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별초군의 조직
무신정권기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새롭게 군사조직을 정비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 가운데에는 사병조직도 포함되어 있는데, 최우(이)는 사적인 무력장치로서 최충헌 때부터 만들어졌던 都房을 확대·재편하여 내도방과 외도방을 조직하고274) 거기에 다시 馬別抄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사병집단인 도방과 마별초는 서방 등과 함께 최씨정권의 권력기구 조직의 일부로서, 여러 정적을 타파하고 반대자의 음모를 배제하면서 최충헌에서부터 최의에 이르기까지 국정을 전횡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으며, 오랫동안 집권의 직위를 세습하여 그 위세를 보존하게 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군사조직을 새롭게 조직화한 것으로서 別抄軍으로 지칭되는 馬別抄와 三別抄, 地方別抄가 있다.275)
‘別抄’는 선봉대, 유격대, 별동대 등을 특별히 뽑아 조직했다는 뜻으로 국가가 대내외적으로 비상시국을 당했을 때 임시적으로 정예한 자, 즉 용감하고 생명을 돌보지 않는 자를 특별히 선발하였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이러한 특별부대로는 숙종 때의 別武班이 유명한데, 이의 영향으로 후세에 내란 또는 외란이 있을 때 각종의 별초를 편성하였다. 곧 고려의 병제가 문란해짐에 따라 국방을 담당할 능력이 없어져 여진을 정벌하는데 있어서 특별 임시부대인 별무반을 조직하여 이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별초군은 기존의 병제가 유명무실화되는 무신정권기에 들어와 그 실체를 확연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즉 명종 4년 趙位寵의 난을 토벌하기 위한 결사대로서 戰鋒別抄를 특별히 모집하고 최충헌을 別抄都令으로 삼은 것이 그 예이다.276) 최충헌의 묘지명에 의하면 그가 지휘한 전봉별초가 조위총의 난이 평정된 이후에 해산되고 최충헌은 本衛의 별장이 되었다. 따라서 이 때의 전봉별초는 전시에 임시적으로 조직된 별동대였음을 알 수 있다.277)
그 후의 별초에 관한 기록으로는 신종 5년(1202)과 7년 경주별초군의 예가 있다.278) 즉≪高麗史≫세가에 의하면 신종 5년 10월 경주별초군은 雲門山의 농민폭동군과 합세하여 永州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며,≪高麗史≫지리지의 東京과 安東府條에 각각 신종 5년 5월과 신종 7년 동경야별초가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279) 또한 고종 3년에는 거란의 잔류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을 때 적이 가까이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3군에서 각기 별초 100인과 神騎 40인씩을 파견하여 싸우게 한 기사도 발견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별초군은 점차 임시적인 편성이 아닌 상설부대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그 특징 내지는 조직을 표시하는 글자를 덧붙여 마별초, 야별초, 삼별초 등으로 일컬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마별초와 삼별초는 최우에 의하여 조직된 상설부대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74) | 都房은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후 4년이 지난 뒤에 설치되었다. 이 때의 도방의 규모와 조직은 경대승 때의 도방과 규모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六番都房制의 실시는 최충헌이 독자적인 지위에 서게 된 권력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충헌 때의 도방은 최우(이)에 이르러 內都房과 外都房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내도방은 최우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家兵으로 조직하고, 외도방은 아버지 최충헌으로부터 물려 받은 도방을 재편성한 것이다. 그 임무에 있어서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그의 저택을 호위하고, 외도방은 친척이나 외부에 대한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다(柳昌圭,<崔氏武人政權下의 都房의 설치와 그 向方),≪東亞硏究≫6, 1985, 387·389쪽 및 金塘澤,≪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사, 1987, 79∼87·177∼184쪽 참조). |
---|---|
275) | 지금까지의 별초군에 대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池內宏,<高麗の三別抄について>(≪史學雜誌≫37-9, 1926;≪滿鮮史硏究≫中世篇 3, 吉川弘文館, 1963, 70∼77쪽). 內藤雋輔,<高麗兵制管見>(≪靑丘學叢≫15·16, 1934;≪朝鮮史硏究≫, 京都大 東洋史硏究會, 1961). 金庠基,<三別抄와 그의 亂에 對하여>(≪震檀學報≫9·10·13, 1939∼1941;≪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김재홍,<고려 의무병제도의 성립과 와해과정>(≪력사과학≫3, 1959). 韓㳓劤,<麗末鮮初巡軍硏究>(≪震檀學報≫22, 1961). 姜晋哲,<蒙古의 侵入에 대한 抗爭>(≪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閔丙河,<崔氏政權과 支配機構>(≪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尹龍爀,<崔氏武人政權의 對蒙抗戰姿勢>(≪史叢≫21·22, 고려대, 1977). 金潤坤,<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郡縣民>(≪東洋文化≫20·21, 1981). 金塘澤,<武臣政權時代의 軍制>(≪高麗軍制史≫, 육군본부, 1983;≪高麗武人政權硏究≫, 새문사, 1987). 張世原,<對蒙抗爭 主體의 性格에 關해서>(≪群山實業專門大學論文集≫9, 1986). 申安湜,<高麗中期의 別抄軍>(≪建大史學≫7, 1989). |
276) |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
277) | 金潤坤, 앞의 글, 158∼159쪽. |
278) | ≪高麗史≫권 21, 世家 21, 신종 5년 10월과 권 57, 志 11, 地理 2, 東京 신종 5년 5월 및 권 57, 志 11, 地理 2, 安東府 신종 7년 참조. |
279) | 김재홍은 앞의 글, 46쪽에서 신종 5년의 경주별초와 7년의 동경야별초는 경주 지방민들로 조직된 주현군이며 조위총을 공격하던 최충헌 휘하의 전봉별초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며, 이 경주별초는 무신집권 이후 계속되는 남도 농민폭동으로 인하여 와해된 주현군을 대신하여 조직된 임시적인 주현군으로 인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