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초 여진문제의 발생
태조가 표방한 북방정책은 북방민족에 대한 정책과 영토개척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女眞族과 契丹族 문제는 고려의 대북방정책에 있어 우선해서 풀어야 할 주요한 과제였다.
女眞의 기원과 그들의 住地에 관해서는 그 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진척되었다. 고려시대에「女眞」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정종 3 년(948)에 “東女眞의 大匡 蘇無盖 등이 와서 馬 700匹과 方物을 바쳤다”486)라 고 한≪高麗史≫세가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측 사서에서 여진의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 것보다 45년이 늦은 기록이다. 즉≪遼史≫본기 唐 天復 3년(903)조를 보면 “명년 봄에 女眞을 징벌하여 격파해서 300호를 얻었다”487)라고 되어있다.
고려에서 여진이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거란에서 사용하고 있던 명칭이 後唐의 同光(923∼925) 연간에 중국에 전해지고, 이것이 다시 고려에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488)
그렇다면 문제는 女眞族이 그 이전에 어떠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金史≫기록을 통해 그 연원을 추정해 보기로 하자.
金의 선조는 靺鞨氏에서 나왔다. 말갈은 본래 勿吉이라 불리웠다. 물길은 옛 肅愼의 땅이다. 元魏 때에 勿吉7部가 있었는데 粟末部·伯咄部·安車骨部·拂涅部·號室部·黑水部·白山部가 그것이다. 隋는 靺鞨이라 칭했는데 7부는 앞의 것과 같다. 唐初에 黑水靺鞨과 粟末靺鞨이 있었으나 나머지 5부는 들을 수가 없었다(≪金史≫권 1, 本紀 1, 世紀).
그러면 唐初에 와서 물길 7부 가운데 속말·흑수부 외의 존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강력한 기미정책에 의해 고구려족에 동화되었고 그들의 거주지도 일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없어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속말부는 그 뒤 발해 국가형성에 중요한 사회성분이 된 반면,489) 흑수부는 독립적 세력을 유지하며 발해의 건국과 관계없이 반독립적 생활을 영위하던 미개부족으로 존속되었던 것이다.
특히≪松漠記聞≫이나≪三朝北盟會編≫에 보이는 흑수말갈의 생활상을 감안해 본다면 흑수말갈부족은 고구려에 정복된 이후에도 7부 가운데 지리적으로 고구려의 중심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그 문화수준도 지극히 낮아서 고구려화가 늦게까지 추진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말갈인 본래의 속성을 가장 많이 지녀 그 혈통적 유대를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490) 그러므로 발해 건국초에 다른 말갈부족이 모두 발해에 복속된 뒤에도 흑수말갈은 발해에 통합되지 않고 당의 사주를 받아 발해를 공격했던 것을 보면,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의 기미하에서도 그 부족집단은 독립적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편≪삼국사기≫나≪고려사≫와 같은 우리측 자료에는 여진인의 기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대신 “흑수촌장 高子羅 등 170인이 내투하였다”라던가, “흑수인 阿於閒이 200인을 거느리고 내투해 왔다”라 하여, 흑수인들이 고려에 投降한 사실만이 보일 뿐이다.491)
이러한 흑수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삼국사기≫신라본기 헌강왕조의 記事이다.
北鎭에서 아뢰기를, ‘狄國人이 진에 들어와 나무조각을 나무에 걸어놓고 돌아갔다’고 하면서 그 나무를 바쳤는데 거기에는 15字의 글이 있었다. 그 내용은 ‘寶露國이 黑水國人과 함께 新羅國과 和通하고자 한다’라는 것이었다(≪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12년).
만일 위 기사에 나오는 흑수국인과 고려시대의 흑수말갈이 동일종족이라고 한다면 여진족의 일부인 흑수말갈은 9세기 후반부터 신라와, 그리고 10세기 초기에는 고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만약 양자가 다른 별개의 종족을 표시한다면 흑수말갈이 우리 나라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0세기 중엽으로 늦추어진다.
