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휼정책
인류는 지구상에 등장한 이후 항상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해 왔다. 인지가 발달하고 농경이 시작된 이후에는 특히 기상의 이변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에, 그러한 현상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국가의 기반인 농업이 천재지변에 의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로 인해 사회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식량의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던 상황에서 재해나 전쟁으로 식량부족이 가중되고 전염병 등으로 인명피해가 발생하게 되었을 때 생기는 혼란은 국가의 존립까지도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경영의 필수 요건으로 농민에 대한 보호는 국가의 의무였다.
이러한 국가적 보호는 농업구조의 파괴로 인해 미치게 될 농민의 생활뿐만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형성된 국가의 경제적 기반의 보호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의 진휼제도는 국가체제가 정비된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고구려 고국천왕 때에는 賑貸法이 제도적으로 성립되기도 하였다.263) 고려시대에도 재해를 당하거나 의지할 데 없는 백성을 구제하고 불교의 大慈大悲思想을 구현하기 위해 역대의 국왕은 궁민을 구휼하고,264) 한재가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내는 등265)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佛事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비와 보시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天譴 사상이나 불교사상 외에 오행설과 도참사상도 진휼정책에 영향을 주었다.266)
이러한 진휼정책은 정치·도덕적 측면에서 천재지변에 의해서 주로 피해를 입었던 농민에게 베풀어 준 구빈책이었다. 왜냐하면 농민은 국가 사회경제의 기초인 노동생산과 수세의 주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지배자는 재해를 입 은 농민에 대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하여 진휼하였다.
재해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진휼의 대상이 된 것은 주로 자연재해였다. 그 중에서는 旱災·水災·蝗災·霜災·雹災가 빈번히 발생하여 그때마다 식량이 부족하게 되어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하고, 곡가가 앙등하여 流民이 발생하는 등,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예종 때에는 ‘十室九空’의 현상까지 있었다267)고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어야만 했고 그 결과 재해의 예방과 사후 조치를 위한 제도가 성립되었다.
즉 태조 때 설치한 黑倉과 이를 개편·확충한 성종 때의 義倉, 그리고 常平倉이 그것인데, 이러한 의창과 상평창은 상설기구로 설치되어 재해나 경제적 변동이 있을 때마다 적절히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구들만으로는 진휼의 목적을 모두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재해의 종류와 피해상황에 따라 정책적인 조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재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米·布·粟·豆·鹽·衣服·醬·鹽豉·柴炭 등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거나 빌려주는 한편 醮祭·道場 등을 통한 기도의식과 조세감면·사면·罷役 등을 시행함으로써268) 이재민과 스스로 살 수 없는 궁민을 구휼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주로 농민이었지만, 향·소·부곡과 역·진·원·관에 거주하는 천민도 진휼의 대상이었다.
이재민에 대한 조세의 감면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고려시대에 오면 더욱 구체화되어 피해 정도에 따라 조세를 감면해 주되, 이를 戶部에 보고하도록 법제화하였다.269) 또한 문종 4년(1050)에는 田 1결에 대하여 손실이 4/10이면 租를, 6/10이면 租布를 면제하고, 7/10이면 조·포·역 모두를 면제하도록 하였다.270) 또 倉이나 庫를 통해 貸穀해 간 농민들이 재해로 인해 제때에 갚지 못한 경우 이를 탕감해 주거나 연기해 주기도 하였다.271)
또한 이미 성종 때에 고아를 보호하는 법이 제정되고 현종 때에는 홀아비·과부·고아·무의탁 노인 등에게 옷과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272) 수재와 한재를 당한 이재민에 대해 쌀·소금 등 생활필수품을 지급하고, 濟危寶·東西大悲院 등을 통해 환자를 치료케 하는 등273) 진휼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진휼정책 이외에 재해가 자신의 부덕의 소치 때문이라 생각하고 사면이라는 형식을 통해 冤獄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사면이 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단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왕을 비롯한 지배층에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면의 대상은 주로 가벼운 죄수가 대부분이었으나, 간혹 사형수가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다.
