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삼별초
「三別抄」는 고종 때 최우가 조직한 야별초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고 여기에 신의군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삼별초의 설치와 유래에 대하여는 원종 11년 5월에 단행된 삼별초의 혁파와 관련하여 실린 다음과 같은≪高麗史≫의 기록에 의해 알 수 있다.
처음에 최우가 나라 안에 도둑이 많은 것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순행하며 폭행을 막게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름을 야별초라고 하였다. 도적들이 여러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를 나누어 보내어 이를 잡게 하였는데, 그 군사가 심히 많은지라 마침내 나누어 좌우로 만들었다. 또 일부는 나라사람으로서 몽고로부터 도망하여 온 자들로 신의라 불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兵制 원종 11년 5월).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선 삼별초를 처음 조직한 사람이 최우이며, 그 시원 은 야별초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야별초의 기원 연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런데 야별초의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은 고종 19년부터이다. 고종 19년 6월 강화천도 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그것을 반대하고 나선 金世沖의 지위가 ‘夜別沙指諭’였다는 데서 처음으로 보인다.305) 최우의 집권이 고종 6년부터였다는 점과 최우의 집권기에 야별초가 만들어졌다는 점, 그리고 위의 고종 19년의 기사를 함께 생각해 보면, 야별초의 기 원을 고종 6년(1219)부터 고종 19년(1232)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306)
다음으로 삼별초의 성립시기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이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나뉜 시기와 신의군이 조직된 시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도 자세하지 않다. 다만 신의군의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고종 44년이다.307) 이때 崔沆이 죽자 문객들이 야별초·신의군 및 서방 3번·도방 36번을 회합시켜 밤낮으로 지키게 하고 비로소 그의 초상을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 언제인가 조직되었음이 분명한데, 몽고로부터 도망나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했으므로 고종 41년에서 44년 사이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 기록에도 아직 야별초의 이름이 그대로 보이고 좌우별초의 이름은 찾아지지 않는다. 좌별초와 우별초에 관한 기록은 다시 그 다음 해인 고종 45년에 비로소 나타난다.308) 여기서 좌우별초와 신의군의 설립이 기록상에 나타나는 것보다 앞설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야별초의 분리로 인해 설립된 좌우별초 내지 삼별초라는 이름이 기록상에 나타난 이후에도 야별초의 명칭이 계속 보여서 야별초, 좌우별초, 신의군, 삼별초 등의 이름이 혼용되고 있다. 이는 야별초가 삼별초의 선행명칭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후대에까지 활용한데서 비롯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최우가 처음 야별초를 조직할 때 마별초 가운데에서 그 일부를 분리하여 편성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야별초가 조직된 이후에도 마별초의 명칭이 독립적 혹은 야별초와 병립해서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별초 즉 기병대의 일부를 분리하여 야별초에 편성시킨 것은 야별초의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특히 전시과제도의 붕괴와 무신 상호간의 권력 투쟁이 반복됨에 따라 각기 경쟁적으로 사병을 양성하게 되자 수도의 수비임무를 맡고 있었던 三衛(左右·神虎·興威)와 경찰의 임무를 맡고 있던 金吾衛(備巡衛)등의 기존 기구들이 거의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즉 무신집권기의 사병들이 武臣家의 사병으로 복무함으로써 삼위와 금오위 등의 관군이 무력화되어 수도의 수비와 경찰의 임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최씨정권은 그 임무를 보다 강력하게 수행하기 위하여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였고, 그 기구가 바로 夜別抄였다.
야별초는 독자적인 군영이 있었는데 그 존재 사실과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그 일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김준(金仁俊)이 최씨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자, 또 그 반대세력들이 김준의 일당을 제거하기로 음모하였다. 이 음모에 가담하였던 校尉 玄君壽는 거사를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 음모를 밀고하기에 이르렀다.
교위 현군수…별초영으로 달려가서 文璜 등의 음모를 고했으므로 김준은 그 말을 듣고서 文璜·崔注·文光旦·文英旦·孝秀之 등을 국문 후에 죽였다(≪高麗史≫권 130, 列傳 43, 叛逆 4, 金俊).