흑수인과 흑수말갈이 동일종족인가는 국내외 학자간에 각각 설을 달리하고 있다. 그런데≪삼조북맹회편≫권 3에 “女眞은 옛 肅愼國이다. 본명은 朱里眞 인데 와전되어 女眞이라 했다”라고 한 기사를 보더라도 여진이란 명칭 자체가 여진인 스스로 붙인 명칭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의해서 더욱 뒷받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0세기 초에 이르면 발해는 쇠퇴하여 피지배계층을 형성하고 있던 말갈인에 대한 통제가 점차 이완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틈을 이용하 여 흑수말갈은 서서히 독립하는 경향을 보이며 後唐 莊宗 同光 2년(924)부터 明宗 長興 3년(932)까지 8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중국과 통교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신라말에 이미 함남일대까지 진출하여 우리 민족과 교섭을 시작한 부족까지 있었다.
(尹瑄이) 그의 도당을 이끌고 북변으로 달아나 사람을 끌어모아 2천여 명이나 되었다. 鶻巖城에 있으면서 黑水蕃衆을 불러들여 오래도록 邊郡의 害惡이 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무리를 이끌고 내부해 옴으로써 北邊지역이 편안하게 되었다(≪高麗史≫권 92, 列傳 5, 王順式 附 尹瑄).
이 때 윤선이 웅거하던 골암성은 안변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는 만큼, 이곳에서 흑수번중을 불러들였다면 이 무렵에는 흑수인들이 안변 부근까지 진출하여 흩어져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안변 근처지역에서 윤선과 통교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흑수말갈의 본거주지가 송화강의 하류지역이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통교는 압록강을 거쳐 산동반도로 건너갔다고 볼 때, 그렇다면 한반도에 있던 고려와 왕래가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492)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고려사≫에 나타나는 흑수인은 흑수말갈과 동일족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흑수말갈은 얼마 후에는 東女眞 혹은 東蕃의 명칭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여진은 西女眞, 즉 鴨綠女眞(濱海女眞이라고도 함)에 대칭되는 명칭으로 동번이라고도 하였고, “東女眞,黑水酋長 居蔚摩頭蓋가 來朝해 왔다”고 한 기록과 같이, 현종 당시 고려인들은「東女眞黑水」라고 합칭해 쓰기도 했던 것 같다.493)
이외에도「흑수말갈 蘇勿蓋」가 동여진 「奉國大將軍 소물개」로 기록되기도 하듯이 흑수말갈과 동여진은 혼용되기도 하였다.494) 이러한 이유는 여진인 왕래 때 기록을 담당한 관리나 통역관에 의해 종족명이나 인명이 편리한 대로 기록된 결과인 듯하다. 또 인명의 경우에도 발음이 유사한 漢字가 혼용되어 있는 것을 될 수가 있는데, 尼亏弗이 尼于弗로, 毛逸羅가 毛伊羅로, 沙逸羅가 沙一羅로, 高之問이 高之門으로 기록된 것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더욱이 여진족의 인명의 경우 여진인 스스로도 정확한 漢字名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던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기록상에 약간의 혼동은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동·서여진의 정확한 거주지가 어디였기에 고려왕조의 문제거리로 등장했던 것일까. 동여진의 지리적 위치부터 먼저 살펴보자. 동여진의 住地問題를 논할 때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고려시대에 동여진을 흔히「三十姓部落」으로 불리웠다는 점이다.495)) 그 예로 “唐末에 부락이 번성하여 모두 30首領이 있었는데, 각 수령은 각 姓이 있어서 모두 합쳐 30姓이었다”496)고 하여 12세기의 흑수여진에 30성이 있었던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만일 三十姓女眞(또는 長白山三十部女眞)497)의 위치가 어디였는가를 증명하면 그 본거주지는 자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동여진의 위치를 좁은 공간에 한정시켜 함경도의 北靑 부근이나 함흥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498) 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30부여진은 각 부가 각기 하나의 성을 가지고 있는 부족인데 이처럼 많은 숫자가 함흥평야와 같은 작은 지역에 거주할 수 없으며, 또≪요사≫에는 30부여진의 이름 앞에 長白山이란 지명을 붙인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30부여진의 거주지는 함흥평야로부터 間島地方이나 綏芬河地方에 걸쳐 살았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499)
그런데≪文獻通考≫와≪금사≫에는 그들의 거주지와 풍습에 대하여 마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束末江 북쪽으로부터 寧江의 동쪽까지 地方이 천여 리요, 戶數가 십여 만이다. 大君長은 없고 또 國名도 없다. 산곡간에 흩어져 살며 豪俠을 추대하여 酋渠를 삼으니 적은 경우는 천 호를, 많게는 수천 호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들을 일컬어 生女眞이라 했다(≪文獻通考≫권 327, 四裔考 4, 女眞).
