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종대 이후 화엄종·법상종의 대두와 불교계의 모순
(1) 귀족불교의 융성
가. 화엄종의 성행
가) 화엄학파의 계승
고려 초의 화엄종은 일단 균여에 의해 정리되었다. 신라 말에 화엄종은 해인사에 주석한 希郎과 觀惠가 서로 대립하면서 각각 北岳과 南岳으로 나뉘어 다투었는데, 북악의 法孫인 균여가 남·북악파의 교리를 통합하여 융회불교인 성상융회사상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균여가 활동하던 시기에 화엄종단 내에 대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교선융합의 경향을 가진 法印國師 坦文은 균여와 특별히 교류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의 스승인 信嚴大德과 문도인 靈損·一光 등과 더불어 華嚴宗趣를 내세우고 있었다.
균여는 歸法寺에 주지로 있으면서, 같은 절에 거주하는 正秀와 대립하고 있었다. 균여가 토착신앙을 강하게 내세웠다면 정수는 어쩌면 순수교리적 신앙을 내세웠는데, 正秀房을 중심으로 여기에 모인 한무리의 세력이 균여를 참소하다가 처형되었다.078) 정수도 화엄종 승려였지만 탄문과 연관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광종대 이후 균여나 탄문의 법맥이 계승되는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탄문은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의 발자취를 찾아 수련했으며,079)≪화엄경≫을 풀이한 후인의 이론서보다 경전에 몰두하였고≪大般若經≫의 講主를 맡았다. 그의 교학은 화엄학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다른 경전에도 폭넓은 관심을 보인 점에서, 원효의 사상에 접근하여 있다.080) 이로 보면 탄문은 뒷날 의천의 화엄교학과 비슷한 사상경향을 가졌다. 화엄의 입장에서 선종사상을 융합하려 한 탄문의 사상은 바로 의천의 사상과 맥이 닿을 수 있을 듯하다. 특히 탄문은 九龍山寺에 오래 주석하였는데, 그 곳에서 화엄을 강론하였을 뿐 아니라≪화엄경≫3본을 寫經하기도 했다.081) 구룡산사는 뒷날 의천의 스승인 景德國師 爛圓의 비가 세워지는 구룡산 福興寺였을 것으로082) 생각되며, 따라서 탄문과 난원의 연결을 생각할 수 있다.
균여의 계승자로 昶雲이 있다. 창운은 문종 27년(1074)에 균여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를 赫連挺에게 전해 주었으며, 이를 토대로 혁련정은≪균여전≫을 완성하였다. 창운은「神衆經註主」로 불렸으므로≪神衆經≫을 중요시한 인물이었다.≪신중경≫은 80권 화엄경에 포함된 밀교적인 경향이 강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그가 사상적으로 神異나 토착신앙을 중요시한 균여를 정통으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083) 창운은 南原人이고 광종 때에 급제한 柳邦憲의 손자이다. 그는 문종 8년(1054)에 王輪寺의 選場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고, 선종을 위해 弘護寺를 창건하였으며 숙종 9년(1104)에 입적하였다. 그의 문도로 308명이 있었는데, 그 중 경전의 뜻에 정통한 자가 100여 인이었다.084) 이로 보면 창운은 화엄종 내에서 종파를 이룰 수 있을 정도의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창운이 활동하던 당시는 의천의 화엄종이 큰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던 때였다. 의천이 따르며 배우고자 하니 창운은 그를 깨우쳐 주었는데 또한 의천은 一代 宗匠의 하나가 되었다고 하였다.085) 곧 의천은 창운과 구별되는 일문을 이룬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창운은 개경 중심의 고려문화가 난숙기로 접어든 시기에 살면서, 토착적인 신이를 강조한 고려 초기의 화엄사상 경향을 계승하였다. 창운과 함께 균여를 흠모하여 그의 전기를 남겨준 혁련정도 이러한 불교경향에 동조하였던 인물이었다.