여기에서 야별초의 군영은 교위 현군수가 음모의 사실을 밀고한 곳이며, 집권자 김준이 그 음모에 가담한 반대세력을 잡아다가 鞫問한 곳으로 나타난다. 그만큼 야별초의 군영은 정권의 보위를 위해서 중요한 기관이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최고의 사령부였다. 이 사령부에는「驍勇之士」즉 날쌔고 용맹스런 용사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 최우가 야별초를 창설할 당시 효용지사는 원래 대부분 그의 사병으로 부렸던 悍將勁卒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다시 말하면 2군 6위의 한장경졸이 최씨 일가의 사병으로, 이 사병이 다시 야별초의 요원으로 충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별초가 처음 조직될 때 농민폭동군이 각지에서 봉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군대로는 이를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관군들은 군인전을 지급 받지 못하여 일반 농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전투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최우는 관군 가운데 용력이 뛰어난 자들을 가려 뽑아 야별초를 조직하였다.
사실 관군 가운데 용력이 뛰어난 자들은 다른 무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들로 전락할 가능성이 컸으므로, 이들을 그대로 방치해 두기도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에게 군인으로서의 적절한 대우를 해주고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최우에게 유리했을 것이다. 야별초를 조직할 당시의 최씨정권은 정적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야별초의 조직 이면에는 정적을 제거하려는 최우의 의도가 일정 부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309)
삼별초는 최씨정권에 충성하는 군대로서 그들의 전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그 기간장교직은 심복들을 임명함으로써 완전히 장악하였고, 직접 명령을 받는 이들도 기간장교로서 중·하급의 무신이었다.310) 그리고 삼별초는 독립적인 기구도 있었으며, 都領·指諭·校尉들이 통솔하였다. 대개의 경우 야별초의 직접 지휘는 야별초 지유가 맡고 있었다.311)
무진집권기를 전후해서는 중앙에는 삼별초(京別抄)라는 전투편제가 있었고, 지방에는 지방 자체의 방어체제로서의 지방별초군(外別抄)이 조직되어 기존의 고려 병제와 마찬가지의 이원적인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312) 최우가 새로이 조직하였던 중앙의 삼별초와 각 지방에서 이미 존재해오던 별초들은 다같이 田丁을 지급 받았던 군인이었다. 다만 중앙의 삼별초는 후한 녹봉을 지급받으면서 상설적 임무를 띠고 있었다.313)
6차에 걸친 몽고의 침략으로 무참한 파괴와 약탈 그리고 무인 권신들과 대토지 사유자들의 전횡으로, 특히 양인 농민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삼별초가 조직 운용되었다. 초기의 야별초는 閑良과 府兵 가운데 힘세고 무예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조직하였으나, 그 후 몽고의 침략시기에는 양반지주들은 난을 피해 산성이나 해도로 피신하였고 양인 농민 및 그 이하의 최하층 인민들만 병역에 동원되어 몽고에 대항하였다. 따라서 강화천도 이후 양적으로 증가한 삼별초에는 양인 및 그 이하의 농민들 즉 천민층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별초군을 운영함에 있어 녹봉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314)은 삼별초의 일부 요원에게만 해당하며 전체 병졸들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강화도에서 국가재정이 탕진 고갈되었을 당시에 전체 병졸에게 모두 녹봉을 주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삼별초 역시 모든 군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삼별초는 捕盜·禁暴·刑獄·鞠囚와 도성의 수비를 비롯하여 친위대·전위대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삼별초는 중앙상비군으로서 군대·헌병·경찰의 임무 일체를 담당하여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 중 야별초의 설치 목적에서 나오는「포도」,「금폭」의 임무에 대해 좀 더 살펴 보기로 한다. “도적이 각 도에서 일어나자 별초를 각지에 나눠 보내 이를 잡게 하였는데 이 별초의 수가 매우 많아져서 …”315)라는 기사에서 보다시피, 이들에 의해 체포의 대상이 된「盜」는 남의 물건을 훔치는 순수 도적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盜賊」혹은「賊」등으로 불리우는 농민폭동군도 그 속에 포함되었던 것 같다. 이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고종 19년 6월 경에 최씨무신정권은 많은 반대자를 고압적 수단으로 억압해 가면서 기어이 강화천도를 단행해 버렸다. 이에 따라 그 천도의 반대운동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 가운데 경기지방의 초적과 승도들의 저항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들은 개성의 유수병마사를 축출하고 그곳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최씨정권은 강화에서 3군을 파견하여 그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이 싸움 속에서 초적 등의 저항세력은 패퇴하고 말았다. 이들을 패퇴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군대는 야별초였다.
