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송의 중원통일과「내실외허」
960년 조광윤은 아군의 옹립으로 새 왕조 송의 태조가 되었지만, 그는 후주 세종의 개혁정치를 충실히 계승하며 국내의 안정과 중원의 통일사업을 계속해 갔다. 재위 17년간 태조는 남방에서 독립해 있던 南唐을 비롯한 蜀·南漢 등 6국을 평정하고, 그의 동생 太宗은 북방에 잔존한 北漢과 남방의 吳越을 멸망시켜 당말 이후 분열되어 있던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하북의 연운 16주의 땅을 되찾기 위하여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을 침략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함으로써 이 지역은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송 태조는 비록 아군의 추대에 의해 황위에 올랐으나 5대 혼란의 원인이 節度使에게 막강한 군사력이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절도사 등의 군벌을 무력화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이에 禁軍이 조직을 개편하여 3衛로 나누어 황제 직속으로 두었다. 그리고 지방의 강력한 절도사에게는 군대의 삭감과 아병의 양성을 금지시키고, 그들의 지방에 대한 행정적 권한을 축소시켜 재정권은 轉運司에게, 치안경찰권은 문관에게 각각 이임시켰다. 이로써 5대의 특성이던 무신정치는 해체되고 역으로 군주권은 강화될 수 있었다.
요컨대 송조의 정치운영 가운데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황제의 전제권(독재권)의 강화이다. 중앙의 최고기관으로 中書省을 두어 합의에 따라 정무를 심의하였으나 그 결재권자는 황제였으며, 군사의 최고기관으로 樞密院을 설치하였지만 결정사항에 대하여는 추밀관 이하 복수로 된 장관들이 심의하고 군사와 최종 결정은 황제 1인에게 귀속시켰다. 아울러 三司를 두어 종전 戶部·鐵部·度支部의 직권을 합병하여 1명의 전임장관이 그 직무를 통솔하게 하였다. 지방은 세분하여 전국을 15路로 나누되 일반 행정을 총괄하는 행정관청을 두지 않고 帥(經略安撫使)·漕(轉運使)·憲(提點刑獄公事)·倉(提擧常平茶鹽司)의 4司를 병설하여 路의 군사·재정·사법·차·소금에 관한 사무를 나누어 맡아보게 하였다. 로의 하부에는 府·州·軍·監 등의 행정구획을 두고 최하위 지방관청은 종전과 같이 縣을 두었다. 그리나 이들 관청의 책임자인 知事·通判 등의 자리는 이전처럼 지방장관들의 자유임명에 맡기지 않고 모두 중앙의 과거출신자를 파견함으로써 지방행정력을 중앙에 집중되게 하였다.
이로써 황제는 국가의 모든 통치의 중심이 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새로운 통치조직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관리의 양성이 필요하였다. 과거제는 이미 5대라는 무신통치시대에도 4년간을 제외하고 해마다 실시되었다. 그러나 강력한 독재권을 쥔 송 황제의 충실한 대리인으로서의 관리를 선발하는 송조의 과거제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황제의 뜻에 맞는 유능한 관리로 새 시대의 관료조직을 채워 넣어야 했다. 이에 태조는 鄕試(府州)와 省試(禮部)를 거쳐 관리의 자격을 얻은 사람(進士)에게 다시 御試(殿試)를 실시하여 성적에 따라 교양있는 인재를 관료층에 흡수하였다. 이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대개 지방에서 세력을 얻고 있던 신흥지주인「形勢戶」가 많았다. 시대의 경과에 따라 이들 형세호의 자제들은 점차 관료계로 진출함으로써 곧 송대 전제군주제를 뒷받침해 주는 주체세력이 되었다.444)
이와 같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송대의 정치조직은 태조·태종대 약 30년간에 걸쳐 기초가 확립되고 眞宗·仁宗대의 황금기를 맞이하니, 적어도 개국 후 100여 년 동안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중앙 황제권의 강화에 대비한 지방 군권의 축소 내지는 문신에 의한 군권 장악은 군사력을 약화시켜 당시 흥기하고 있는 거란족과 여진족의 군대와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러한「內實外虛」의 결과는 송왕조가 멸망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인종대의「慶曆의 治」를 거치면서 正學의 발생 등을 비롯한 사상·문화·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은 많은 사가들에 의하여「儒林의 개벽기」445)니 중국의 르네상스 또는 산업혁명이니 하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눈부신 것이었다. 안사의 난 이래 하북지방에 계속된 정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천과 강남지방으로 남하함에 따라 양자강 하류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게다가 송의 중원 통일로 정치가 안정되자 농지면적은 더욱 확대되고 농업생산력은 급증하였다. 잉여생산력이 풍부하게 되자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의 상품생산도 활성화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경제적인 변화는 사회적으로 중소신흥지주의 출현을 자극하였으며, 학문 또한 이러한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治用의 학문으로서 정학이 성립되게 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송의 극성기는 英宗대를 고비로 점차 쇠퇴되어 갔다. 그 원인은 바로 국방 소홀로 인한 전쟁의 기피와 이를 금전적으로 해결하려는 데서 오는 재정적자 때문이었다. 물론 그 폐단은 이미 태종과 진종대 연운 16주의 회복을 위한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雍熙 3년(986) 태종은 遼에서 나이 어린 聖宗이 즉위하는 혼란기를 틈타 다시 연운 16주 회복을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거란(요)의 명장 耶律休哥의 전략에 말려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 이 무렵 서북쪽에 있는 黨項族의 西夏까지 반란을 일으키니 송의 군사력를 한곳으로 집중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한 난국에 전쟁을 일으킨 태종마저 죽고 진종이 사태수습을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종은 재상 寇準의 건의에 따라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평교섭을 벌여 성사시키니 이것이 곧 ■淵의 맹약이다. 이 맹약을 계기로 두 나라는 형제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송은 방위비 보조의 명목으로 해마다 견 20만 필·은 10만 냥의 歲幣를 거란에 보내게 되었다.
