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초기 국자감의 운영
성종 5년(986)을 전후하여 설립된 국자감은 성종 11년(992)에 국자감 시설을 준공함으로써 최고학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성종은 국자감을 설치하고 그 주변을 禮賢坊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국자감은 선종 때에 이르러 퇴락하여 교육기능의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종은 국자감의 수리를 위하여 文宣王을 順天館으로 이전하였으며, 학생들의 교육도 이곳을 빌려서 임시로 사용하였다.015) 그러나 이 때의 국학의 수리는 완성되지 못하여 국자감학생들은 독자적인 교육시설을 갖지 못하고 순천관의 건물에서 학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종 때에 이르러 예현방의 옛터에 새로이 건물을 복원 준공하여 이전하였다.016)
이것은 인종 원년 國信使로 고려를 방문한 徐兢의≪宣和奉使高麗圖經≫을 통해 알 수 있다.
國子監은 이전에 남쪽 會賓門 안에 있었다. 앞에는 대문이 있는데 榜을 국자감이라 하였다. (그 구조는) 중앙에 宣聖殿을 두고 그 양쪽 행랑에 齋舍를 설치하여 諸生을 거처하게 하였다. 이전의 제도는 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禮賢坊으로 옮겼다. 이로써 학생들이 많이 불어나고 그 제도가 사치스럽게 되었다(徐兢,≪宣和奉使高麗圖經≫권 16, 國子監).
위에서 서긍이 남쪽의 회빈문 안에 있었다는 국자감은 바로 순천관에서 교육할 때의 국자감을 말한다.
교육직제로는≪고려사≫백관지 기록 중 문종 때에 나타나는 직관들이 국자감 설립 초기부터 대부분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방헌은 성종 때에 국자주부와 사문박사 및 國子司業을 역임하였고 성종 8년을 전후한 시기에 송승연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태학조교와 국자박사를 역임하였다. 그리고 國子祭酒의 경우 현종 때에 劉徵弼·徐訥·李可道·黃周亮 등이 나타나고 있다. 또 태학박사는 목종 10년(1007) 10월에 田拱之가 배수받고 있음이 보이고, 國子丞에는 현종 때에 白玄禮가 보인다.017) 이미 국자감 설립 이후 현종대에 이르는 시기에는 國子祭酒·司業·丞·國子主簿·國子博士·國子助敎, 太學博士·太學助敎, 四門博士·四門助敎 등의 교육직제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종 때의 국자감 수학생들은 鄕貢과 연계된 지방호족의 자제였다. 이후 향공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長吏나 백성의 자제도 입학이 허용되었으며 가세가 어렵고 하찮은 자도 능력에 의하여 입학이 가능하였다.018) 그러나 현종 이후 국자감의 입학자격에도 서서히 변화가 수반된다. 즉 현종 15년(1024)에는 지금까지 제한이 없었던 향공의 정원이 고정되고,019) 덕종 때는 國子監試가 시행020) 됨으로써 국자감 입학에도 어느 정도 제재가 가해졌던 것 같다.021)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은 국자감 교육에 변화를 수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자감 교육의 변화를 촉진한 것은 당시 사회 성격의 변화였다. 현종 이후 고려사회는 귀족화의 성향으로 바뀌면서 문종 때를 전후해서는 사회성격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한편 귀족 자제들은 향공들과 더불어 수학하는 것을 꺼렸으며, 또 당시 과거의 進士科 위주로 운영되어 갔음을 감안할 때, 이들은 구태여 국자감에 얽매이면서 과거와 직접 관계가 없는 經學을 수학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국자감 교육을 기피하게 되었고, 때마침 최충의 私塾이 나타나자 “선비와 평민의 자제가 그의 집과 마을에 차고 넘치게 되었다”022)고 할 정도로 많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국자감의 퇴락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최충의 사학이 설립된 지 얼마되지 않은 문종 17년에 국자감은 이미 ‘近多廢業’023) 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마침내 숙종 7년에는 당시의 宰相 邵台輔에 의해 國學廢置論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024)
015) | ≪高麗史節要≫권 1, 선종 6년 8월 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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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예종 14년 7월조에는 “自國初肇立文宣王廟于國子監 建官置師 至宣宗將欲敎育而未遑 睿宗銳意儒術 詔有司 廣設學舍置儒學六十人武學十七人”이라 하였다. |
017) | 申千湜, 앞의 책, 146∼147쪽 참조. |
018) | 申千湜, 위의 책, 126쪽. 朴贊洙, 앞의 글. |
019) | ≪高麗史≫권 74, 志 27, 選擧 1, 科目 1 현종 15년 12월 判. |
020) | ≪高麗史≫권 5, 世家 5, 덕종 즉위년 윤 10월. |
021) | 朴贊洙는 앞의 글에서 이들 제도의 설행으로 國子監은 퇴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
022) |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私學 문종. |
023) |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문종 17년 8월. |
024) |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2, 學校 숙종 7년 윤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