② 黑水靺鞨은 … 그들은 북쪽에 살고 있어 契丹籍을 가지지 않아 生女直이라 불렀다. 그들의 위치는 混同江 長白山에 있었다. 혼동강은 黑龍江이라고 불리웠는데 소위 白山黑水가 이것이다(≪金史≫권 1, 本紀 1, 世紀).
따라서 이들은 고려 북면의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散居하여 그 멀리는 混同江(松花江)까지에 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보면 30부여진은 함흥지방으로부터 북으로 수분하에 걸쳐 있었다는 견해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편≪삼국사기≫나≪고려사≫에는 여진의 일파로 간주되는 鐵利(鐵勒)로 칭하는 部族과의 관계기사가 자주 보인다.500) 특히 태조 19년(936) 9월, 고려는 黑水·達姑·鐵勒 등 諸蕃의 勁騎 9,500명의 도움을 받아 一利川戰鬪에서 견훤의 백제군과 싸우기도 하였다.501) 이 철리는 현종대에 더욱 자주 기록에 보이고 있다. 현종 5년(1014)에 鐵利國主人 那沙가 여진인 萬豆를 통해 方物을 바쳐온 이래, 동왕 10년에는 阿盧太를 보내어 土馬를 바쳤고, 12년에는 사신을 보내어 表文을 올려 전과 같이 歸附를 청하기도 했다.502) 이외에도 동왕 21년(1030)에는 鐵利國主 那沙가 女眞人 計陁漢 등을 보내어 貂鼠皮 등을 바치며 책력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 철리부족은 어떻게 해서 고려와 관계를 맺고 내왕하게 되었을까. 철리는 발해가 강성했을 때에는 그에 복속되어 있어 주변 여러 나라와 접촉이 끊어져 있었으므로 당시 그 정황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철리가 발해에 예속되기 이전에 독자적으로 당과 통교한 사실이≪唐書≫에, 그것도 開元 년간(713∼741)에만도 6회나 조공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503) 그러나 중국과 의 통교는 개원 28년(740)을 마지막으로 그 후 200여 년간이나 중국에 조공한 사실이 없다가 송 태조 開寶 5년(972)에 다시 중국과 접촉이 시작되었다.504)
중국과의 통교가 중단된 200여 년 가량의 시기에 관한 사정은≪요사≫의 기록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拂涅이나 越喜같은 부족은 언제부터인가 역사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지만, 철리는 발해의 서울 忽汗城이 함락될 때(926)에 바로 야율아보기에 복속되고 그 후에도 매년 거란에 歲貢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려와 송에게도 때로 朝貢을 바친다. 이것을 보면, 철리도 흑수와 마찬가지로 동단국을 서쪽으로 옮긴 이후 그 활동이 자유로웠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술한≪고려사≫에 철리에 대한 기사가 있게 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한편 철리의 거주지에 대하여 그동안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공통된 학설은 없고, 전반적으로 발해시대에 그들의 위치가 어디였는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다만 고려와의 접촉과정에 있어서의 위치에 더욱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그 예로 발해 武王 말년경 피정복민이었던 흑수·철리·달고 등의 말갈 제부족들이 발해의 남경(咸興) 부근에 강제 이치된 이후 신라가 하대에 국력이 약화되자 차차 남진하여 안변 등지에까지 내왕하였으리라고 본 견해가 있다.505) 그러나 그들은 동·서 여진과는 달리 고려에 내공할 때는 여진 혹은 흑수인을 이용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의 본거지가 고려와 직접 접해 있던 지역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의 북진정책의 추진은 거란과의 대결을 불가피하게 하였지만, 북진대상지역에 살고 있는 여진족문제는 거란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고려사≫에 보이는 태조의 조서 가운데에도 그들에 대한 정책이 들어있다.
‘北藩의 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같은 마음을 가져 굶주리면 왔다가 배부르면 간다. 이로운 것을 보면 수치도 잊으며 이제 비록 복종하여 받든다고 하여도 향배가 일정하지 않으니 마땅히 令을 내려 그들이 지나가는 州鎭은 城 밖에 접 대소를 지어 대접하도록 하라’고 했다(≪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4년).
