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불교계의 모순
가. 거사불교의 유행
고려 중기 문벌귀족이 대두한 사회에서는 선종세력이 약화된 반면, 교종 특히 법상종과 화엄종세력이 강성하여 양립하였다. 두 교단이 대립하면서 싸우는 속에 화엄종과 제휴하여 천태종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 이러한 정통의 종파 불교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흐름으로서 이른바「居士佛敎」가 있었다. 고려 귀족사회에 불교가 크게 융성하여 문인관료는 거의 모두 불교와 관계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거사로 일생을 보내거나 심지어는 아예 출가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려 중기의 문벌귀족 출신 인물 가운데 거사로서 유명했던 사람은 李資玄·李䫨·尹彦頣·郭璵 등이다.
그 중 이자현은 거사불교의 전형적인 인물로서, 당시 최대 문벌인 仁州 李氏 출신이면서도 일찍이 벼슬을 버리고 淸平의 文殊院에 거주하며 청평거사라 自號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佛理의 연구와 참선의 생활로 일생을 보냈다. 이오도 인주 이씨 출신으로 예종 때에 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 守太保門下侍郎으로 은퇴하기까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도 비교적 순탄하게 관직생활을 보냈으나 녹을 받는 것 외에 다른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불경과 章疏를 읽고≪金剛經≫을 좋아하여 금강거사라고 자호하였다.104)
윤언이는 당대 문벌귀족인 坡平 尹氏 출신으로 尹瓘의 아들이다. 재상을 역임하였던 그도 만년에 불법을 매우 좋아하여, 치사한 후 파평의 金剛齋에 살면서 스스로 금강거사라 불렀다. 일찍이 그는 승려 貫乘과 더불어 空門의 벗을 삼아 생사에 초연하였다. 곽여는 예종이 태자로 동궁에 있을 때 그 속관이었는데 예종이 즉위하자 사직하고, 城東의 若頭山에 東山齋를 열고 처사라 칭하고 있었다. 당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도 대체로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한 사람으로 權適이나, 龜山寺의 曇秀禪師와 교류하였던 金富轍·洪灌 등을 들 수 있다.
곽여에게서 뚜렷이 나타나지만, 그들의 불교사상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은둔적 성격을 지녔다. 곧 이자현의 사상은 불교와 도가사상이 융합된 과도기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답적이며 은둔적인 성격을 가진 거사불교는 이른바「竹林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105) 그리고 무신란 이전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안정 속에서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문벌귀족사회의 모순 속에서 점차 융성하게 되었다. 이자현은 관직을 버리고 속세를 벗어나고자 임진강을 건너면서, 스스로 “이번에 가면 다시는 京城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맹세하였다.106) 그가 다시 개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것은, 그의 일족인 李資義가 왕실을 압도하고 권력을 독점하는 비리를 경험하면서, 앞으로 닥칠 사회모순을 예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자현뿐 아니라 당시 문신귀족이 거사불교에 빠져드는 모습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이자현은 청평산에 은둔하여 있으면서 선의 수행에 관심을 가져, 예종에게≪心要≫1권을 저술하여 올렸다. 그것은 물론 선종사상을 다룬 저술이며, 그의 다른 저술인≪禪機語錄≫1권도 선종사상에 관한 것이다. 그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하고 있다.
≪雪峰語錄≫을 읽었는데, ‘모든 天地가 눈〔眼〕이다. 너는 어디에 쭈그리고 앉았느냐’는 말을 듣고는 번쩍 깨달았다(金富轍,<淸平山文殊院記>,≪東文選≫권 64).
이로 보면 청평산에서의 이자현의 생활은 오히려 선 수행에 가장 비중이 두어졌고, 그러한 경향은 다른 거사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107)
거사들이 선 수행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교종계의 상황에 대해 품고 있던 회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사회가 점차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교종이 번성하지만, 그것은 왕실 내지 문벌귀족가문과 밀착되어 여러 가지 폐단을 낳게 되었다. 고려 중기 왕실과 인주 이씨 사이에 있었던 정치적 알력이 불교계로 확산되어, 의천이 흥왕사에 있지 못하고 해인사로 퇴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거사들은 그들이 처한 정치상황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문벌귀족과 왕실의 정치적 싸움이나 문벌귀족 사이의 권력투쟁 등이 재현되는 속에, 그들은 정계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교종불교와 깊이 연관된 인물들임을 유념해야 한다.108) 아마 문벌귀족으로서의 출신 배경이 그들로 하여금 교종에서 완전히 벗어나 선종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거사들은 문벌귀족사회의 비리를 예견하고 그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교종불교에서 벗어나려고 선종 속으로 빠져들었지만, 거기에서 미련없이 떠나지 못하는 한계성을 가진 과도기적 불교사상을 가졌다.
104) | ≪高麗史≫권 95, 列傳 8, 李子淵 附 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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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 崔柄憲,<高麗中期 李資玄의 禪과 居士佛敎의 性格>(≪金哲埈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3), 960쪽. |
106) | 金富轍,<淸平山文殊院記>(≪東文選≫권 64). |
107) | 崔 滋,≪補閑集≫권 上(≪高麗名賢集≫2,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73), 112쪽에 “尹文康公彦頣 晩節尤嗜禪味 退居鈴平郡金剛齋 自號金剛居士”라 하였다. 그 외≪金剛經≫을 좋아한 李䫨나 龜山寺에서 曇秀禪師와 같이 교류한 郭璵도 오히려 禪修行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
108) | 이자현이 거주한 文殊院은 광종 24년에 白岩禪院으로 창건되었다. 禪宗의 전통을 지닌 백암선원은 뒤에 普賢院으로, 다시 문수원으로 개칭되었다. 물론 불당이나 암자에「聞性」이나「見性」의 이름이 붙여지기는 했으나, 本寺 자체가 문수원으로 개칭된 것은 이자현의 사상이 아무리 禪宗쪽으로 기울어져도, 그것의 주된 것은 교종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