당시 송의 국고수입은 흑자를 유지하고 있어 남아 도는 국고를 쓰기 위해 억지로 토목공사를 일으켜야 할 정도였다. 따라서 이 정도의 세폐는 선진국이 후진국에 보내는 일종의 무상의 경제원조로 간주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 만 11세기 중반 이래 관료기구의 경직화와 빈부계급의 분열 등으로 송조의 번영에는 암운이 깃들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송조의 관료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임관되지 않은 진사를 포함하여 문무관을 배출한 지배계급인 官戶는 납세 및 요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의 감면분은 자연히 일반민에게 전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鄕戶들이 지는 요역이란 단순한 力役이 아니라 조세징수나 자치경찰 등 말단 지방행정의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어서 시간의 낭비와 아울러 금전의 부담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하와의「4년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새로운 세폐 부담과 거란에 보내는 세폐의 증액 등으로 송의 국고는 바닥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송·거란 두 나라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외교의 주도권을 쥐며 국제적 지위를 높여 왔던 당항족의 李元昊는 인종 寶元 원년(1038;거란 중희 7) 나라이름을 大夏라 칭하고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하였다. 이 대하가 곧 역사상의 서하이다. 서하는 송과 서역을 잇는 중개무역과 청백염의 수출로 경제력을 쌓은 후 인종 康定 원년(1040) 정월 송의 서북쪽 연주 공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도발해 왔다. 서하의 침입을 받은 송은 韓琦·范仲淹과 같은 젊고 유능한 정치가를 발탁하여 그 방어에 힘쓰게 하였다. 그런데 4년간 지속된 서하와의 전쟁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마침 요의 興宗까지 關南 10縣의 수복을 요구하며 선전포고를 해 왔다. 서하와의 오랜 싸움에 지쳐있는 데다가 거란과 다시 전쟁 을 하는 것을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송 인종은 주화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단 거란의 도움으로 서하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송의 서하에 대한 견제책이 강화되자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안 서하는 적극적인 강화책을 요구하며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에 慶曆 4년(1044) 서하는 송에 대한 신례를 취하고, 그 대가로 송은 매년 세폐로서 견 13만 필·은 5만 냥·차 2만 근을 서하에 보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송은 이와 같은 서하에 대한 새로운 세폐 이외에도 거란에 대한 세폐를 증액해야 했다. 거란이 서하의 송에 대한 신례를 눈감아 주고 관남 10현을 포기한 대가로 송은 40년 전부터 보내온 세폐를 다시 10만 냥씩 늘려, 은 20만 냥·비단 30만 필로 하였다.446)
마침내 송은 금전적 대가로 서북변의 안정을 찾게 되었지만 이제 국고는 전연의 맹약 당시의 상황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부족한 중앙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지방의 요역에 끌려 나온 衙前들에게 그 짐을 떠넘겼다. 특히 縣을 넘어 州의 아전으로서 요역을 나가는 경우에는 그들이 부담해야 할 경비는 주의 각종 행사비용, 세입보충 등으로 액수가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가정의 파탄까지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한 사람의 관리라도 배출한 관호는 국가로부터 각종의 혜택을 누리며 부를 축적시켜 갔으나, 아무리 넉넉한 중소지주라 할지라도 한 명의 관인도 배출하지 못한 향호의 경우에는 각종 세금과 요역의 부담으로 파산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현상에 편승하여 관호들은 파산한 향호들의 토지를 매입하거나 병탄함으로써 그들의 재산을 증식시켜 갔다. 또한 소금의 전매값 인상은 청백염의 밀수를 조장하고 민심의 이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중앙에서는 국정의 재정비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놓고 관료들 사이에 의견이 대립되었다. 이리한 경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朋黨을 만들어 사사건건 충돌하며 정국을 소란에 빠뜨렸다. 이 붕당의 씨는 이미 진종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특히 거란과의 정책에 대한 주화파·주전파의 다툼이 바로 그 단초이다. 