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법상종의 대두
가) 고승의 배출
현종대에 玄化寺가 개창되면서 법상종이 크게 일어났다. 현종은 왕건의 아들인 安宗 郁과 경종의 妃였던 獻貞王后 皇甫氏 사이에 태어났다. 그러나 안종은 泗水縣(지금의 泗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고, 헌정왕후도 현종을 낳고는 곧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 현종은 獻哀王后의 핍박을 받아, 12세에 법상종 사찰인 崇敎寺에 출가하였다. 이후 三角山 神穴寺로 옮겼고 여기에서 현종은 승려들의 보호를 받아 시해의 음모를 여러 번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즉위한 현종은 안종의 묘를 사수현에서 개경 靈鷲山 아래의 乾陵으로 옮기고, 그 원찰로서 현화사를 개창하여 부모의 명복을 빌었다. 고려 중기에 법상종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바로 현화사의 개창이 계기가 되었다.
법상종은 현화사를 중심으로 왕실과 연관하여 그 종세를 급속도로 확장하게 되었지만, 문벌세력과도 연계되었다. 현종은 즉위 후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南遷하는 도중에 安山 金殷傅의 딸을 취하여 妃로 삼았다. 김은부는 仁州 李氏와 인척이어서 뒤에 현종은 인주 이씨와도 중첩된 혼인을 맺었다. 안산 김씨와 인주 이씨는 삼각산 남쪽의 한강 유역을 중심한 토호들이었는데, 이들은 법상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094) 그런가 하면 현화사의 창건은 崔士威가 담당했는데, 이후 水州 崔氏 가문도 법상종과 깊이 연고되어, 증손인 尙之는 승통이 되었고, 현손인 觀奧도 법상종의 승려로 활약하였다. 현종 이후 문벌세력으로 성장하여 왕실의 외척이 된 인주 이씨는 대대로 법상종 승려를 배출하였다. 법상종은 이들과 연결된 세속의 후원세력을 갖게 되었다.
현화사를 창건함과 동시에 그 곳에 주석한 자는 大智國師 法鏡이다. 그는 三角山 三川寺의 주지였는데 현화사 주지로 봉해지면서 왕사가 되었다.095) 이것은 아마 현종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시절에 삼각산에서, 그와 특별한 인연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부터 현화사는 학도들이 몰려와 1년이 못되어 1,000명이 넘는 대사찰이 되었고, 당시의 고려 불교계에서 가장 융성한 교단으로 발전해 갔다.
고려시대에 법상종이 떨치게 되는 것은 慧炤국사 鼎賢(972∼1054)에 의해서이다. 정현의 속성은 이씨이며 어머니는 김씨이다. 처음 그는 光敎寺의 忠會에게 나아가 출가하였으며, 漆長寺(일명 七長寺)의 融哲에게서 唯識學을 배우게 되었다. 정현은 이곳을 본사로 활동했으며 덕종 때는 法泉寺의 주지를 했다. 지금의 原州郡 法泉里에 있던 이 절은 당시 법상종 사찰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인지, 이어 그는 현화사 주지가 되어 법상종 교단을 이끌게 되었다. 특히 靖宗 때에는 삼각산에 沙峴寺館을 개창하였는데, 뒤에 국가의 후원을 받아 弘濟院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문종 2년(1048)에 왕사에, 문종 8년 국사에 봉해졌다. 그의 문하에 靈念·昢雲·仁祚 등의 제자가 있었으며, 특히 영념은 뒤에 현화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정현 다음으로 현화사의 주지가 된 사람은 智光국사 海麟(984∼1070)이다. 해린은 속성이 原州 元氏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元吉, 아버지는 元休로서 모두 향리였으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려서 李守謙 밑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출가의 뜻을 품고 법천사의 寬雄에게 나아가 유식학을 전수받았다. 해린은 법천사를 본사로 활동하였는데, 개경의 海安寺나 水多寺 등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문종 2년(1048)에는 李子淵이 다섯째 아들인 소현을 그의 제자가 되게 함으로써, 법상종 교단은 대문벌 귀족인 인주 이씨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문종 8년에 그는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문종 10년에 왕사가 되고 문종 12년에 국사가 되었다. 해린의 문하에는 1,370여 명에 달하는 제자가 있었다.
