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공형과 사형
국가의 공권력이 확립되어 가는 것과 비례하여 형벌의 체계도 公刑罰主義로 그 체계가 확립되어 갔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私刑罰主義도 허용되고 있었다. 물론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하나 私刑이 용인되는 경우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조부모·부모가 살해되었을 때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 직계자손의 보복, 둘째는 직계비속인 자손이나 처에 대한 조부모·부모 또는 夫의 징계, 셋째는 노비 등에 대한 주인의 징계가 그것이다. 고려시대 사형에 관하여는 다음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① 執政 王詵을 외방으로 내쫓았다. 처음에 왕이 선조의 참소를 입은 사람의 자손에게 복수하는 것을 허용하였더니 마침내 사람들이 서로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서 다시 원통함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 때에 왕선이 복수한다고 핑계대고 임금의 명령을 거짓으로 꾸며서 태조의 아들 天安府院君을 죽였으므로 이에 왕선을 내쫓고, 이어 제 마음대로 사람을 죽여 복수하는 것을 금지하였다(≪高麗史節要≫권 2, 경종 원년 11월).
② 金光中은 벼슬이 여러 번 올라 諫議大夫 秘書監에 이르렀다. 김광중이 일찍이 驅使 朴光升을 애호하여 어떤 사람에게 청을 넣어 隊校를 시켰다. 鄭仲夫亂 때 박광승이 김광중을 유인하여 민가에 숨겨 놓고 한편으로는 밀고하여 그를 죽게 만들었다. 그 후 김광중의 아들 金蔕가 順安縣令이 되었다. … 그 때 박광승이 祭告使가 되어 그곳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사람을 蔚州로 보내어 박광승의 아비를 잡아오고 또 박광승도 체포하여 모두 순안으로 데려 왔다. 부자를 대면시킨 후 먼저 그의 아비를 죽이고 박광승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비의 죽음이 서러운가’라고 물으니 박광승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金蔕가 또 묻기를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은 것이다. 너는 어째서 은혜를 배반하고 나의 아버지를 죽였는가’라고 하니 박광승이 대답을 못하였다. 드디어 그의 팔을 잘라 軍中에 두었다가 몇 고을을 巡歷한 후에 죽였다(≪高麗史≫권 101, 列傳 14, 金光中).
① 은 선대의 복수를 허용하고 있는 私刑에 관한 자료이다. 내용인 즉 경종 이 즉위함에 이르러 광종 연간에 발생한 被讖人의 자손에게 복수를 허용한 결과 그 피해가 늘어나자 복수를 빙자한 살인행위를 금한다는 내용이다.
② 는 정중부의 난 때 박광승이 은혜를 배반하고 김광중을 밀고하여 살해되었는데, 그후 광중의 아들 蔕가 順安縣令이 되어 부친의 복수를 위해 광승과 그의 父를 私刑으로 死刑에 이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일종의 私刑이라 할 수 있는「爲親殺人」을 범한 경우에 그 정상을 참작하여「移鄕」또는 사면된 사실이 산견된다.395) 당률에서의 이향제도는 타인을 살해하였을 때는 마땅히 사형에 처해졌지만, 사면을 거쳐 죄를 면한 자가 피해자 가족과 가까이 있을 때에 그 근친에 의한 복수를 피하기 위해 타향에 이주케 하는 제도이다.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