이와 같은 對女眞觀은 태조만 가졌던 것이 아닌, 고려인들의 공통된 견해이 기도 하였다. 이는 문화적 발전단계가 고려보다 후진인 데다가 거란의 침략과 약탈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도 궁핍하였던 여진인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여진관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려와 거란 사이에 위치한 여진의 처신이 고려로 하여금 불신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중간에 개재하여 양속적인 위치에 있던 여진은 양국에 이용도 되고 때에 따라서는 토벌의 대상도 되었다. 고려와 거란의 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진인의 향배는 무상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기미책은 여러 각도에서 시도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 여진인의 내왕기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정종 3년(948) 9월 조의 기록에서 비롯된다.
東女眞의 大匡 蘇無盖 등이 와서 말 700필과 方物을 바쳤다. 왕이 친히 天德殿에 나가 말을 열람하고 3등으로 나누어 그 값을 정하였다(≪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3년 9월).
이 기사 속에서 ‘東女眞’이란 명칭이 처음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그 여진인의 성명 앞에 대광이라는 泰封 계통에서 유래한 정 2품 官階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소무개는 이미 정종조 이전에 여러 차례 고려에 내왕한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말 700필이나 그것도 土馬가 아닌 良馬에 속하는 말을 교통로도 불편한 당시에 개경까지 끌고 온다는 것은 아무리 관계기관의 협조가 있었다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여진의 호송 인원만 해도 적지 않았을 것이므로 來貢의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렇듯 대규모의 내공인이 고려조정에 등장하기까지에는 이에 앞서 상당히 많은 여진인의 내공사신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국왕이 친히 천덕전에 나가서 말값을 정한 것만 보아도 동여진에 대한 특별 배려와 우대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한 대비책으로 光軍司를 설치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정세가 거란의 침입이 우려만이 아닌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컸었던 때이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양질의 말을 다수 수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소무개의 내공기록 이후 현종 원년(1010) 5월까지의 기간에 여진인 내공·내조의 기사를 사서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62년 동안 단 한 건의 관계기사도 살필 수 없는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일까. 물론 그 이유 중 가장 큰 것의 하나가≪고려사≫를 비롯한 당시의 형편을 기록한 사서의 관계기사가 소루한 때문이라 하겠다.
이무렵 사실을 알려주는 중국측 사서가 주변 이민족에 대해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는데506) 비하여≪고려사≫를 비롯한 우리측 기록은 북방민족들의 내왕 관계기사를 비교적 자세히 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왕사실이 이 기간 중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이 시기에 고려가 취한 북방정책의 방향과 고려가 안고 있던 대내적인 문제 및 고려를 둘러싼 거란·송·여진 등의 국제관계 변화에 따른 정책 전환의 결과라고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 고려와 거란 양국에 대한 기미책의 변수와 상대적인 여진의 고려·거란에 대한 저항태도 및 그 사이에서의 송의 작용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에 의해 62년간의 여진왕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고려사≫를 비롯해서≪요사≫·≪송사≫등 당시의 대여진 관계기사를 남기고 있는 제한된 사서들의 단편적 기사내용을 가지고는 원인들을 명백히 밝혀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의 고찰로 약간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女眞이란 명칭이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발해 멸망 이후의 일이고, 거란이 발해유민에 대한 徙民政策을 추진한 것은 동단국의 서천이 있기 이전부터였다.507) 그 추진 결과로 태종초에 와서는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上京) 일대로부터 두만강 양안에 걸치는 발해유민 세력은 거의 유린되고 말았다. 그 이후 발해고지에는 이동이 빈번했던 여진족(옛 명칭 말갈)을 비롯한 발해유민집단들이 강제이주를 모면하고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광범위한 지역에 산거하게 되었다. 이들 유민집단들은 초기의 강력했던 거란의 통제와 간섭의 시기가 지난 뒤에, 정치적 간섭이 약화됨을 계기로 마침내는 발해부흥을 표방하고 거란과의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여러 집단세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定安國·扶餘府勢力·兀惹 및 빈해여진(압록여진) 등이다.
