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무신정권의 붕괴와 그 역사적 성격
1) 김준 정권
(1) 김준의 출세
金俊의 집권은 곧 4대 60여 년에 걸친 崔氏武臣政權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최씨가의 마지막 집권자인 崔竩가 고종 45년(1258)에 김준과 그 일파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로써 최씨정권은 막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이 붕괴되었다 하여 곧 무신정치가 끝났다고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종 45년 이후에도 金俊·林衍 등의 무신이 새로운 집권자로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해 나갔다.
≪高麗史≫金俊傳은 그의 아버지인 金允成이 미천한 노비의 신분으로 주인을 배반하고 崔忠獻에 투탁하여 노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高麗史≫의 다른 기록은 고종 45년(1258) 3월에 柳璥과 함께 김준 등이 최의를 죽이고 정권을 국왕에게 돌렸음을 언급하고 있다.112) 간략하기는 하지만 두 기사는 김준의 정치적 출세와 성장이 최씨무신정권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김준은 입신하기 이전부터 노역에 찌들어 있는 평범한 가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下人에게 겸손하고 공경하였다. 또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뭇인심을 얻었는가 하면, 날마다 遊俠子弟와 떼지어 마시고 다녔다.113) 즉 김준이 그의 아랫 사람에게 겸손 공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베풀어 주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마음으로 김준에게 복종했을 것이고, 아마 그들이 바로 김준의 심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김준이 날마다 더불어 떼지어 마셨다고 하는 유협자제라고 일컬어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부류의 인물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들이 노비 신분에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유협자제라고 하는 표현이 시사하는 바를 염두에 두면, 이들은 의협심 강한 젊은이들로 비교적 높다고 할 수 있는 신분층의 자제들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김준에게 일찍부터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아가 이들의 상당한 수가 높은 신분층의 자제였다고 한다면, 그의 부친인 김윤성이 당시에 누리고 있던 사회적 지위도 그만큼 높은 것이었다고 하겠다.114)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김준은 최씨가의 한 무사로서 이해되며, 나아가 “뒤에 반드시 국사를 맡게 될 것”이라고 한 어느 術僧의 예언까지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115)
김준은 崔怡(瑀) 집권기에 출세의 계기를 갖게 되었다. 그가 최이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朴松庇·宋吉儒 등의 추천에 힘입어서였다. 이로부터 그는 최이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그리하여 최이가 출입할 때는 반드시 김준의 부축을 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김준은 南班의 정9품직인 殿前承旨의 관직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최씨가와의 관계는 최이의 신변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게 되면서 각별해지기 시작하였으나, 그가 정계의 중요 인물로 부각된 것은 崔沆의 집권과 관련이 있다. 김준은 최이가 죽은 뒤에 최항이 권좌를 이을 수 있게 결정적으로 기여하였고, 그 결과 노비의 신분으로서는 파격적으로 별장이라는 무반직에 올랐다. 주지하듯이 최항의 권력이양 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최항의 권력계승에는 상장군 周肅의 반발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夜別抄와 內外都房을 거느리고 정권을 국왕에게 되돌리고자 기도했던 것이다. 이때 김준 등 최씨가의 가노들이 중심이 된 70여 인이 최항의 편을 들게 됨으로 해서, 주숙의 기도를 사전에 봉쇄하였다. 최씨가의 사적 군사력이라 이를 수 있는 야별초나 도방의 지지하에 커다란 충돌없이 권력이 이양되었다.116) 그러나 이들 병력은 주숙의 인솔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최항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최항의 권력계승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김준을 비롯한 가노세력이었다. 그러니까 주숙의 본래 의도가 좌절되었던 이유는 김준 등이 동원한 병력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항의 권력계승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역할이라든가 최씨가의 가노들이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군사력은 최씨가의 사병집단의 하나였으며, 또 도방보다도 최씨가와 더 밀착된 것이었다. 이른바 家兵이라 불리워졌던 최씨가의 사병조직에서 적지않은 가노가 활동하였으며, 김준은 가병을 직접 지휘·통솔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본다.117)
