 토지도 조세에 시달리던 농민의 민전이었으며, 마필을 구입하기 위해 팔았던 閑散軍의 토지 또한 이들 농민의 민전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분의 토지를 가진 대토지소유자(귀족 및 토호층)가 여유 노동력을 가진 백정 농민에게 소작을 주는 전호제 경영이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처럼 전호제 경영은 대토지소유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귀족 및 토호층에 의한 대토지사유가 급속히 진전된 신라 하대부터 전호제 경영 또한 널리 보급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소위 田莊이라 불리는 대토지는 주로 知莊의 관리 하에 소작제로 경영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0424) 고려 전기에 와서도 민전의 전호제 경영은 계속되었으며, 국가의 공인을 받기까지 하였다. 사전(민전) 개간지에서의 분반수취를 규정하고 있는 광종 24년과 예종 6년의 판문이0425) 이를 잘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국·공유지에도 전호제 경영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외거노비에게 내장전을 경작시키고 납세케 했다는 태조의 조치가0426) 그 실례이다. 따라서 전호제 경영은 신라 말 이래 계속 확대되는 추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대규모의 농장이 발달하였던 중기 이후에 민전의 전호제 경영은 더욱 일반화되었다.0427) 고려 후기의 이러한 실정을 정도전은 “힘이 센 자들은 광대하게 토지를 소유하였고 약한 자들은 그들에게 빌붙어 토지를 차경하고 소출의 반을 나누었다”고0428) 설명하고 있다. 한편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의 전호는 대부분 일반 백정농민이었겠지만, 외거노비인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金永寬의 가노로서 농경에 힘써 치부하였다는 平亮은0429) 주인인 김영관이나 타인의 민전을 경작하던 전호였을 것이며,0430) 이규보의 別業인 四可齋에 거주하던 노비들도0431) 주인의 별업을 佃作하던 외거노비로 판단된다. 이 밖에도 당시에는 개경 근처에 별업을 가지고 있던 양반관료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별업 또한 이규보의 경우와 같이 자신의 외거노비를 전호로 하여 운영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0432) 그리고 고려 전기에 이들 전호 중에는 자신의 민전이 전혀 없는 농민도 더러 있었겠으나, 적으나마 자기 소유의 민전을 가지고 부족한 자작지를 보충하기 위해 타인의 민전을 소작하는 영세한 자소작 농민이 보다 많았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433) 물론 농장의 발달로 대토지소유가 확대되던 고려 후기에는 많은 자소작 농민들이 자신의 민전을 잃고 토지가 없는 농민으로 전락하면서 순수 소작농이 증가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의 경우 전호는 당연히 민전주에게 소정의 소작료를 내야 했다. 私田租라 부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0434) 그리고 그 소작료는 “陳田을 개간한 자는 사전인 경우 첫 해에는 수확의 전부를 차지하고 2년 째부터 비로소 田主와 分半한다”고 규정한 광종 24년의 판문에서 알 수 있듯이「분반」즉 생산량의 1/2이었다. 여기서의 사전이 주로 사유지로서의 민전을 가리키고 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개간된 민전은 일단 개간자를 전호로 하는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었고 그 소작료는 1/2이었다고 이해되는데, 개간지만이 아니라 起耕地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호제에 의해 경작되는 민전에서의 수조율(소작료)은 고려 초기부터 1/2이었다. 그러나「사전조 1/2」이라는 원칙이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마련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미 신라 하대부터 귀족 및 호족들에 의한 대토지소유가 발달하였고 이와 함께 전호제 경영 또한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생산량의 1/2을 소작료로 내는 관행 역시 존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광종 24년의 판문은 그 이전부터 있어 온「분반수취」의 관행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재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광종 이후에도 이러한 관행은 계속되었다. 역시 사전(민전) 개간 때의 수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지만 “3년 이상된 陳田을 개간할 경우 2년 동안은 수확의 전부를 개간자에게 주고 3년 째부터는 田主와 分半한다”고 규정한 예종 6년의 판문에서도 민전에서의 분반수취 원칙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정도전의 설명이나, “前朝(고려)의 폐단이 조선 초까지 남아 있어 품관·향리들이 광대하게 토지를 차지하고 유망민을 불러 모아 병작반수하고 있다”고 개탄한 河崙의 啓文0435) 등을 고려할 때 고려 말까지도「사전조 1/2」의 원칙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호제로 경영되는 민전에서의 분반수취, 즉 사전조 1/2의 원칙은 신라 말 이래 고려 전시기에 걸쳐 존속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소작료(사전조)는 토지이용자인 소작인이 빌린 토지의 기능(土地用益)의 대가로서 토지소유자인 민전주에게 지불하는 이른바「地代」에 해당하는 것이었다.0436)

