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예종의 교육개혁과 국자감
≪고려사≫를 편찬한 史臣은 예종 때의 치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贊을 남겼다.
예종은 천성이 명철하여 일찍이 東宮에 있을 때도 어진 선비를 禮로써 대접하고 또 효도하고 공손함이 독실하였다. 즉위하여서는 밤낮으로 염려하고 부지런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하였다. …學校를 개설하여 生員을 교양하고 淸讌·寶文 兩閣을 설치하여 날마다 문신들과 더불어 6經을 강론하고 武를 쉬고 文을 닦아 禮樂으로 풍속을 이루고자 하였다(≪高麗史節要≫권 8, 예종 17년 4월 을미 史臣贊).
예종은 재위 중에 학교 교육의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또 청연각·보문각을 두어 학문을 권장하였다. 그는 즉위 초부터 새로운 교육질서의 확립을 정책이념으로 제시하여 3京·8牧의 通判 이상 및 知州事와 縣令으로서 문과출신자는 학사업무를 겸하게 하여 지방교육의 권장을 의무화시켰으며,025) 또 당시 퇴락 일로에 있었던 국자감 부흥을 위한 여러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시켰다.
「學」을 세워 賢士를 양성함은 三代 이래로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인데 有司의 의논이 아직 결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신속하게 시행하라(≪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종 2년 制).
≪고려사≫선거지는 위의 기사에 막연히「學」이라 하고 있으나≪高麗史節要≫에 보면「國學」이라고 명백히 나타나 있다.026) 따라서 선거지의「학」은「국학」의 생략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행한 국자감 중흥정책 중 주요한 것을 살펴보면, ①최고학부로서 국자감의 위상 정립(과거응시자의 국자감수학 의무화), ②국자감 건물의 중건과 三舍制度의 운영, ③國學 七齋의 운영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