전연의 맹약을 주선한 寇準에 대하여 王欽若은 구준이 각종 미신적인 행사를 일으켜 국가재정을 어렵게 한다며 이에 대한 여론을 일으켰다. 또 이어 즉위한 인종 때 범중엄은 부국강병과 관리의 기강확립을 목적으로 관리선발의 폐단을 개혁하자는 상소문을 올리니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다시 당론이 일어나 결국 자신이 탄압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다시 夏竦과 杜衍을 중심으로 하는 呂夷簡·范雍 및 범중엄·富弼 등의 두 파로 갈리어 대립하는 당쟁으로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쟁은 다시 대서하 정책을 둘러싸고 확대되고 또 다시「慶曆의 讜1議」로까지 이어져 이후 20여 년간 당쟁의 소용돌이는 계속되었다. 게다가 인종이 후사없이 죽자 태종의 증손인 영종이 즉위하여 그의 생부의 묘호 문제를 둘러싼「濮議」447)까지 일어나 당론은 계속 번져 갔다.
한편 인종대를 정점으로 하여 극성을 이루었던 송의 정치문화도 쇠퇴의 기운이 보이면서 개혁이 요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지적한대로 재정면에서 문관정치 발전에 따른 관료의 숫적 증가와 요와 서하에 보내는 세폐 등은 적자재정의 폭을 심각하게 하였다. 또 무신억제를 토대로 한 문치주의는 유능한 군지휘관 양성을 막아 결국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의 약화를 보완하기 위해 군인의 수를 늘려야 했다. 그것은 인종 때 금군의 증가와 지방 상비군의 신설로 나타나 국가재정의 80%가 군사비로 지출되고 갈수록 적자 폭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건전한 재정경제를 꾀하기 위하여 송은 요와 서하에 대한 외교정책의 개선을 통한 세폐의 절약, 병제의 개편을 통한 국방비의 감소, 국내산업의 진흥을 통한 세입원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이 문제는 영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神宗과 그에 의해 중용된 王安石의 개혁정치를 통해 이루어졌다.
왕안석은 원래 남당의 영내였던 臨川縣 사람으로 이미 인종에게 萬言書라는 상소문을 올려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 상소문에서 송 이 인구·영토·부력·지력 등 모든 것에 있어서 거란이나 서하보다 앞서 있는데도 민중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국왕이 선왕의 도에 어긋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유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조직인 周禮정신에 입각하여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왕안석의 의견에 크게 감탄한 신종은 정치를 일신하고자 왕안석을 발탁하여 전권을 일임, 개혁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신종의 절대적인 신임하에 왕안석은 곧 개혁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차와 소금 등의 전매수입 일체를 재상의 관할로 하여 재정의 실권을 쥔 후, 이어 차례로 대담한 정치개혁인「新法」을 추진하였다.
신법의 대략적인 내용은 ① 재정 합리화를 위한 均輸法을 통한 물가조절 ② 농민에 대한 저리 융자를 목적으로 하는 靑苗法 ③ 자금이 필요한 상인들에게 자금을 대부해주는 市易法 ④ 농촌 향호들의 고통이었던 불합리한 역법을 개선한 募役法 ⑤ 향토방위를 위한 일종의 부병제로서의 保甲法 ⑥ 군마조달을 위한 保馬法 등이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 걸친 그의 개혁안은 당시 송의 정치·사회의 병폐를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여 국민 경제의 발전과 국가재정의 충실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이루어진 개혁이었으므로 강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을 침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강자의 위치에 있던 구관료와 학자들은 태조 이래의 祖宗의 成法을 바꾸었다고 왕안석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의 후원자인 신종마저 죽고 哲宗이 즉위하여 舊法黨의 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신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사마광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구법에 의해 정치가 주도되었다. 그러다 元祐 9년(1095) 섭정을 하며 구법을 주장해 오던 철종의 조모 高太后가 죽자 왕안석의 일파인 章惇과 蔡京 등이 집권하여 신법은 다시 정치의 규범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신·구법당의 대립은 올바른 정책의 수립을 좌절시켰다. 그 위에 휘종대의 향락적인 정치풍조와 안일한 對金外交政策은 금의 공격을 야기시켜 휘종과 아들 欽宗 및 3천 명의 종실이 만주로 끌려가는「靖康의 變」을 겪고 북송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