고려 법상종이 법맥을 갖추면서 융성하게 된 것은 慧德王師 韶顯에 의해서이다. 그는 11세에 海安寺의 해린에게 출가하였다. 문종 23년(1069)에는 王興寺 大選場에서 급제하였고, 문종 25년에는 해안사의 주지가 되었다. 문종 33년에는 金山寺로 옮겨 주지하였으며, 선종이 즉위하자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소현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에 廣敎院을 창설하고 慈恩 窺基가 지은≪法華玄讚≫·≪唯識述記≫등 章疏 32부 352권을 고증 간행하였다.096) 소현이 유식학의 장소 등을 간행하여 유통케 한 것은 신라 말 이래 침체되었던 법상종을 선양한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의천이 화엄종 입장에서 장소를 수집하여 속장경을 간행한 것과 비교될 만하다.
소현은 현화사에 주석하면서 전국의 법상종 사찰을 보다 잘 통어하고 있었으며 현화사 안에 繕理官을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석가여래 및 玄奘·窺基 二師와 더불어 해동의 六祖像을 그려서, 법상종의 각 사찰에 봉안하게 했다.097) 소현이 정한 해동 6조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다만 법상종의 연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의 文皇 때에 신라왕의 주청으로 瑜伽論 일백권을 보내와 … 점점 이 땅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미 원효법사가 앞에서 이끌었고 太賢大統이 이를 이어서, 이후에 燈燈이 전해져서 世世로 法嗣가 흥하게 되었다(<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299쪽).
이로 보면 법상종 6祖 중 元曉와 太賢이 들어있음이 분명하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4조는 圓測·道證·憬興·眞表로 추존되기도 한다.098) 이와는 달리 소현이 법상종의 법맥으로 해동 6조를 성립시켰기 때문에, 나머지 4조 중 제6조는 그의 스승인 해린을, 제5조는 정현을, 제4조와 제5조는 寬雄과 진표를 들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099) 소현이 해동 6조의 법맥을 정하여 그 화상을 전국의 법상종 사찰에 걸게 한 것은 법상종 교단의 확립과 연관하여 중요하게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법상종 교단은 태현계와 진표계로 나뉘어 있었다. 전자는 궁예로 이어지면서 고려 초에 그 법맥이 계승되지 못했으며, 후자에 속한 법맥이 소현에게로 이어져 왔다. 소현은 법상종의 법맥을 재정비하면서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 귀족불교를 대변하고 있었다.
소현의 문하에는 1,800여 명에 달하는 제자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導生僧統 窺가 주목된다. 그는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 의천의 同母弟이다. 규는 문종 24년(1070)에 현화사 소현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그와 소현은 외숙과 생질의 관계였다. 규는 선종 2년(1085)에 法住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예종 6년(1111)에는 金山寺 주지가 되었다. 다음해인 예종 7년 8월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巨濟縣에 귀양가서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의천에 비해 지방의 사찰을 전전하다가 불운하게 일생을 마쳤다. 그 외에 重大師 闡祥과 三重大師 順眞이 있었다.100) 천상은 현화사 주지를 역임하다가 인종 19년(1141)에 입적하였고, 순진은 淸州 金氏로서 삼촌인 英念과 조카인 德謙과 함께 현화사의 승려였으나 숙종 즉위를 전후하여 입적하였다.
나) 법상종의 사상경향
현상계의 차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법상종 사상은 하찮은 미물이라도 그 존재 가치를 부여하려 한다. 이러한 사상은 그대로 인간관계에 적용되어 根機에 利鈍이 있다고 하며, 둔한 근기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맞는 수행을 통해 성불하게 되며, 반드시 利根을 거쳐 성불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법상종 사상의 이러한 특징이 그 사회의 중류 이하의 신분에 속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져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중대에서부터 고려 중기에 걸쳐 활동한 법상종 승려들은 대체로 중류 이하의 신분출신이었다.