정안국은 지금의 臨江 부근인 발해시대의 서경 압록부지역에서 건국하여 송과 수차례 통하면서 거란정벌을 위한 동맹까지 시도했었다. 그리고 거란 경종 保寧 7년(975)에 발해유민 출신의 衛長 燕頗가 黃龍府(지금의 農安·長春 일대로 渤海의 扶餘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정안국은 그 세력과 공동작전을 전개했던 듯하다.508) 이러한 노력과 활약으로 인해 정안국은 발해고토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유민들에게 있어서 부흥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세력은 아닐지라도 한때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진족을 포함한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에서 항상 그 지도세력은 구발해시대의 지배계층에 속한 고구려계의 유민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연결된 말갈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고려에 귀순했던 대광현 등의 예와 같이 고려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도 찾아볼 수 있겠으나, 그 아래의 일반 여진인들은 오히려 고려의 북진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의구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태조가 개척한 서북지역은 바로 羅末 이래 호족세력이나 군진세력들의 기반이 되었던 곳들이 대부분이었고, 평양 이북 청천강 이남의 지역도 韓族과 여진인의 잡거지역 내지는 인적이 드문 소수 여진인의 이동 住地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서북지역은 압록여진이나 정안국의 중심부에서 비교적 벗어난 지역이었으므로 고려가 청천강까지 북진을 하는 동안 거란이나 여진과의 심각한 충돌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태조의 거란에 대한 강경책으로 단교까지 단행하자 발해유민들의 고려에 대한 감정은 우호적인 차원을 넘어, 고려에 의지하고 그 보호권안으로 들어오려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 결과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흑수인의 내투나 발해인의 내투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후삼국통일과 왕권의 안정·강화를 위한 대내적인 선결문제가 해결된 뒤인 定宗代 이후에는 여진과의 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었다. 즉 남방에 적이 없어진 고려로서는 한동안 주춤했던 북방정책에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종 이후 계속된 북진정책은 거란의 별다른 간섭없이 여진이 살고 있던 청천강 이북으로까지 영토를 확장시킨 결과 성종 원년(982)에는 大寧江 이동, 오늘날의 平北地方까지 영유하게 된다. 반면 이 지역에서 축출된 여진인들은 고려에 대한 적개감이 상당했을 것이므로 이후 계속되는 발해부흥운동에 고려와의 협조·협력보다는 송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오히려 고려에 대해서는 의혹과 질시의 태도까지 보인 듯하다.
거란의 고려침략에 앞서 행해진 두 차례 여진정벌 가운데 제1차 정벌과 관련 있는 기사로 여진의 고려·송에 대한 태도와 고려의 대여진정책의 일면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즉 그것은 성종이 송 사신 韓國華에게 여진문제를 해명한 기사이다.509) 이것은 성종 2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그 내용을 종합해 보면, 거란이 女眞(鴨綠女眞) 討伐과정에서 德昌(博川 부근)·威化(雲山)·光化(泰川) 등지까지 추격해 와서 월경하여 여진인을 잡아간 듯한데 이 때에 고려는 거란의 작전에 대해 방관 내지는 묵인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진인들의 고려에 대한 태도는 더욱 경색되고 적대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 뒤에 刑官御事 李謙宜가 압록강에 관성을 쌓으려다 여진의 침해를 받아 이겸의는 사로잡히고 돌아온 군사는 3분의 1도 안되었던 사건이 발생했다.510)
더욱이 여진인들은 고려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보여 두 차례나 거란의 침입 사실을 고하며 구원군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고려가 오히려 허위사실로 의심하여 구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가 크게 된 것에 대해 분노하였다. 고려가 여진의 보고를 믿지 않은 이유는 ‘욕심스럽고 거짓이 많은’ 그들의 성격 때문이라고 하나 전후 내용으로 볼 때 고려가 거란과의 충돌을 피해 중립을 지키려 한 태도에 기인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란과의 전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려가 이렇듯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거란 방어에 여진 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고려조정의 대여진정책의 미숙성에도 연유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이 사건의 결과로 이 지역 여진인들은 고려와 소원했던 것과는 달리 송과의 친숙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송에 조공한 여진은 압록여진(빈해여진)으로 압록강 하류유역에서 흥기한 독립세력이었다. 이들이 발해를 건너 송과 통교하며 거란에 적대했기 때문에 마침내 거란의 토벌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고려의 북진과정에서 축출된 여진인도 이 세력에 속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려와의 사이는 원만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고려와 압록여진은 송의 중재노력에도 불구하고 원만한 사이가 되기 어려웠다.