비록 최항의 권력계승에서 공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김준이 정치적 역량을 증대해 나갔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는 단지 하급 무관직을 제수받았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한 신분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항의 집권기에 들어서면서 김준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부상하였다. 즉 가병의 군사력을 직접 지휘·동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최씨가에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되어 있던 兵士와 文士들을 장악하였던 문무 관료들을 지휘하는 경우도 있었다.118) 이러한 정치적 역량은 최항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그 후원은 김준에 대한 최항의 신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최항정권이 김준과 같은 심복에게 크게 의존해야 했던 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최항은 최이의 서자로, 그 어머니가 천했기 때문에 최씨정권의 정치적 지배세력에게서 환영받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최이는 그의 후계자로 김약선을 내정하였고 최항을 松廣寺에 출가시켰다. 최이에 의해 김약선이 제거된 후, 최항은 환속하여 최이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계에서 밀려나 있었던 그를 당시의 정치세력이 달가워 할 까닭이 없었다. 적지 않은 관료들의 반발은 최항정권으로 하여금 기존의 정치질서를 개편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최항은 최이대의 정치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세력 확보를 기도하는 정도에 만족하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항이 크게 의존한 것은 그의 심복일 수밖에 없었다. 최항의 권력승계 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김준은 최항의 심복으로서, 그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막강한 실력자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김준에 대하여 일종의 심복 관계를 유지하는 일단의 정치인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최씨정권 아래에서 김준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정치인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는 林衍이었다. 임연은 일찍이 간통죄로 처벌을 받을 뻔 하였는데, 김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천거에 힘입어서 隊正에서 郎將으로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임연은 김준을 항상 아버지라고 불렀고 김준의 아우 金承俊을 숙부라 칭하였다.119) 김준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였다면, 林衍은 김준의 심복이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칠 것 같지 않다.
임연과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으로 朴琪가 있다. 박기는 김준이 최이의 嬖妾 安心을 간통한 죄로 固城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도운 인연으로 김준의 양자가 된 사람이다. 김준이 박기를 양자로 삼았다는 것은 이들의 관계가 父子의 그것에 준하는 것이었고, 이 점에서 김준과 임연과의 관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박기는 김준이 집권한 뒤에 그의 후원으로 大將軍 承宣의 직에까지 올랐는데, 이러한 김준의 뒷받침은 김준이 집권자가 되기 이전부터였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120)
김준이 먼저 도움을 받게 됨으로 해서 그와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점에서 박기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사람으로는 송길유가 있었다. 송길유는 김준을 최이에게 칭찬해 줌으로써 김준이 최이의 신임을 받아 입신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로, 이러한 인연으로 해서 송길유와 김준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 되었다. 김준은 송길유가 酷吏로서 탄핵을 받게 되었을 때에 崔竩도 모르게 사사로이 그를 구하고자 한 黨與였다. 당시 김준은 최씨집권자의 심복이었던 大司成 柳璥과 待制 柳能 등에게 송길유의 구원을 청탁하였는데, 유경은 政房에 소속되어 있었고 유능은 최이의 親信을 받던 최씨가의 가신이었다.121) 요컨대 김준은 최씨가의 다른 가신들과도 사적인 유대를 통하여 정치적인 역량을 증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112) | ≪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5년 3월 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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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 ≪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
114) | 그렇다고 金允成이 당시에 벼슬길에 있었다거나,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의 관직이나 정치적 영향력의 실제에 대하여서 최소한도의 언급이라도 기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윤성이 당시의 정계와 어떠한 형태로건 관련을 맺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洪承基,<崔氏武人政權과 崔氏家의 家奴>,≪高麗貴族社會와 奴婢≫, 1983, 279쪽). |
115) | ≪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
116) |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 |
117) | 崔氏武臣政權에서의 家兵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가병을 都房이나 馬別抄를 중핵으로 하는 최씨가의 모든 사병과 동일하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 洪承基는 가병의 용례를 분석하면서, 기존의 견해 외에도 최씨가의 가노들을 주축으로 해서 구성되고 도방과는 구별되는 사병 조직을 뜻하는 경우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洪承基, 앞의 책, 288∼291쪽). |
118) | 洪承基, 위의 책, 291∼294쪽. |
119) | ≪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林衍. |
120) | ≪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
121) | ≪高麗史≫권 122, 列傳 35, 酷吏, 宋吉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