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선종계의 움직임
문벌귀족사회가 동요되는 고려 중기에 거사불교가 나타나 선 수행을 병행하는 사상경향을 띠어갔는데, 한편으로는 선종사상이 서서히 퍼져가고 있었다. 특히 예종대에는 선종 승려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해졌다. 그 이유는 우선 예종이 선종에 대한 관심을 가져 慧照 등 선종 승려를 지원하거나 선종 사찰인 安和寺 등을 중수하였으며, 선종 사원으로 자주 행차하였음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예종이 이자겸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원하였던 韓安仁·尹彦頣 등 신진세력은 선종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예종대에 크게 활약한 선종 승려는 혜조국사이다.109) 그는 이자현 등 거사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다. 혜조국사는 예종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유학하여 遼本 대장경 3부를 구해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1부는 定慧寺에 소장하였다. 혜조국사는 개경의 廣明寺·춘천의 華岳寺·전남 승주의 定慧寺 등에 머물렀는데, 정혜사는 그가 직접 창건한 절이다. 이 정혜사는 후일 知訥이 창건한 定慧社와는 다른 절로,110) 뒤에 조계종 승려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제6대 冲止 때에 이르면 정혜사의 혜조도 조계종의 법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혜조국사는 崛山門에 속한 승려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제자인 坦然·之印은 물론 英甫와 영보의 法嗣로 뒤에 龍門寺를 중창한 祖應 및 조응의 법사인 資嚴 등은 모두 굴산문의 승려로 파악된다.111) 그런데 탄연 등은 그의 비석이 명종 2년(1172)에 건립되어 조계종에 소속됨으로써, 혜조의 문도는 바로 조계종으로 그 법맥이 이어졌다. 말하자면 조계종은 예종대에 미세하게 활동하던 선종의 법맥을 이어 받으면서, 고려 문벌귀족사회가 전면적으로 무너지는 무신란을 거치면서 굳건하게 확립되어 갔다.
大鑑國師 坦然은 인종 24년(1146)에 왕사가 되었으며 입적 후에 국사로 추증되었는데, 속성은 손씨이다. 그는 어릴 때 문장을 잘해 세자 시절의 예종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19세 되던 해에 安寂寺에서 출가했으며, 이후 탄연은 禪悅을 동경하여 廣明寺의 혜조국사에게 나아가 선법을 전수받았다. 예종이 즉위한 후 그는 開頓寺·禪岩寺의 주지를 맡았다. 인종이 즉위하자 탄연은 天和寺·善提寺 등을 주지하였으며, 인종 13년에는 普濟寺·帝釋院·瑩原寺 등을 겸하여 주지하였다. 인종 17년(1139)에는 광명사로 이주하여 의종 13년에 입적하였다. 그의 저술로≪四威儀頌≫과≪上堂語句≫가 있었는데 송의 선사 介諶이 이를 보고 찬탄하였다고 한다.
혜조국사의 문인인 廣智大禪師 之印은 예종의 아들이다. 지인은 예종 5년(1110)에 9세로 출가하여 15세에 佛選場에서 합격하였다. 예종 14년(1119)에 法住寺에 머물렀으며, 주로 인종·의종대에 크게 활동하였다. 지인은 의종 3년(1148)에는 광지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그 후 개경에서 멀지 않은 金剛寺에 머물렀는데, 의종은 매일 이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한다. 의종 12년(1158)에 입적하기까지 그는 종친으로서 선종계를 크게 진작시켰다.
혜조를 중심으로 한 그 제자들의 법맥은 대체로 굴산파를 이었다. 이들과는 달리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圓應국사 學一은 迦智山派의 법맥을 잇고 있다.112) 학일은 이씨이며 西原 保安人이다. 11세에 眞藏에게 나아가 출가했으며, 선종 2년(1084)에는 광명사에서 실시한 승과에 합격하였다. 예종 원년(1106)에 迦智寺에 머물렀으며, 그 후 龜山寺·內帝釋院·安和寺 등을 주지하였다. 인종 즉위년에 왕사에 봉해졌으며, 인종 4년(1126)에 雲門寺로 나아가 이후 인종 22년 입적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 학일에 의해 중흥된 가지산파는 그 후 一然에 의해 그 종세를 크게 떨치게 되었다.113)
고려 중기에 서서히 부흥한 선종은 혜조국사를 중심한 굴산파와 학일을 중심한 가지산파로 나뉘었는데, 그 주류는 굴산파 선승들이었다. 당시의 선종은 문벌 중심의 교학불교를 외면하지 않아 교선융합적인 사상경향을 가졌다. 굴산파 선종은 일찍부터 교선융합적인 경향을 띠었는데, 가지산파의 학일도 교선융합적인 사상경향을 가졌고,114) 고려 중기 선종사상의 이러한 분위기는 무신란 이후 조계종의「先悟後修」사상을 성립시키는 데 영향을 주었다.
<金杜珍>
109) | ≪高麗史≫나≪高麗史節要≫에는 예종대에 활동한 禪僧으로 慧照國師는 보이지 않고, 曇眞이 예종 2년(1107)에 王師로, 예종 9년에 국사로 책봉되었음이 나타나 있다. 이로 미루어 曇眞과 慧照國師는 같은 사람일 것이다.≪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慧照국사는 冲止가 지은≪圓鑑錄≫에는 慧炤국사로 나와 있다. 慧炤국사와 慧照국사는 같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다만 慧照국사는 文宗代까지 크게 활동한 七長寺의 慧炤국사와는 다른 인물이다. 곧 이 때의 혜소국사는 법상종 승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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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 知 訥,<觀修定慧結社文>(≪普照國師法語≫). |
111) | 金映遂,<曺溪禪宗에 就하여―五敎兩宗의 一派, 朝鮮佛敎의 根源―>(≪震檀學報≫9, 1938), 162쪽. |
112) | 金相永,<高麗 睿宗代 禪宗의 復興과 佛敎界의 變化>(≪淸溪史學≫5, 1988), 66∼67쪽. |
113) | 金相永, 위의 글, 68쪽. |
114) | 金相永, 위의 글, 74∼7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