왕실에서 재해(주로 旱害)를 물리치기 위해 행한 기도행사는 대부분이 祈雨 祭였는데, 특히 불교적 행사가 성행하였다. 기우제는 대개의 경우 消災道場을 설치하여 행하였는데, 그 근본 경전은≪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으로서 여러 도량 중 밀교적 성격이 가장 강한 것이었다.274)
유교의식은 圓丘祭가 중심을 이루었으며, 도교에서도 초제를 통해 기우행사를 하였고, 무당을 모아 전통적 의식으로 기우제를 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재해가 발생한 후에 행한 진급과 진대, 의식적 은전인 사면이나 기도 행사 등은 삼국시대보다 구체화·다양화되었지만 이것만으로는 재해를 근본적으로 예방하거나 극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근본적인 재해대비책이 요구되었는 바 이것이「勸農政策」이었다.
권농정책의 내용은 개간의 장려·제방 수축·농기구의 개량 및 생산·부업의 권장·농경방법의 개선 등으로, 가장 기본적이고도 광범위한 상설 재해대비책이라 하겠다. 농업이 경제의 기본이었던 당시에 있어서 권농정책은 재해 예방뿐만 아니라 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시된 정책이었다.
태조는 즉위후 진제를 바로잡고 조세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什一制를 시행하였고, 농업을 장려하여 증산에 힘썼다. 특히 유교주의적 왕도정치를 지향한 성종은 祈穀(年豊祈禱)·籍田(君主親耕)의 예를 행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농번기에는 일체의 잡무를 정지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다. 심지어 성종 6년(987)에는 병기를 거두어서 농구를 만들기까지 하도록 명하였다.275) 이와 같이 병기로 농기구를 만들도록 지시한 것은, 그것이 아직도 지방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농사도 권장하는 이중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종은 지방의 丁戶와 白丁에게 뽕나무를 심어 양잠을 돕게 하였으 며,276) 문종 20년(1060)에는 외방의 장관은 勸農使의 직무를 겸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지시하는 등277) 적극적인 귄농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농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天文에 대한 연구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天文術은 이 미 삼국시대부터 발달해 왔는데, 고려는 이를 계승하여 天文學을 더욱 발달시켰다.
고려시대의 천문연구는 주로 恒星의 위치 관측, 일식·월식·혜성·객성 및 태양의 흑점 관측 등에 대한 것이었다. 그 목적은 점성술 때문이기도 했지만,278) 이를 통해「時變」을 살피려고 했던 것이다.279) 그것은 하늘의 변화가 농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천문에 대한 연구는 권농정책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이상의 여러 진휼정책은 고려 전기에는 지배층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효과를 거두며 시행되었으나, 무신의 집권과 몽고의 침입 후에는 사회의 제반 제도가 해이해져서 전과 같은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263) | ≪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고국천왕 16년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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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 ≪高麗史≫권 11, 世家 11, 숙종 7년 6월 정해. |
265) | ≪高麗史≫권 7, 世家 7, 문종 6년 6월 을해·권 9, 世家 9, 문종 29년 5월 신유·권 10, 世家 10, 선종 4년 4월 을사 및 권 11, 世家 11, 숙종 원년 5월 무신. |
266) | 李熙德,<高麗時代 五行說에 대한 연구>(≪歷史學報≫79, 1978). 崔柄憲,<高麗時代의 五行的 歷史觀>(≪韓國學報≫13, 1978). 金玎坤,<高麗前期의 救恤政策에 관한 硏究>(≪論文集≫19, 晋州敎育大學, 1979). |
267) | ≪高麗史≫권 12, 世家 12, 예종 즉위년 12월 갑신. |
268) | 朴杰淳,<高麗前期의 賑恤政策(Ⅱ)>(≪湖西史學≫13, 1985), 46∼54쪽. |
269)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踏驗損實 성종 7년 2월. |
270) | ≪高麗史≫권 78, 志 32, 食貸 1, 田制 踏驗損實 문종 4년 11월. |
271)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災免之制 선종 7년 6월 및 숙종 6년 11월. |
272)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鰥寡孤獨賑貸之制 성종 10년 7월·13년 3월 및 현종 2년 12월. |
273) | ≪高麗史≫권 80, 志 34, 食貨 3, 水旱疫癘賑貸之制. |
274) | 徐閏吉,<高麗의 護國法會와 道場>(≪佛敎學報≫14, 1977), 25쪽. |
275) | ≪高麗史節要≫권 2, 성종 6년 6월. |
276) | ≪高麗史≫권 79, 志 33, 食貨 2, 農桑 현종 19년 정월. |
277) | ≪高麗史節要≫권 5, 문종 20년 4월. |
278) | 全相運,<科學과 技術>(≪한국사≫8, 국사편찬위원회, 1974), 237∼242쪽. |
279) | ≪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14년 2월 을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