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공해전의 성격과 그 경영
공해전의 성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고 이해되고 있다. 즉 중앙과 지방관청의 공해전이 국·공유지였음에 비하여 장택과 궁원의 공해전은 내장택 및 궁원 소속의 장·처, 즉 민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다는 것이다.0503) 그런데 관청공해전이 국·공유지였다는 것을 명확히 말해 주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徐兢의≪高麗圖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이러한 관청공해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A. 또 3京·4府·8牧이 있고, 防禦郡이 118, 縣과 鎭은 390, 섬이 3,700인데, 모두 守令과 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官에 있는 자가 공전만으로 경비에 부족하면 또한 富民에게서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高麗圖經≫권 3, 城邑, 郡邑).
이에 의하면 지방관청에는 공전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이 공전의 수입이 관청의 경비에 사용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여기서의 공전은 곧 공해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서긍은 이 공전을 宋의 공전과 같은 개념으로 썼던 것으로 생각되는데,0504) 송의 공전은 관전의 한 종목으로서 민전과는 아주 구별되는 국가 직속의 토지였다. 따라서 사료 A에 나오는 공전(공해전)의 실체는 송의 관전과 같은 토지, 즉 국·공유지였다고 이해된다. 이러한 관청공해전은「신라장적」에 나오는 官謨田·畓과 麻田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국가 또는 왕실에 소속되었던 관모전·답과 마전이,0505) 나말려초를 거치면서 고려의 국·공유지로 편성되었고, 그 위에 각 관청의 공해전이 설정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0506) 따라서 관청공해전은 국가 또는 각 관청의 소유지였으며, 공전을 세 유형으로 나눌 때 2과공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0507) 바로 이러한 관청공해전이 공해전의 본질적인 성격, 즉 공해전의 전형(협의의 공해전)이었던 것이다.
반면 장택 및 궁원의 공해전은 이와는 성격이 자못 달랐던 것으로 생각된다. 장택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지만 사실 궁원에 공해전이 지급되었다는 것 자체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하였듯이 궁원에 공해전이 분급되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는 아마도 장택은 물론 궁원도 일종의 국가 기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궁원에 소속된 토지는 크게 사유지로서의 궁원전과 수조지인 장·처전이 있었다고 한다.0508) 그러므로 궁원공해전은 궁원전과 장·처전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는데, 궁원전은 2과공전에 대비되는 사유지로서의 사전이었으므로 결국 장·처전을 궁원공해전에 해당하는 토지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공해전이란 명목이 붙어 있는 이상 궁원공해전의 실체는 공전의 범주 안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데, 장·처전은 바로 3과공전으로 분류되는 민전과 등질의 토지였다고 이해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이유에서 장택공해전도 내장택에 소속된 장·처전이었다고 해석된다.0509) 그러나 이러한 장택 및 궁원의 공해전은 공해전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난 변질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공해전의 의미를 넓게 해석할 때에나 공해전에 포함될 수 있다고 하겠다(광의의 공해전).
이렇게 장택 및 궁원공해전은 장·처전 위에 설정된 수조지였으므로 대부분 그 소유주인 莊·處民에 의해 경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법으로 이를 경영하였는지는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으며, 전조로서 생산량의 1/10만을 수취하였으리라고 판단된다.0510) 그러나 관청공해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즉 그 본질이 국·공유지였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관이 주체가 되어 경영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관청공해전을 포함한 국·공유지를 경영하는 방식으로는 佃戶制와 直營制의 두 가지가 있었다. 전호제는 소유 주체가 소유지를 타인(일반 농민이나 외거노비)에게 소작시키고 소정의 租(소작료)를 수취하는 방식이며, 직영제는 소속 노비나 주변의 농민을 동원하여 소유지를 경영하고 그 수확을 모두 확보하는 경영형태이다. 이와 같은 관청공해전의 경영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제시된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전기에 직영제에 의존하던 관청공해전의 경영이 예종 때를 기점으로 점차 전호제 형태로 전환되어 갔다는 것이고,0511) 다른 하나는 후기는 물론 전기에도 관청공해전은 주로 전호제로 경영되었다는 주장이다.0512) 양자 사이의 이러한 견해 차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예종 3년의 기사가 주목된다.
B. 근래에 주현의 관원들이 宮院·朝家田만을 ‘사람들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고(令人耕種)’, 軍人田은 비록 비옥한 땅이라도 경작하기를 힘써 권장하지 않고 또 養戶로 하여금 식량을 수송케 하지 않음으로써 군인이 추위에 굶주려 흩어져 버리니, 지금부터는 군인전에 ‘우선적으로’ 佃戶를 정해 주도록 하라(≪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예종 3년 2월 制).