의천을 중심으로 한 화엄종파는 가장 번성하였고 또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의천의 師僧은 경덕국사인 난원이다. 그는 당시 문벌인 安山 金氏로서 金殷傅의 아들이며 병부상서를 지낸 金忠■은 그의 형이다. 난원의 스승은 弘睡인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난원이 직접 의천을 지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난원의 문인이었던 창운·理奇·樂眞 등이 의천에게 보다 더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元景王師 樂眞은 속성이 申氏이고 利川郡의 호족출신이었다. 문종 20년(1066)에 난원이 입적하고 대각국사가 그 법맥을 잇자, 낙진은 의천의 문하로 나아갔다. 곧 낙진은 知己로서 또는 협력자로서 의천과는 법형제였다. 숙종이 잠저에 있을 때 백일도량을 열고, 낙진으로 하여금 그것을 주재하게 하였다. 또한 의천이 몰래 상선을 타고 송나라에 건너가자, 왕명을 받은 낙진이 慧宣·道隣 등과 더불어 그를 쫓아 갔으나 뒤따르지 못했다. 杭州 惠因院 晋水法師는 선종 3년(1086)에 귀국하는 의천편에 부쳐 향로를 낙진에게 전하기도 했다.086) 숙종 5년(1100)에 낙진은 왕명을 받고≪釋苑詞林≫250권을 편찬하는 것을 도왔는데, 문인인 覺純으로 하여금 그것을 詳定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經律論 등 三藏 5,450권을 늘 강독하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의천에 관한 자료는 많이 전하는데, 비문으로<興王寺大覺和尙墓誌>, 金富軾이 찬한<靈通寺大覺國師碑>와 林存이 찬한<僊鳳寺碑>가 있다. 그 가운데 화엄종의 입장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은<영통사비>이며,<선봉사비>는 천태의 입장에서 찬술된 것이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중국에 들어가 晋水 淨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의천은 정원을 따라 혜인원에 머물면서 경론 7,500여 권을 조판 인쇄하여 비치하였다. 귀국 후에도 그는 혜인원에 대한 후원을 계속하였고 그에 연유하여「慧因高麗華嚴敎寺」로 불리웠다. 의천은 정원을 통해 많은 불전을 수합할 수 있었다.
숙종 6년(1101)에 의천은 개성 洪圓寺에 九祖堂을 짓고 화엄의 九祖師像을 모셨는데, 그것은 馬嗚·龍樹·天親·佛陀·慧光·杜順·智儼·法藏·澄觀이다. 이것은 정원의 七祖說을 모방한 것이지만, 천친·불타·혜광을 추가한 대신 宗密을 제외시켰다. 이 점은 의천의 화엄사상이 두순에서 법장을 거쳐 징관에 이르는 성상융회적 사상에 유념하였음을 알려준다. 천친이나 혜광 등 唯識이나 地論宗 승려가 포함된 것은 性과 아울러 相을 유념하려는 의천의 사상경향과 연관된다. 다만 정원 당시 중국 화엄종은 종밀을 중요시하면서 교선일치의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의천은 오히려 종밀을 제외시킴으로써 법장이나 징관대의 성상융회나 성상결판의 사상에 집착하였다.
의천의 제자로 두드러진 인물은 無㝵智국사 戒膺이다. 그는 太白山 覺華寺를 개창하고 많은 문도를 키웠으며 소백산 남쪽의 龍壽寺는 그의 제자들이 개창한 절이다. 숙종의 넷째 아들로서 출가한 圓明국사 澄儼도 의천의 제자이다. 그는 인종대에 흥왕사에 10여 년을 주석하면서 화엄의 큰 뜻을 펴고 있었다. 그 외에 의천의 행장 10권을 쓴 慧素나 문집을 정리한 慧觀은 모두 그의 문도이다. 의천의 또 다른 제자로 敎雄이 있었다. 그의 제자인 通炤僧統 智偁은 주로 의종대에 활동하였으며, 당시 불문의 영수였다.
