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북방민족의 흥기와 송의 동향
가. 거란의 흥기와「전연의 맹」
거란은 옛부터 요하 상류로 흘러 들어가는 시라무렌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선비족의 하나이다. 이미 北魏 때부터 그 존재에 대해 알려진 거란족이었지만 그들이 급속히 성장하여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를 세우는 민족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는 전술하였듯이 당말 5대의 정치적 혼란의 영향이 컸다. 따라서 하북 5대의 분열기는 거란족의 성장을 위해 존재했던 시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원래 거란족은 각각의 大人이 다스리는 8부족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은 3년마다 1인을 선발하여 8部大人, 즉 大干으로 삼는 부족연합사회였으나 당 말기에 이를 세습제로 바꾸어 유목 전제국가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거란족의 이러한 발전에는 8부대인 가운데 한사람인 耶律阿保機의 힘이 컸다. 그는 뛰어난 무공으로 여러 부족의 군사적 지도자가 되어 여러 부족의 추장 위에 군림하였다. 그리고 자주 만리장성 이남으로 쳐들어가 많은 한족을 사로잡아 노동인구를 증가시켰다. 그가 권력을 키워 나가는 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돌론노르 부근의 천연염이었다. 그는 이 소금의 독점권을 이용하여 다른 7부족의 부족장을 꾀어 모두 암살하여 거란부족의 통합에 성공한 후, 후량 貞明 2년(916) 거란국을 건설하고 스스로 帝라 칭하였다.
특히 태조 야율아보기는 韓廷微·康黙記·盧文進 등과 같은 망명 한족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중국식 문물제도를 갖추는 漢化政策運動에 종사케 하였다. 그리고 장차 중원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먼저 배후의 압박을 제거하고자 동쪽의 발해를 침략해 멸망시키고(926), 이어 그곳에 괴뢰정부인 東丹國을 세워 장남 倍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동단국왕 배는 어머니 소태후(述律太后)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차남 耶律德光(태종)과의 권력쟁탈에서 패하여 죽었다. 태종 야율덕광은 중원 침략의 첫단계로 후당을 위협하고 절도사 석경당을 꾀어 그를 후원하여 후진을 세우게 하였다. 당시 후진을 도운 대가로 받은 연운 16주는 거란의 남하정책의 교두보가 되었다.
완전한 점령은 아니지만 하북의 연운 16주를 얻게 된 거란 태종은 幽州를 남경, 雲州를 서경으로 삼아 한족관료로 하여금 통치케 하고 자신은 중국본 토 점령의 의지를 계속 추진해 갔다. 그런데 마침 후진의 出帝가 거란에 대한 신례의 약속을 거부하자 會同 10년(947) 태종은 후진을 멸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국호를 중국식 명칭인「大遼」로 고치니, 이는 중국을 아우르는 제국수립 의 결의를 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목사회의 생산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거란인이 고도의 선진문화를 가진 중국을 통치하는 데는 한계점이 있었다. 모처럼 하남까지 진출하였으나 그들의 능력으로는 한족을 통치할 수 없었고, 복속된 부족들의 반란 또한 계속되었다. 결국 능력의 한계를 느낀 태종은 南征을 포기하고 철군하였으나 귀국길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남은 것은 황권을 둘러싼 왕실내분이었다.
그것은 태종의 모친 술율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의 유목파와 태조의 장 손인 兀欲을 중심으로 한 남방의 농경파의 대립이었다. 이 싸움에서 올욕이 승리함으로써 요의 정책은 큰 변동없이 안정을 되찾고 후진의 옛 신하를 포함한 많은 한족관료들이 등용되어 漢化政策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올욕(世宗)이 타살되고 이어 즉위한 述律(穆宗) 역시 近侍에 의해 살해되어 황권은 다시 세종의 아들 宗賢(景宗)에게 넘어가는 등 황실의 내분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양파의 대립은 거란족·한족·奚族들로 구성된 민족 성원의 이질성 때문이었다. 태조가 국가를 세운 처음에는 사로잡았거나 스스로 망명해 들어온 한족들을 거란의 여러 부족집단에 나누어 주어 여러 부족사회의 공동체적 결합을 약화시키는 데는 성공하였다. 하지만 고도의 문화민족이며 생산력이 왕성한 한족의 국가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족의 제도와 정치기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 경종에 이어 즉위한 聖宗(경종의 아들, 이름은 융)은 부분 통합과 분리 등의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거란의 전통적인 부족제적 잔재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거란인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領國制를 성립시킴으로써 요의 정권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거란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의 주민을 다스리는 것은 北樞密院에, 한족 통치는 南樞密院에서 각각 나누어 다스리게 하는 이중적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는 거란 및 해족 등의 후 진 유목사회가 한족의 선진사회인을 다스릴 수 없는 데서 강구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할 수 있다.448)
이와 같이 하여 성종 때 거란(요)은 대내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뿐 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동북만주와 고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국제적인 위상까지 높였다. 성종은 즉위하자마자 나라 이름을 거란으로 고치고, 統和 원년(939) 10월 蕭蒲寧·蕭桓德으로 하여금 고려 북변에 있는 여진족을 토벌하였으며, 통화 3년 8월에는 발해유민이 압록강변에 세운 定安國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군사기지로서 압록강 연안의 威寇·振化·來遠에 성을 쌓음으로써 고려침입 준비를 완료하였다.