한편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권력은 동양적 왕토사상을 토대로 모든 민전 위에 수조권을 설정하고 소정의 조세를 수취하였다. 국가가 거두는 이 조세는 경영형태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민전의 소유자인 민전주가 부담하였는데, 그 수조율은 고려 초기부터 1/10이었다. 이른바「什一租法」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말에 사전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던 조준의 상서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조준에 의하면, 태조는 즉위 직후 궁예의 수취가 너무 가혹하였음을 개탄하고 십일조법에 따라 토지(민전) 1負當 3升의 租를 거두도록 하였다는 것이다.0437) 뿐만 아니라 고려의 取民之制는 孟子가 말하는 십일조법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를 시행한 지가 이미 400년이나 넘었다고 한 이제현의 지적도0438) 민전에서의 1/10 수취가 이미 고려 초부터 시행되었음을 말해 준다. 태조가 천명한 십일조법은 중기를 거쳐 말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대원칙으로 줄곧 유지되었다. “백성에 대한 수취를 가볍게 하여 비록 공전에서 1/10을 거두어도 국가 재정이 넉넉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고종 12년의 이규보의<大倉泥庫上樑文>과,0439) “우리 나라의 전제는 한나라의 限田制를 받아 들여 10분의 1만을 과세하였을 뿐이다”고 밝히고 있는 공민왕 11년의 백문보의 箚子0440) 등에서도 십일조법이 실제로 시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과전법의 전조 수취규정 또한 십일조법에 입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전에 대한 국가의 수조율은 태조 이래 말기까지 줄곧 1/10이었다고 이해된다. 국가수조지에서 뿐 아니라 양반전·군인전·향리전 등으로 불리는 개인수조지인 민전에서의 수조율도 1/10이었다. 개인수조지란 본래 국가수조지였던 것이 전시과 규정에 따라 개인에게 분급된 것에 불과하므로 양자 사이에 수조율의 차이가 생길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십일조는「地稅」의 개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와는 전혀 달리 민전에 대한 국가의 수조율이 1/4이었다고 하는 견해가0441) 일찍이 제기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이러한 주장이 근거로 삼고 있는 유일한 사료는 “公田에서의 조세는 1/4을 거두는데 水田은 상등전 1결에 조 2석 11두 2승 5합 5작, 중등전 1결에 조 2석 11두 2승 5합, 하등전 1결에 조 1석 11두 2승 5합으로 한다”고 한 성종 11년의 판문으로,0442) 그 논지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즉 첫째, 위 판문에 나오는 공전의 실체는 국·공유지가 아니라 민전이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국·공유지는 직영제로 경영되었으므로 특별히 수조율을 설정할 필요가 없으며, 전호제로 경작되었던 일부 국·공유지에서는 사유지에서와 같이 1/2의 수취가 이루어졌으므로 1/4의 수조율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은 3과공전으로 분류되는 민전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따라서 고려 초기 민전의 수조율을 1/10로 기술하고 있는 조준 상서문의 내용은 믿기 어렵다. 당시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하등전의 생산량은 위 판문에 의거할 때 수전을 기준으로 약 7석에 불과한데, 1결의 생산량을 20석으로 상정하고 십일조법에 따라 1負에서 3升을 내도록 한 태조의 정책은 기만적인 가식으로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려 초기의 토지 1결당 생산량은 도저히 20석일 수 없으므로 태조가 표방했다는 십일조법은 가공적·관념적인 것에 불과하며, 오히려 결당 생산량을 7석으로 설정하고「四分取一法」을 적용하여 결당 약 2석을 수취토록 한 성종의 정책이 현실적인 것이었다. 셋째, 그러다가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1/4에서 1/10로 낮아졌는데, 이는 국가의 재정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조처였다. 즉 농장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많은 농민이 농장에 투탁하였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세율을 낮출 필요가 있었으며, 점차 증대해 온 토지의 생산력이 이러한 조치를 가능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첫째, 고려시대의 국·공유지는 직영제로 경영되기도 하고 전호제로 경영되기도 하였는데, 전호제로 경영된 것의 규모가 더 크며, 직영제 경영이 점차 전호제 경영으로 바뀌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0443) 뿐만 아니라 광종 24년의 개간 장려 판문에 전호제로 경작되는 사전(민전)의 소작료는「분반」으로 명기하고 있으면서도 공전(국·공유지)의 소작료는 “법에 따라 수조한다”고만0444) 기술하고 있는 바, 이것은 국·공유지에서의 소작료(수조율)가 분반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호제로 경영되는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 설정은 필요한 것이었다. 다음으로 둘째,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조준 외에 이제현과 이규보도 고려 초·중기에 십일조법이 시행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고려 초기에도 토지 1결의 생산량을 대략 20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어0445) 있는 이상, 민전에 대한 1/10 수취는 고려 초부터 실재하였으며 또 현실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셋째, 원 간섭기를 전후하여 1/4에서 1/10로의 세율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서 그러한 수조율 인하가 과연 가능하였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시기는 권세가들의 토지 겸병과 조세 포탈로 인해 창고가 비고 관리의 녹봉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는 등 만성적인 재정 궁핍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실정에서 국가수입의 주 원천인 조세를 인하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전에서의 수조율은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줄곧 1/10이었다고 생각되며, 소위 성종 11년 관문에 나오는 ‘公田租 四分取一’은 민전 외에 공전으로 불릴 수 있는 또 다른 토지, 즉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이해된다.0446)