균여나 탄문 이후 의천이 등장하기 전에 활동한 圓融국사 決凝이 주목된다. 그는 江陵 金氏가문 출신이며 光律의 아들이다. 정종 7년(1041)에 왕사에 봉해졌으며 문종대에 국사에 봉해졌다. 결응은 浮石寺에 주로 주석하였으며 의상의 법맥이 그에게로 이어졌다.087)≪화엄경≫入法界品을 중시하여 인용하고 있음도088) 그가 義湘系의 실천수행적인 화엄사상을 내세우고 있음을 알려준다. 의상계의 화엄은 균여계의 화엄종파로 이어지는 것이어서, 의천의 화엄종파로 이어지는 것 같지 않다. 의천 당시에 결응의 법맥으로 의상계 화엄종파에 속해 있었던 사람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 결응의 문인은 廣證·元昶·惠英 등 1,438인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결응은 뒷날의 의천과는 구별되는 비교적 큰 세력의 문도를 규합했는데, 그렇다고 이들이 균여계의 화엄종파에 속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나) 균여파와 의천파의 대립
광종대의 화엄종은 균여로 대표되지만, 그와 상당히 성격을 달리하는 탄문이 있었다. 탄문의 사상경향은 오히려 의천의 그것과 비슷한 면을 가졌다. 탄문의 법맥이 의천에게로 꼭 이어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중기에는 의천의 화엄종이 융성하였다. 그는≪新編諸宗敎藏總錄≫을 저술하여 당시까지의 佛典이나 고승의 章疏를 정리하는 작업에서 균여의 저술을 제외시켰다.
의천은 균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다음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海東의 先代 諸師가 남긴 기록은, 그 학문이 精博하지 못하고 억설이 더욱 많음을 한탄하였다. 그리하여 몽매한 後生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어서, 중생이 능히 聖敎로써 거울을 삼아 自心을 보지 못하고 일생 동안 구구하게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세상에서 말하는 均如·梵雲·眞派·靈潤 등 諸師의 책은 잘못된 것이다(義天,≪大覺國師文集≫권 16, 示新參學徒緇秀).
문종대에 불교계 내지 화엄종단을 장악한 의천은 균여파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던 것이다. 문종대를 전후한 시기에 균여파에 속한 화엄종 승려를 많이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균여파도 의천이 견제해야만 할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창운과 혁련정의 활동이 이를 알려준다. 혁련정은 숙종 5년(1100)에 요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예종 즉위년(1106)에는 長樂殿學士 判諸學院事가 되었다. 장락전이나 제학원은 서경의 分司기구로서, 그는 金摯와 더불어 서경을 대표하는 문인이었다.089) 혁련정의 이런 면은 의천과 상반될 수 있다. 혁련정은 의천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고 의천은 김부식과 상통할 수 있는 관계였다. 김부식이 의천의 사상을 계승한 세속인이라면 혁련정은 균여의 사상을 계승한 세속인이라 할 수 있다.090)
균여파와 의천파의 대립은 서경파와 개경파라는 정치적 대립관계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아울러 그것은 균여와 의천의 사상상의 차이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우선 의천은 균여의 性相融會사상과 다른 敎觀幷修사상을 성립시켰다.091) 균여의 화엄사상은 신라 의상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는데, 의천은 중국 화엄종의 정통파인 법장의 화엄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의천이 유학한 晋水 淨源은 법장파를 계승한 인물이다. 의상과 법장은 지엄문하에서 수학한 동학이지만, 그 사상경향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의상이 橫盡法界觀을 주장하여 하나 속에 전체를 융회하려는 사상경향을 가졌다면, 법장은 竪盡法界觀을 주장하여 전체의 구성인 하나 하나의 차별을 부각시키려 했다. 전자가 연기된 모든 법상의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적으로「一」속에 통합된다는 性起趣入을 주장했다면, 후자는 연기된 모든 법상의 실체를 인정하여 그 차별상을 설정하려는 緣起建立을 주장했다. 화엄사상의 구조에 있어서 의상과 법장의 차이는 바로 균여파와 의천파의 그것의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性과 相의 문제는 교학불교 내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입장에서, 화엄종뿐 아니라 법상종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일반적으로 화엄사상에서 균여의 사상을 제외하면, 相의 泯滅을 말하지만 性은 주체로 보기 때문에 민멸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드물다. 법장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려 중기의 법상종 특히 韶顯은 성과 상이 합해져 하나가 되면서도, 상은 물론 성도 민멸되는 것이라 했다. 이러한 법상종의 사상은 균여의 성상융회사상과 맥락이 닿을 수 있다. 현종대 이후 크게 등장한 법상종 승려들은 균여의 사상에 대해 오히려 호의적이었다. 자연 숙종대에 법상종과 대립하고 있던 의천이 균여의 사상을 배격하였다.