牽龍行首 별장 李甫와 鄭福綏가 야별초를 거느리고 먼저 개성에 이르니, 적이 문을 닫고 성을 지켰다. …甫와 福綏 등이 문을 지키던 자를 죽이고 군사를 이끌어서 李通의 집에 이르러 그를 목베니, 삼군이 계속 들이닥쳤고 적의 괴수가 계책이 없어서 달아나 숨으니 나머지 무리는 다 죽였다(≪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7월).
위에서 이보와 정복수 등은 야별초를 거느리고 개성에 먼저 도착해서 문지기와 우두머리인 이통을 목벤 뒤에, 3군이 뒤이어 도착하여 그 난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야별초는 날랜 장수와 정예의 병졸을 선발해서 편성한 부대이기 때문에 그 진영의 선봉군으로서 상대방을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씨정권이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그 저항세력을 위와 같이 섬멸하였던 당시에는, 몽고가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을 때이다. 이 같은 시기에, 최씨정권은 몽고병을 막고 무찌르기보다 오히려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현은 삼별초에 관해서 “권신들이 驍勇之士를 모집·양성하여 自衛하였다”고 한 듯하다. 이 ‘自衛’는 권신, 즉 최우 자신이 정권을 보위하기 위해서 삼별초를 조직 운영하였다는 뜻인 것이다. 이제현이 삼별초 조직의 목적을 이 같이 밝혀 놓은 것과≪高麗史≫찬자가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였다”하여 그것을 설치했다고 한 것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기의「國中多盜」는 각 지방의 민중봉기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며, 이 당시 많은 농민·천민의 봉기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요컨대 야별초, 즉 삼별초는 수도를 비롯한 전국의 농민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조직한 것이요, 최씨 무신정권을 보위하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야별초의 숫자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확대 개편하였다는 것은 최씨정권의 농민폭동에 대한 강경진압책에도 불구하고 농민폭동이 확대일로에 있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316)
삼별초의 요원들은 당시의 집권자들로부터 반대급부로서 많은 특혜를 입었던 것이다. 예컨대 권신 즉 무신들이 권력을 잡으면, 삼별초를 그들의 爪牙 즉 心腹之人으로 만들기 위해서 봉록과 사사로운 헤택을 후하게 베풀기도 하고, 또 죄인의 재산을 적몰하여 지급하기도 했다317)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삼별초의 요원들이 많은 특혜를 받고 있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생각건대 집권자들은 삼별초를 이용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혜를 베풀었을 것이다. 이것은 삼별초가 정치적 이용 대상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삼별초의 요원들 가운데서 집권자들로부터 여러가지 특혜를 입고 어용적인 구실을 하었던 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그 재원이 무한한 것이 아니고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집권자들로부티 사적인 은혜와 적몰한 재산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는 특정한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삼별초의 요원들 가운데 집권자의 어용이 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된 자들도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들 소수 요원들만이 집권자의 어용이 되어 정치적 문제에 개입했던 것이다 이러한 삼별초의 요원은 항상 집권자의 눈치나 살피는 어용군인이며 오직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정치군인이었다.
