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별초
최씨정권기의 마별초에 관해서는 다음의 기록이 먼저 주목된다.
1. 최우가 宰樞를 초대하여 그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毬庭에 임하여 도방 마별초의 擊毬·弄槍·騎射를 관람하였는데, 鞍馬와 衣服, 弓矢를 서로 다투어 빛나게 자랑하려고 힘쓰고 韃靼(몽고)의 풍속을 본받으려고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6년 10월).
2. 최우가 가병·도방·마별초를 사열하였는데, 안마와 의복·궁시·병갑이 매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 5軍으로 나누어 전투 훈련을 하는데 사람과 말이 넘어져 죽고 다치는 자가 많이 생겼다(≪高麗史節要≫권 15, 고종 16년 11월).
우선 1의 고종 16년 10월의 기사는 마별초에 관한 최초의 자료이다. 고종 16년에 마별초가 있었으므로, 그 이전에 이미 창설되었음이 분명하다. 최우가 집권한 시기가 고종 6년이었음을 감안할 때 6년에서 16년 사이에 창설된 것으로 짐작되는데,280) 고종 16년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그 성립의 배경이 정방 및 서방과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최우는 몽고와의 긴장관계가 긴박해지자 그의 집권체제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서방처럼 마별초를 몽고의 제도를 참작하여 창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최우는 고종 12년 정방과 함께 마별초를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2의 자료를 통해 마별초는 최씨의 家兵·都房 등과 더불어 최씨정권을 보위해 주고 있는 무력세력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騎兵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마별초가 항상 도방과 병칭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도방은 보병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별초의 설치로 인해 최우는 보병 뿐만 아니라 기동력이 강한 기병까지 지님으로써 그 무력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킨 셈이다.281)
최씨정권의 무력기반인 도방과 마별초의 조직상의 관계를 놓고 마별초를 도방에 속한 특별부대로 보기도 하지만,282) 마별초의 성격을 위와 같이 해석한다면 양자는 병립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마별초는 최우가 자신의 신변과 일족에게 미칠 예기치 못한 화를 우려하여 자위 수단으로서 조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283) 고종 16년에 도방·마별초를 5군으로 나누어 전투훈련을 시키고, 또 이들의 무예를 재추들에게 5∼6일간씩 관람케 하였다는데, 이는 최우의 정치적 불안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즉 그는 자신의 무력을 재추들에게 과시함으로써 政敵들의 위협에 대한 불안을 감추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284) 나아가 정적들의 도발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별초는 최씨정권을 강화시켜주는 무력으로서 최씨정권의 호위와 자택 경위대의 기능을 주임무로 하면서 의장대의 역할까지 담당하였을 것이다. 마별초는 私兵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신들이 마별초를 이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삼별초와 같이 군대적 기구인 국가 관제에 의한 지휘자가 배치될 수 없었다.
그런데 마별초의 역할 및 성격문제와 관련하여 益齋 李齊賢은≪櫟翁稗說≫에서 삼별초에 대하여 “권신들이 신변 호위를 위하여 날쌔고 용감한 자들을 모집·양성하였는데, 그 이름을 신의군·마별초·야별초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삼별초이다”라고 주석하여285) 마별초를 삼별초에 넣고 있다. 삼별초가 권신에 의해 설치되고 이용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녹봉이 국가에서 지급되었던 만큼 단순한 사병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정부가 탄생했을 때에는 이미 마별초의 존재는 찾아볼 수 없고, 특히 사병인 마별초를 삼별초에 넣은 것은 이제현의 잘못이라는 지적이 있다. 즉 이제현의 이러한 인식은 별초라는 이름이 같고 또 삼별초가 마별초와 같이 권신에게 이용되고 조종되었다는 점에 치중한데서 비롯한 것으로서, 엄격히 말해 삼별초는 야별초가 분화되어 생긴 좌우별초와 신의군을 가리킨 말이며 마별초와는 어떠한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286)
馬別抄는 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일면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마별초는 분명히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이었지만, 최우가 처음 야별초를 조직할 때 마별초의 일부 조직을 분리하여 야별초에 편성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제현이 그 당시에 마별초를 삼별초에 포함시킨 것을 일거에 전면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제현의 이러한 이해는 당시에 남아 있던 사료를 바탕으로 말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야별초가 마별초의 전체가 아닌 일부를 분리해서 편성시킨 것으로 생각하는 이유는, 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도 그 명칭이 독립적으로 혹은 야별초와 병립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287) 요컨대 마별초 즉 기병대의 일부를 분리하여 야별초에 편성시킨 것은 야별초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한다.288)
마별초가,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서 그 핵심의 일부를 이루어 왔음에도 도방과는 달리 崔沆 때의 기록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최씨정권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289) 또는 다른 대부분의 지배기구와 같이 김준·임연부자 때까지 존속하다가 무신정권이 완전히 끝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해체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80) | 閔丙河, 앞의 글, 174∼17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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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 金庠基, 앞의 글, 234쪽. |
282) | 池內宏, 앞의 글, 92쪽. 內藤雋輔, 앞의 글, 200쪽. |
283) | 金庠基, 앞의 글, 116∼117쪽. |
284) | 金塘澤, 앞의 글, 191쪽. |
285) | ≪櫟翁稗說≫前集 2. |
286) | 金庠基, 앞의 글, 235쪽. 閔丙河, 앞의 글, 176쪽. |
287) | 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 마별초가 계속 존립하였는데 그 한 사례로서 “高宗 四十一年 宴宰樞于其第 觀擊毬戲 馬別抄 有以黃金飾障泥…”(≪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沆)을 들 수 있다. |
288) | 金潤坤, 앞의 글, 149∼150쪽. |
289) | 金庠基, 앞의 글, 235쪽 및 이 분야 연구논문의 대부분이 이러한 관점을 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