천태사상과의 관계에서도 균여와 의천의 입장은 다르다. 의천은 중국에 들어가 慈辯 從諫에게서 천태를 전수받았다.092) 종간은 山家派의 거장인 四明 知禮의 법손이다. 중국의 천태사상은 山家派와 山外派로 나뉘어 淨論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산가파가 이긴 듯했다. 의천 당시에 後山外派가 일어나면서 그 논쟁은 재연되어 열기를 더해 갔다. 산가파가 具相論的이었다면 산외파는 具性論的이었다. 제법상의 차별을 전제로 하는 구상론적 산가파의 사상이 의천의 사상과 가깝다면, 그것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은 구성론적인 산외파의 사상은 균여의 사상과 비슷하다.093)
의천은 법장으로부터 이어지는 중국 정통파의 화엄뿐 아니라, 천태종의 경우도 중국 정통파를 계승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의 사상은 보편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균여의 사상은 광종대의 특수한 정치적 여건과 얽혀서,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융회적이고 토착적 사조를 강조하는 신비적인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고려 중기에 균여파와 의천파가 불교 사상경향에서 뿐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입장 등 여러 면에서 대립하게 되었다.
078) | 赫連挺,≪均如傳≫感應降麗分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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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9) | 金廷彦,<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朝鮮金石總覽≫上, 1919), 225쪽. |
080) | 許興植,<華嚴宗의 繼承과 所屬寺院>(≪高麗佛敎史硏究≫, 一潮閣, 1986), 195쪽. |
081) | 金廷彦, 앞의 글, 225쪽. |
082) | <景德國師墓誌>(許興植 編,≪韓國金石全文≫中世 上, 亞細亞文化社, 1984), 500쪽. |
083) | 許興植, 앞의 글, 195쪽. |
084) | <弘護寺等觀僧統昶雲墓誌>(≪韓國金石全文≫中世 上), 537쪽. |
085) | “時大覺國師 一代宗匠之是一也 亦嘗從而訓之”(위의 글, 535쪽). |
086) | <般若寺元景王師碑>(≪朝鮮金石總覽≫上), 319쪽. |
087) | “相師傳法嗣曁于國師 國師故始末 住此寺焉”(林 顥,<順興浮石寺圓融國師碑>,≪朝鮮金石總覽≫上, 271쪽). |
088) | “華嚴經入法界品云 或見阿彌陀 觀世音菩薩灌頂授記者”(위의 글, 271쪽). |
089) | 許興植, 앞의 글, 196쪽. |
090) | 許興植, 위의 글, 196쪽. |
091) | 균여가 敎觀幷修와는 달리, 중국 초기의 화엄학 즉 지엄과 법장화엄을 그대로 받아들여 경론에만 치우친 관념적 敎學을 성립시켰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崔柄憲,<高麗時代華嚴學의 變遷―均如派와 義天派의 대립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0, 1980, 69쪽). 그러나 실천적인 義湘의 화엄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融會佛敎를 성립시킨 균여의 사상은 관념적인 것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균여는 향가를 지어 僧俗無碍를 주장했으며, 神異한 土着的 사조를 강조했다. |
092) | 朴 浩,<開城興王寺大覺和尙墓誌>(≪朝鮮金石總覽≫上), 294쪽. |
093) | 金杜珍,<均如의 ‘性相融會’ 思想>(≪歷史學報≫90, 1981;≪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3, 272∼27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