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려 후기 사원의 전토확대와 문제
사원은 고려 후기에 토지를 크게 확대하였다. 국가가 토지제도의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원은 토지를 확대하는 중요한 세력의 하나였다. 또한 토지의 규모만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를 매개로 하는 농민에 대한 지배도 한층 강화시켜 갔다. 사원이 확대하였던 토지의 계통은 단일하지 않았으며, 또한 확대하는 방법에도 여러 형태가 있었다.
후기에도 국가 내지 국왕이 주도해서 사찰을 건립할 경우 수조지가 지급되는 것이 관례였다. 최씨 무신정권 하에서 禪源社를 강화도에 건립할 때나 충렬왕대에 妙蓮寺를 개경에 창건할 때에도 토지를 지급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충선왕 원년(1309) 壽寧宮을 희사하여 旻天寺로 사액하였는데,0783) 이 경우에는 수녕궁 소속의 토지를 민천사에 그대로 이속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공민왕대 雲巖寺의 경우에는 2,240결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토지를 지급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0784)
사원은 사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토지를 확대해 갈 수 있었는데, 후기의 대표적인 방법이 施納과 開墾이었다. 개간하거나 시납을 받은 경우에 지배하게 되는 토지는 소유지였다. 시납은 개인의 신앙행위의 하나로서 행해지는 것인데, 어느 시기에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토지 분쟁이 심각하였고 또한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토지의 시납이 성행하였다. 고려 후기 특히 원 간섭기에는 사원에 토지를 시납하는 것은 유행이 되다시피 하였다.0785)
이제현은 당시 민인과 국가에 해독을 끼치는 것 가운데 하나로서 사찰에 시납된 토지를 들고 있다.0786)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기의 그러한 사정을 “民田을 시납하는 것이 대대로 증가했다”거나,0787) “田民이 모두 寺社에 들어갔다”고0788) 표현하였다. 때문에 과전법에서는 토지를 사원에 시납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었던 것이다.0789)
사원은 시납에 의해 토지를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간을 통해서도 토지를 확대하였다. 사원도 개간에 적극적일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玄化寺,0790) 王輪寺,0791) 石方寺는0792) 소를 소유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사원이 이처럼 소를 소유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일반 소농민보다는 개간에 있어서 유리하였다.0793)
정부의 적극적인 개간장려와 관련하여 사원이 토지를 개간하는 일도 있었는데, 사패를 받아서 개간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몽고와의 전란 후에는 전국의 전야가 황폐하였는데 황무지의 개간과 관련하여 사원도 최고 지배층과 함께 賜牌田을 분급받았다.0794)
사원이 토지를 확대하는 것은 이와는 달리 당시 성행하고 있는 토지의 奪占兼倂을 통해서도 가능하였다. 특히 사패를 매개로 해서 탈점하였다.0795)
고려 후기에 사찰이 이처럼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농지를 확대하였는데 그 규모는 10만결 이상으로 전 농토의 1/8 정도에 이르렀다.0796)
사원이 소유한 토지는 국가에 대해 전조를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후기에는 면세지가 될 가능성을 수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사원이 비보사원으로 새로이 지정되는 것과 관련하여서 사원의 면세토지는 확대되었다.0797)
사제전과 관련해서도 사원의 면세지는 증대하였다. 사원은 국가의 개간 장려책과 관련하여 閑田을 사패전으로 받았는데, 사패전은 사원이 개간하였기 때문에 사원의 소유지였으며, 또한 국가로부터 사패 형식으로 받은 것이었기 때문에 사원의 수조지였으므로, 결국 사원이 소유권과 수조권을 중첩하여 가지고 있는 토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田民이 모두 寺社에 들어가서 군국의 경비에 지출하기가 어렵다는0798)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
사원의 전토확대와 면세지화로 인해 국가의 재정수입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사원과 국가 사이에 갈등이 생겼으며, 특히 지방관과 충돌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사원은 국가와만 갈등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쟁은 사원과 귀족 사이에서도 심각하였으며0799) 또한 사원 상호간에도 치열하였는데,0800) 이 러한 분쟁은 곧 지배층 상호간의 갈등으로서 계급적 동반자라는 관계가 동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사원의 노비도 격증하였다. 조선 초기에 사원의 노비로서 革去된 수만도 8만을 상회하였는데0801) 이는 고려시기에 노비가 상당한 수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慵齋叢話≫에는 “사찰은 모두 노비를 가지고 있는데 많은 경우에는 천 명에 이른다”고0802) 하였다. 사원의 노비는 국가의 공노비를 지급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개인의 시납에 의해 충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합법적인 방법에 의해서만 사원이 노비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원이 국가의 양민을 冒占하는 수도 있었다. 貞和宮主의 형인 어떤 승려는 桐華寺에 있으면서 양인을 모점하여 노비로 삼았는데 그 노비가 번성하여 천 수백호에 이르렀다고 한다.0803)
후기에 가면서 토지제도가 문란해지고 농민이 동요함으로써 출가하는 자도 더욱 늘어 갔다. 그리하여 승려가 10만을 상회한다거나0804) 민의 3/10에 이른다는0805) 지적이 있었던 것이다.
농지경영, 경작민에 대한 수취를 바탕으로 사원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0806) 도적이나 외적의 약탈 대상이 되는 수가 많았다.
0783) | ≪高麗史≫권 33, 世家 33, 충선왕 원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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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84) | ≪高麗史≫권 89, 列傳 2, 后妃 2, 공민왕 魯國大長公主. |
0785) | 李炳熙, 앞의 책, 23∼25쪽. |
0786) | 李齊賢,<策問>(≪益齋亂藁≫권 9下;≪高麗名賢集≫2, 331∼332쪽). |
0787) | ≪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4월 갑술. |
0788) | ≪世宗實錄≫권 55, 세종 14년 3월 갑자. |
0789)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공양왕 3년 5월. |
0790) | <玄化寺碑>≪朝鮮金石總覽≫上, 241∼247쪽. |
0791) | ≪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고종 18년 11월. |
0792) | ≪高麗史≫권 55, 志 9, 五行 3 신우 10년 4월. |
0793) | 李炳熙, 앞의 책, 27∼29쪽. |
0794)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
0795)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및 권 84, 志 38, 刑法 1, 職制 충렬왕 24년·충선왕 즉위년 정월. |
0796) | 姜晋哲, 앞의 책, 142쪽. |
0797) | ≪太宗實錄≫권 3, 태종 2년 4월 갑술. |
0798) | ≪世宗實錄≫권 55, 세종 14년 3월 갑자. |
0799)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經理 충렬왕 11년 3월 및 권 84, 志 33, 刑法 1, 職制 충렬왕 24년·충선왕 즉위년 정월 및 권 132, 列傳 45, 叛逆 6, 辛旽. |
0800) | 대표적인 사원으로는 瑩原寺·萬義寺·雲巖寺가 있다(李炳熙, 앞의 책, 41∼43쪽). |
0801) | ≪太宗實錄≫권 30, 태종 15년 8월 계사. |
0802) | 成 俔,≪傭齋叢話≫권 8. |
0803) | ≪高麗史≫권 91, 列傳 4, 宗室 2, 丹陽府院大君 珛. |
0804) | 鄭道傳,≪朝鮮經國典≫上, 賦典 軍資. |
0805) | ≪太祖實錄≫권 7, 태조 4년 2월 계미. |
0806) | 원종 13년 12월에 世子 諶이 元에 가는데 여비로서 興王寺는 白金 150斤을, 安和寺는 100斤을, 普濟寺는 70斤을 부담하고 있다(≪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科斂 원종 13년 12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