여기에 나오는 朝家田의 범주에 관청공해전도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0513) 지금까지 사료 B는 고려 전기의 궁원전·조가전이 농민의 요역 동원에 의한 직영제로 경영되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료로 활용되었다.0514) 이러한 해석은 대체로 ‘令人耕種’의 구절을 ‘농민의 요역 동원을 통한 직영제 경작’의 의미로 이해한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B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분석해 볼 때 이 구절의 의미는 오히려 전호제 경작을 말해 준다고 생각된다. B에서 군인전이 제대로 경작되지 못한 것은 궁원·조가전에 경작자를 빼앗겼기 때문인데, 이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군인전에 우선적으로 佃戶를 정해 주는’ 조치였다. 그러므로 이 예종 3년의 조치가 있기 전까지 군인전이 제대로 경작되지 못한 이유는 지방관들이 궁원·조가전에 우선적으로 전호를 정해 줌으로써 군인전 경작에 투입될 전호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경작케 한다(令人耕種)’는 구절의「사람(人)」의 실체는 문장의 뒷부분에 나오는「佃戶」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사료 B는 궁원전·조가전과 군인전이 예종대 이전부터 전호제로 경영되었던 사실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0515)
뿐만 아니라 직영제 경영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公須田의 수조 기록이 예종대 이전에 벌써 보이고 있다. 각 도 관·역의 공수전조 중 廩給(운영경비)에 필요한 양을 제외한 나머지를 州倉으로 수송케 한 문종 2년의 판문,0516) 지방 관리의 녹봉을 公須租로 지급토록 한 숙종 6년의 조치0517) 등이 바로 그것이다. 국·공유지로 편성된 관청공해전에서의 수조는 그 곳에서의 전호제 경영을 전제로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관청공해전과 마찬가지로 국·공유지라는 성격을 지닌 內庄田이 이미 태조 때부터 전호제로 경영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나,0518) 공전(국·공유지)에서의 수조 사실을 전하는 광종 24년(973) 및 성종 11년의 판문0519) 등을 고려할 때, 국·공유지의 하나였던 관청공해전 또한 그 설치 초기부터 전호제로 경영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관청공해전에서의 직영제 경영을 전해 주는 기록은 현재까지 거의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신라의 관모전·답과 마전이 촌락 농민들의 요역 동원을 통해 경작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는 만큼0520) 이와 계통을 같이하는 관청공해전의 일부에서 직영제 경영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따라서 공해전이 설치된 직후의 한동안은 직영제가 전호제와 함께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곧 전호제로 바뀌었고, 늦어도 문종대 이전에는 거의 모든 관청공해전이 전호제 경영을 택하였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각 도의 관·역에 공수전조로 불리는 수입이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문종 2년의 판문을 통해 모든 관·역의 공해전이 전호제로 경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관청공해전에서의 이러한 전호제 경영은 고려 중기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고 판단된다. 명종 17년(1187)에 曺元正이 중서성의 공해전조를 탈취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은 사실이나,0521) 공민왕 때 行省의 宣使 嚴淑이 永州와 河陽에 와서 공해전세를 수취한 일,0522) 각 아문에 공해전의 조세를 거두는 수취인이 있었음을 전하는 충목왕 원년(1345)의 整理都監 狀文0523) 등에 보이는 공해전에서의 수조 사실, 즉 공해전의 전호제 경영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호제로 경영되는 관청공해전의 전호는 주로 공해전 주변에 거주하는 백정농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 전호는 소정의 조세(소작료)를 해당 관청에 바쳐야 했다. 그런데 그 수조율이 얼마였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관청공해전 또한 국·공유지에 설정되었으므로 내장전의 경우와 같이 국·공유지에서의 수조율로 이해되고 있는 1/4을0524) 그 수조율로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金載名>
0503) | 姜晋哲, 앞의 책, 236∼24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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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 ≪高麗圖經≫에서 쓰인 공전과 사전이 宋人의 통념에 입각한 宋代 공·사전의 개념과 같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姜晋哲, 앞의 책, 237쪽 참조. |
0505) | 旗田巍,<新羅の村落-正倉院にある新羅村落文書の硏究->(≪歷史學硏究≫226·227, 1958·1959). |
0506) | 姜晋哲, 앞의 책, 238쪽. |
0507) | 旗田巍,<高麗の公田>(≪史學雜誌≫77-4, 1968). |
0508)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I편 3장 1절<장·처와 내장전>및 4장 7절<궁원전>참조. |
0509) | 姜晋哲, 앞의 책, 242∼243쪽. |
0510) | 莊·處田을 포함한 民田의 田租가 1/10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
0511) | 姜晋哲, 앞의 책, 237∼241쪽. |
0512) | 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서울大 國史學科, 1984). |
0513) | 姜晋哲, 앞의 책, 238쪽. |
0514) | 李佑成,<高麗의 永業田>(≪歷史學報≫28, 1965). 姜晋哲, 위의 책, 237∼238쪽. |
0515) | 濱中昇,<高麗田柴科の一考察>(≪東洋學報≫63-1·2, 1981). |
0516)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
0517)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祿俸 外官祿. |
0518) | 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제I편 3장 1절<장·처와 내장전>참조. |
0519)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이 책 제I편 2장 1절<공전과 사전>및 제Ⅱ편 1장<조세>참조. |
0520) | 旗田巍, 앞의 글(1958·1959). 武田幸男,<新羅の村落支配>(≪朝鮮學報≫81, 1976). |
0521) | ≪高麗史≫권 128, 列傳 41, 叛逆 2, 曺元正. |
0522) | ≪高麗史≫권 131, 列傳 44, 叛逆 5, 金鏞. |
0523) | ≪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
0524)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책 제Ⅱ편 1장<조세>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