삼별초는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하여 무신정권의 가장 중요한 무력기반이었다. 결국 무신정권의 상비군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즉 최씨정권과 김준·임연부자가 모두 삼별초의 무력을 장악하고 이를 수족같이 이용하여 그 권력을 유지하였다. 최씨정권 초기에는 사병이 우세하였으나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삼별초가 가장 주요한 무력기반으로서 뚜렷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강화도에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는 무력의 담당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삼별초를 장악하여야 했으며, 집권자들은 삼별초를 손 안에 넣기 위해서 녹봉을 후하게 주기도 하고, 또는 재물을 보내 크게 우대하였다. 삼별초는 국가의 재정에 의하여 양성되고 국고에서 지출되는 녹봉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권신의 사병과는 매우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를 볼 때 삼별초는 정부의 상비군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318) 결국 무신정권을 유지시키는 무력장치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 왕실을 무력으로 견제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319)
또한 전시과제도의 붕괴와 무인 상호간의 권력 투쟁이 반복됨으로써 각기 경쟁적으로 사병을 양성하였다. 이에 따라 수도의 수비임무를 맡고 있었던 3위와 경찰의 임무를 맡고 있던 금오위 등의 기존 기구들이 거의 있으나 마나해지면서, 그들이 담당하였던 임무를 보다 강력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320) 결국 최우에 의해 조직된 야별초 및 삼별초의 기능과 세력이 府衛軍(三衛·金吾衛)에 대해 상대적으로 증대되어, 부위군에 의해서 수행되는 직무와 크게 차이가 없게 되었다. 이는 부위군의 침체 상황과 짝하여 그러한 직무들이 삼별초의 활동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몽고의 침략 전시기를 통하여 제1차 침입을 제외한다면 부위군의 움직임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어 삼별초의 활약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 준다.
최씨정권 몰락 이후 빈번한 정변 속에서 그 성패 여부가 삼별초의 향방에 따라 결정되었던 사실들은 삼별초가 가장 강력한 무력기구로 성장해 있었음 을 시사한다. 이렇게 삼별초가 강화된 것은 전란의 참화 속에서 군사력 확보 또는 증강이 불가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규군이 아닌 삼별초는 그 제도 자체에 포함되어 있는 변칙의 한계 때문에 최저선의 군사력 유지라는 선을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321)
여기서 삼별초의 기능과 조직과정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야별초는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조직된 군대였다. 이것은 처음 최우가 나라 안의 많은 도적을 우려하여 조직했다는 것과 각 지방의「盜起」즉 단순한 의미의 도둑 뿐만 아니라 민중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별초를 나누어 보내서 붙잡아 들이게 했다고 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다. 둘째 야별초는 무인 최씨 정부가 원래 府兵의 날랜 장수와 기예한 군졸 그리고 마별초의 일부를 조직의 모체로 삼았으며, 그 구성원이 점점 늘어나자 마침내 좌·우별초로 나누기에 이르렀다. 이 야별초의 요원이 점증하게 된 것과 민중봉기의 빈도는 서로 비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신의군은 대몽항쟁과정에서 고려군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나온 자로 조직된 군대이다. 여기서 몽고병에 대한 이들의 적개심이 어떠했을까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들은 정예부대로서 활약하였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삼별초는 민중봉기의 진압과 몽고의 침략을 방어 분쇄하기 위해서 조직된 특수부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그 조직의 목적에 부합되는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다음으로는 삼별초의 성격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삼별초는 公兵이었는가, 아니면 도방·마별초와 같이 권신의 사병이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 로 제기되어 오고 있다. 이 公私의 구분문제는 삼별초의 성격을 규명하고 이해하는 관건으로 보여지고 있다. 원래 삼별초는 권신 최씨 일가들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그 위에 또한 역대 권신에게 이용되었다는 것은 앞서 살펴 보았다. 이와 같이 삼별초는 때로 도방·마별초와 마찬가지로 권신에게 이용되는 것으로 보아 언뜻 보면 사병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 益齋 李齊賢은 마별초·신의군·야별초 등의 삼별초를 권신의 자위를 위한 사병으로 보고 있다.322) 원래 武將 권신의 발호시대에는 부병도 대개 그들의 심복으로 된 예가 많다. 이러한 사실들이 삼별초를 사병으로 이해하게 하는 근거가 되는 듯싶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高麗史≫兵志의 기사가 주목된다.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을 爪牙로 삼고 그 봉록을 후하게 하며 혹은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또 죄인의 재물을 적몰하여 주기도 하였으므로, 권신은 이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도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金俊이 崔竩를 주살하고, 林衍이 김준을 주살하며, 宋松禮가 林惟茂를 주살함에 있어서도 모두 이들의 무력에 의하였다(≪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원종 11년 5월).