한편 성종대 송과의 관계는 연운 16주의 귀속문제를 둘러싸고 재개되었다. 송 태종은 거란 성종이 12세의 어린아이임을 얕보고 군사를 일으켜 연운 16 주를 회수하려 하였다. 송은 우선 고려에 韓國華를 파견하여 협공을 제의해 왔는데 이웃나라의 싸움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고려는 적극적인 참 여를 주저하였다. 이에 雍熙 3년(986;거란 통화 4) 송은 단독으로 3道幷出作 戰으로 거란을 침공해 들어갔다. 전쟁 초기 송군은 유주·계주·운주·삭주 등지에서 승세를 올렸으나 유주의 거란장군 야율휴가의 보급로 차단계획에 말려 수세에 몰리다가 결국 岐溝싸움에서 패하고 태종조차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 나왔다. 이 싸움의 패전으로 이후 한인들의 대거란정책은 소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어 태종에 이어 즉위한 송 진종에게는 날카로워진 두 나라 관계를 원만히 처리해야 하는 의무만 남게 되었다. 더구나 성종 통화 22년(1004) 윤 9월 거란군은 소태후의 지휘하에 하북성까지 쳐들어와 송이 고심하며 마련한 소택지의 방어시설을 뚫고 황하 북쪽의 澶州까지 진군하여 왔다. 이 보고를 접한 송조정은 크게 충격을 받아 서울을 버리고 양자강 남쪽으로 천도하자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로 동요하였다. 이에 진종은 재상 구준의 양면작전을 받아들여 황제가 직접 전주까지 가서 군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평교섭을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황제가 친히 나서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자 송군의 기개는 다시 활력을 얻어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에 거란군도 놀라 송군과 화평할 의향을 보이게 되었는데 마침 송에서 사신을 보내 강화를 요구하자 양국 사이에는 쉽사리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이 소위「澶淵의 盟」이다. 그 조약 내용은 ① 송은 매년 견 20만 필·은 10만 냥을 거란에 세폐로 보낼 것 ② 두 나라의 국경선은 현상태로 유지하고 서로 국경부근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지 않을 것 ③ 양국은 서로 도망온 사람을 숨겨주지 않을 것 ④ 나이 어린 거란 성종은 송의 진종을 형으로 부를 것449) 등이다. 다소의 변동은 있으나 이로써 송 徽宗 宣和 4년(1122)까지 119년 동안 두 나라의 평화적인 관계는 유지되었다.
특히 이 맹약이 성사된 이면에는 전쟁을 기피하려는 송의 소극적인 정책과 국가발전은 위한 재원확보라는 거란의 요구가 일치되었다는 점이 있다. 이로써 두 나라 국경인 雄州·覇州·安肅軍 등에는 榷場이 설치되었다. 특히 당시 거란의 귀족층들은 한민족과 같은 정도의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어 여러 가지 물자를 송으로부터 수입하게 되었다. 송에서는 상아·쌀·차·비단·향료·의약품 등이 수출되었으며, 거란에서는 소·양·모피·인삼 등이 송으로 수출되었다. 그러나 상호 대립하는 관계였으므로 송은 군사기밀이 거란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9經 이외의 서적 수출을 엄금하였으며, 거란은 馬의 수출을 금하여 송의 군비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에 송 조정은 여러 차례 編勅을 반포하여 대외무역 금지규정을 확대·단속하였으나 무역차액을 노리는 송 상인들은 법을 어겨가며 금지품을 취급하였으며, 때로는 고려를 통한 삼각무역 등으로 양국의 경제교류를 계속하였다.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