신라 법상종 중 고려시대에도 그 법맥이 계승되고 있었던 것은 미륵과 지장의 兩尊을 받드는 진표계 교단이었는데, 이 교단에서는 占察法이 성행했으며 아울러 엄격한 계율이 강조되었다. 고려 중기에 대두된 법상종에서도 계율이 중시되었다. 성종 15년(996)에 정현은 彌勒寺의 승과에 임하면서, 黙照나 話頭와 같은 선문을 배격하였으며 계를 지켜 가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속리산 아래의 大川에서 고기잡이하는 사람을 만난 정현은 곡식으로 그가 잡은 고기를 바꾸어 방생하였다.101)
잡은 고기를 방생할 정도로 법상종에서 강조하는 계율은 엄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율은 미륵이 說主인 瑜伽菩薩戒였다. 다음 기록이 이를 알려준다.
① 彌勒尊像을 그려 완성시키고 (결략) 승려들을 모아 禮懺하게 하여 귀의시켰다. … 彌勒如來의 各號를 念하면서 戒를 넓게 펴려했다(<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300∼301쪽).
③ 戒定을 연마하고 慈氏를 본받아 그 분신으로 행동하려 했다(鄭惟産, <原州法泉寺贈諡智光國師玄妙之塔碑>,≪朝鮮金石總覽≫上, 284쪽).
미륵여래의 이름을 念하면서, 넓게 펴려 했던 소현의 戒行은 유가보살계였다. 미륵의 분신으로 행동할 만큼 미륵의 감화를 생각하면서 戒定을 연마하였으므로, 해린도 유가보살계를 닦고 있었다.
현상계의 차별을 그대로 인식하려는 법상종사상은 개체의 존재의미를 크게 부여하는 특성을 지녔다. 하찮은 미물이라도 그 독특한 영역을 가진다. 그리하여 非情物인 水·火·山·岩 등이 인간을 위해 설법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비정물도 정물과 같이 성불할 수 있게 된다. 본래「非情成佛」의 근거는 物과 주체를 구별하지 않으려는 데 있으며 色心을 동일하게 보려는 데서 나왔다. 이러한「色心不二」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법상종사상을 변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법상종사상은 色界에서 空觀界에로까지 그 인식의 폭을 확대시켜 갔다.
법상종사상의 이러한 면은 화엄종 내지 다른 불교종파와의 융회를 가능하게 했다. 무정과 비정은 서로 통하는 것이고 분별이 없기 때문에, 법상종의 非情說法은 圓敎 내에서 정물과 비정물이 모두 회통할 수 있게 한다. 이와 같이 법상종사상이 원교로 포용되어 화엄사상과 융회될 수 있게 되면서 新法相사상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이와 구별되는 그 이전의 법상종사상은 舊法相사상으로 관념되었다.
구법상사상에서는 五性各別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물 자체의 의미가 추구된 반면, 그것의 회통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원측법사는 “善種은 善果, 惡種은 惡果를 生한다”102)고 할 정도였다. 이와는 달리 신법상사상에서는 “三性이 卽 三無性이다”103)라고 했는데, 無性은 진공이기 때문에 대소 동이를 초월하므로, 결국 3성이 하나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신법상사상의 융회적 성격은 법화나 천태의「廻三歸一」사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고려시대 교학불교 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성상융회사상의 성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094) | 許興植,<瑜伽宗의 繼承과 所屬寺院>(앞의 책), 2l6쪽. |
---|---|
095) | “以玄化寺僧法鏡乃王師”(≪高麗史≫권 4, 世家 4, 현종 11년 10월 을축). |
096) | <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朝鮮金石總覽≫上), 299쪽. |
097) | 위의 글, 300쪽. |
098) | 許興植, 앞의 책, 215쪽 주 21. |
099) | 金杜珍,<高麗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1981), 218∼219쪽. |
100) | 이들 외에 법상종 승려로 祐翔·尙之·世梁 등이 알려져 있다. 또한 靈念은 英念과 동일인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
101) | 金 顚,<七長寺慧炤國師塔碑>(≪朝鮮金石總覽≫上), 275쪽. |
102) | 均 如,≪敎分記圓通鈔≫권 7, 8葉 右. |
103) | 均 如, 위의 책 권 6, 2葉 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