0418)有井智德, 앞의 글 및 李成茂, 앞의 글 참조.
0419)≪高麗圖經≫권 3, 城邑.
0420)≪高麗史≫권 97, 列傳 10, 金富佾 附 富儀.
0421)≪東國李相國集≫권 23, 記, 草堂理小園記.
0422)李奎報,≪東國李相國集≫後集 권 7, 古律詩, 次韻李侍郎見和五首子以七首答之.
0423)≪高麗史≫권 31, 世家 31, 충렬왕 20년 7월 을해.
0424)姜晋哲, 앞의 책, 15∼16쪽.

李炳熙,<高麗前期 寺院田의 分給과 經營>(≪韓國史論≫18, 1988).
0425)≪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0426)≪高麗史≫권 93, 列傳 6, 崔承老.
0427)이에 대해서는<農莊의 發達과 그 構造>(≪한국사≫19, 국사편찬위원회, 1994 간행예정) 참조.
0428)鄭道傳,≪三峯集≫권 7, 朝鮮經國典 上, 賦典 經理.
0429)≪高麗史≫권 20, 世家 20, 명종 18년 5월 계축.
0430)姜音哲, 앞의 책, 219∼220쪽.

洪承基,≪高麗貴族社會와 奴婢≫(一潮閣, 1983), 103∼106쪽.
0431)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23, 記, 四可齋記.
0432)洪承基, 앞의 책, 96∼102쪽.
0433)濱中昇,<高麗前期の小作制とその條件>(≪歷史學硏究≫507, 1982).
0434)民田(私有地)에서의 小作料을「租」라 칭한 예는 “處干은 타인의 토지를 경작하여 租는 그 주인에게 내고 庸과 調는 官에 바치니 즉 佃戶이다”고 하는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高麗史≫권 28, 世家 28, 충렬왕 4년 7월 을유).
0435)≪太宗實錄≫권 12, 태종 6년 11월 기묘.
0436)旗田巍, 앞의 글(1968b).

姜晋哲,<高麗前期의 ‘地代’에 대하여>(≪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0437)≪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祿科田.
0438)李齊賢,≪益齋集≫권 9 下, 策問.
0439)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9, 雜著, 乙酉年大倉泥庫上樑文.
0440)≪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0441)姜晋哲,<高麗前期의 公田·私田과 그 差率收租에 대하여>(≪歷史學報≫29, 1965).

―――, 앞의 책, 389∼423쪽.
0442)≪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0443)이 책 제1편 2장 1절<공전과 사전>참조.
0444)≪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0445)金容燮,<高麗前期의 田品制>(≪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金載名,<高麗時代 什一租에 관한 一考察>(≪淸溪史學≫2, 1985).

魏恩淑,<나말려초 농업생산력 발전과 그 주도세력>(≪釜大史學≫9, 1985).
0446)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