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방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가운데 문인이 인사행정을 담당한 政房이 있었지만, 이와 아울러 문인들의 숙위기관으로 서방이 있었다. 서방은 문인들로 구성된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으로 고종 14년(1227) 최우(이)에 의해 설치되어 무신정권이 몰락된 원종 11년(1270)까지 지속되었다.
서방에 대하여는≪高麗史≫崔忠獻 附 怡傳에 “최우의 문객 가운데는 당대 의 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면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최우의 문객으로는 도방을 중심으로 한 무인들 외에 문인들도 많았음을 알 수 있어, 그 가운데는 명유도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최우가 문무겸전의 정책을 써서 종전에 학대를 받아오던 문인을 포섭 등용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으며, 서방은 곧 이들 문인에 의한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이었던 것이다.
최우가 서방을 설치하여 문사로 하여금 교대로 숙위하게 한 것은 문사를 포섭하려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옛일에 밝고 식견이 높아 정치에 있어서 고문 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서방도 최씨정권의 강화책에서 등장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렇게 서방을 설치함으로써 최씨정권의 숙위기관은 문무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즉 무사가 교대로 당번하는 도방이 그 하나이고, 문사가 교대로 당번하는 서방이 그 하나가 된다. 최씨정권은 서방을 설치하여 유교적인 고문역으로 활용하였지만, 문사들은 무신정권 아래에서 크나큰 안식처를 얻게 된 셈이었다.
서방은 최씨정권의 智力의 숙위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고종 44년(1257)에 최항이 죽자 殿前 崔良伯이 이를 비밀에 붙이고 宣仁烈과 함께 최항의 유언대로 최의를 받들기로 하고 문객 대장군 崔瑛·蔡楨·柳能 등에게 연락하여 서방 3번을 비롯하여 야별초·신의군·도방 36번을 회합시켜 밤낮으로 경비하게 하고 나서 초상을 발표하였다.271) 그것으로 보면, 그동안 서방은 야별초·신의군·도방 36번과 함께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서방은 도방 및 삼별초와 함께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 김준이 이를 이어받고 임연을 거쳐 임유무 때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즉 고종 45년에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 왕이 王輪寺에 행차할 때 서방과 각 번 도방 및 삼별초가 어가를 호위하고 갔는데,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는272) 것을 보면 최씨정권이 몰락한 뒤에도 서방이 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어가를 호위하고 갔다는데서 서방은 도방·삼별초와 함께 한때 왕권 아래에 귀속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된 후 도방 6번을 모아 사저를 호위하게 하고 그의 아우 惟梱으로 하여금 서방 3번으로써 그의 형 惟幹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다는273) 내용을 보면, 그동안 서방은 도방과 함께 왕권 아래에서 벗어나 다시 무인집정인 임유무에게 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귀속은 임유무 때라기보다는 이미 김준 때에 이루어졌으며, 위의 사실로 보아 서방 3번의 분번제는 최우 이래 임유무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로서 서방과 도방 사이의 공통점은 모두 숙위기관이었다는 것이며, 서방과 정방 사이의 공통점은 다 함께 문사의 등용처이며 안식처였다는 점일 것이다. 서방과 도방과의 관계는 위에서 언급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서방과 정방과의 관계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설치 시기를 보면, 정방이 고종 12년(1225)인데 대하여 서방은 동왕 14년으로 2년이 늦기는 하나 서로 비슷하다. 그 구성원을 살펴보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씨문중에는 문객으로 문사가 많았고 그 가운데는 명유도 있었음이 주목된다. 즉 최우는 정방을 설치하여 그들 가운데서 能士를 뽑아들여 必闍赤라 하여 전정을 맡게 하였고, 이후 2년 뒤에 문사로 구성되는 서방을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양자 사이 특히 구성원 사이에 어떠한 상호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이것을 최우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볼 때, 최우는 문객 문사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사명의식을 부여하여 사기를 앙양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데서 먼저 정방을 설치하여 문객 문사들 가운데 능사를 뽑아 등용하고 그 후속책으로 서방을 설치하여 나머지 능사를 등용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뒤에 정방의 충원이 필요할 때는 서방의 문사로써 충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방과 정방은 서방의 분번제와 정방의 문사를 必闍赤라 칭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몽고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것은 도방의 분번제가 몽고의 怯薛制度 즉 겁설(番直宿衛)로 분번하여 교대 숙위하는 것과 비슷하며, 정방의 必闍赤가 몽고어로 문사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閔丙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