거란의 제1차 여진정벌이 있은 지 2년 뒤, 거란의 성종은 제2차 여진정벌을 단행하고 통화 4년(986) 정월에는 마침내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10여 만의 여진인 포로와 20여 만 필의 말을 노획하였다.511) 이로부터 압록여진지역과 정안국 지배하에 있었던 전지역이 다시 거란의 기미하에 들어가게 되고 교통로를 잃은 고려와 송과의 관계는 더욱 요원해졌다. 압록여진은 성종 11년 (992)에 다시 거란에 보복하기 위해 송에 거란정벌을 청하는 表文을 올리고 대거란 반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송 태종의 미온적 태도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마침내는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내공하며 완전히 그 예속하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512)
이리하여 고려 성종 10년(991;거란 聖宗 統和 9) 무렵에는 압록강유역 일대 에 걸친 전 여진부족은 모두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복속하게 되자 거란 성종은 압록강안 威寇·振化·來遠의 3성 등에 고려정벌을 위한 전진기지를 만들고 침입준비를 완료하였다.513)
성종 12년에는 거란의 제1차 고려침입이 단행되었으나 고려로부터 송과의 단교와 조공약속만 얻어냈을 뿐 거란은 지난 통화 2년(984) 2월의 제1차 여진정벌에서 확보한 강동 280리의 여진 거주지를 고려에 양도하고 회군하였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고토회복을 서둘러, 마침내 여진족을 축출하고 이른바 강동 6주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활근거지를 빼앗기고 유랑하게 된 여진족에 대해 고려는 강경과 회유의 양면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던 듯하다.
그러나≪고려사≫등의 사서에는 이 시기에 있어서 회유책을 실시한 내용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거의 남기고 있지 않다. 그런데 축출된 여진의 입장에서는 고려와 투쟁하여 생활근거지를 되찾거나 아니면 고려에 투항하여 새로운 생활터전을 마련하거나 하는 두 가지 중 한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강동 6주의 수복은 거란의 양해 아래 행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 대부분의 여진인은 처음에는 거란 지배지로의 이주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압록강 서쪽의 반독립적 여진자치지역이나 고려 동북쪽의 비교적 거란의 간섭이 적은 여진지역으로 옮겨가기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주해 간 여진부족의 세력은 초기부터 어느 시기까지는 저항력이 약화되어 고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을 것이나, 강제로 쫓겨나 이주해 간 부 족들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들에 의해 고양된 고려에 대한 적개심이 여진족 사이에 널리 파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강동 6주 수복 이후 거란의 제1차 고려침입이 경과할 때까지의 시기에 있어서 고려의 대여진정책은 여진의 침입을 예상하며 방어와 침략예방에 주력하는 강경책이 실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 결과 고려 성종 13년(994) 이후 현종 초까지의 20여 년의 기간에≪요사≫에 여진·철리의 來貢기록이 빈번히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고려사≫에는 어떤 기사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뿐만 아니라,≪요사≫에 여진이 거란에 良馬 만 필을 진상하고 고려원정에 참여할 것을 청한 기록514)까지 있는 것을 보면 고려와 여진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악화되고 경색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현종 즉위 이전의 소원했던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이러한 대외적 원인 이외에 고려가 자체적으로 안고 있던 대내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즉 현종으로부터 경종에 이르기까지 고려정부의 심한 내부 분열과 투쟁으로 인해 적극적인 북진정책과 효율적인 대여진정책이 추진될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더욱이 성종대에 와서도 崔承老의 건의에 따라 가장 시급한 현실문제인 국가체제의 정비 등 내실에 힘쓰게 되면서 대외문제보다 대내정책에 보다 더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북진과 여진기미정책은 미온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려 태조 즉위초부터 추진된 북진정책은 대체로 그 뒤 역대 왕들에게도 계승되어 성종 초에는 고려의 영역이 청천강을 넘어 평북의 박천·영변·운산 등을 거쳐 압록강 하류의 일부지역에 이르게 되었다.
<崔圭成>
486) | ≪高麗史≫권 2, 世家 2, 정종 3년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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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 | ≪遼史≫권 1, 本紀 1, 太祖 上. 한편 女直과 女眞은 동일 명칭으로 前者는 Jurchin의 語尾 ‘N’이 탈락되어 표기되었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遼興宗의 이름인 宗眞을 피하기 위해서 直으로 쓰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
488) | 小川裕人,<三十部女眞に就いて>(≪東洋學報≫23-4, 1936. 8), 561∼601쪽. |
489) | 李龍範은 粟末靺鞨이 고구려에 쫓겨 그 추장 突地稽가 遼西의 朝陽에서 隋陽帝의 보호를 받고 있던 점으로 미루어 속말말갈을 발해의 건국자로 기술하고 있는≪新唐書≫渤海傳 등의 중국 사서의 기사에 많은 의문점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李龍範,<高句麗의 遼西進出 企圖와 突厥),≪史學硏究≫4, 1959). |
490) | 徐夢莘,≪三朝北盟會編≫기사를 종합해 보면 정치적 통일이 없이 部族的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
491) | ≪高麗史≫권 1, 世家 1, 태조 4년 2월·4월. |
492) | 小川裕人, 앞의 글 참조. |
493) | ≪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2년 7월 계사. |
494) | ≪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2년 9월 을미·현종 21년 5월 을묘. |
495) | ≪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3년 2월 갑진. |
496) | 徐夢莘,≪三朝北盟會編≫권 3. |
497) | ≪遼史≫권 15, 本紀 15, 聖宗 開泰 원년. |
498) | 津田左右吉,<尹瓘征略地域考>(≪滿鮮歷史地理≫2, 1913), 105∼113쪽. 池內宏,<高麗朝に於ける東女眞の海寇>(≪滿鮮史硏究≫中世篇 2, 吉川弘文館, 1937), 265∼348쪽. |
499) | 小川裕人, 앞의 글 참조. |
500) | ≪三國史記≫권 50, 列傳 10, 甄萱. 池內宏은 고려초에 보이는 鐵勒은≪唐史≫에 보이는 鐵利와 다르다고 보고 鐵勒 앞에 僞字를 더하여「僞鐵勒」이라고 하였다(池內宏, 앞의 글). 하지만≪宋會要≫의 鐵勒,≪遼史≫의 鐵驅와 마찬가지로≪唐史≫의 鐵利는 모두 동일한 종족에 대한 異稱으로 봐야 할 것이다. |
501) | ≪高麗史≫권 2, 世家 2, 태조 19년 9월. |
502) | ≪高麗史節要≫권 3, 현종 12년 3월. |
503) | ≪新唐書≫권 219, 列傳 144, 北狄, 黑水靺鞨 참조. |
504) | ≪文獻通考≫권 327, 四裔考 4, 女眞. |
505) | 三上次男,<新羅東北境外に於ける黑水·鐵勒·達姑等の諸族に就いて>(≪史學雜誌≫50-7, 1939. 6). |
506) | “夷狄君臣의 성명과 관작은 혹 書하기도 하고 혹 否하기도 하니 반드시 갖출 필요는 없다”(≪五代史≫권 1, 梁 本紀 1, 太宗 開平 원년 5월). |
507) | ≪遼史≫권 2, 本紀 2, 太祖 下, 神■ 4년 2월조에 “修遼陽故城 以漢民渤海戶實之 改爲東平郡”이라 한 기사가 보인다. 신책 4년은 919년으로 忽汗城함락 7년 전의 일이다. |
508) | ≪宋史≫권 491, 列傳 250, 外國 7, 定安國條에서 扶餘府가 契丹을 배반하고 定安國과 힘을 합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509) | ≪高麗史≫권 3, 世家 3, 성종 4년 5월. |
510) | ≪高麗史節要≫권 2, 성종 2년조 참조. |
511) | 和田淸,<定安國に就いて>(≪東亞史硏究≫, 東洋文庫, 1955), 161∼189쪽 참조. |
512) | ≪宋史≫권 5, 本紀 5, 太宗 淳化 3년. |
513) | ≪遼史≫권 13, 本紀 13, 聖宗 統和 9년 2월. ≪續資治通鑑長編≫권 32, 太宗 淳化 2년. |
514) | ≪遼史≫권 15, 本紀 15, 聖宗 統和 28년 10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