위의 기사에서 그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삼별초는 권신의 심복으로서 역할한 것이 사실이며, 또 이 기구의 설치 자체가 최우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데서, 그들이 사병처럼 보일 가능성은 한 층 더 높아진다. 따라서 논자 가운데는 삼별초를 ‘公兵的인 성격이 농후한 사병’으로 보기도 한다.323) 역대 권신들이 여러가지 사적인 은덕을 베풀어 삼별초를 이용했던 것은, 삼별초 행동이 때로는 도방과 마별초와 구별하지 못할 만큼 분명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고종 23년에 최초로 몽고병과 충돌한 야별초의 군관 李裕貞은「崔怡都房夜別抄都領」이었는데, 이로 보면 이유정은 최우의 사병인 도방의 성원인 동시에 야별초의 도령을 겸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최우가 야별초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자기 도방에 속한 자를 가려 야별초의 도령으로 임명하였던 때문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삼별초는 일면으로는 공병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병으로 각종 기록에 나타나므로, 그 성격이 혼동될만한 소지가 없지 않다.
삼별초가 무인들에게 이용되었고 무인들의 저택경비에까지 동원된 것은, 당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자가 바로 무인들이었으며, 그들이 일체의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하면서 삼별초의 군관도 자신의 심복으로 충원하여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관군도 집권자에게 이용되어 농락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마별초의 경우도 사정은 동일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권신들에게 이용되었던 현상만 가지고 그것을 도방 혹은 마별초와 같은 사병으로 볼 수는 없다. 또한 삼별초는 그의 직능에 있어서도 사병과는 구별된다. 사병이 어떤 개인 즉 권신들의 호위를 위한 기능만을 수행하였다면, 삼별초는 무인집권자들 개인에게만 복무한 것이 아니라 봉건 국가의 권력 도구로서 대내외적 기능도 충분히 수행하였다.324) 이들의 조직이 최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위치에서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고, 또 삼별초가 권신들에게 지휘·이용된 것도 사실은 최씨 정권 후기부터의 일로325) 그들의 성격이 많이 변화되어 사병화된 뒤의 현상에 불과하다. 즉 이들은 본래 공병이었으나 나중에는 사병의 성격도 많이 지니게 된「私兵化한 公兵」이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326) 이러한 견해가 가능한 것은 삼별초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야별초가 당시의 권신 최우에 의해서 설치되었다는점과, 그 후에 역대 권신들에 의해 자주 사적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이 공병으로서의 삼별초가 그 성격상의 변질을 초래하여 권신의 사병화되었다는 데 있다. 삼별초는 설치 당시부터 권신 최우에 의하였다는 점으로 이미 사병화할 수 있는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삼별초는 고려의 중앙군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각 지방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지만, 그 조직과 소속은 어디까지나 京軍에 해당하는 군대였다. 삼별초를 따로이 京別抄라고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점은, 삼별초나 마별초의 소속 내지 성격문제 보다도 그들이 당시와 같은 시대적 여건 아래에서 어떤 기능을 담당하였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설령 이들의 성격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엄밀히 따져보면 당시 최씨 무신정권이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천단하였기 때문에 공사의 구분이 확연할 리 없었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굳이 공사의 구분을 시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설혹 그것을 구분했다 하더라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야별초를 포함한 삼별초가 원래 2군 6위의 관군이었음을≪增補文獻備考≫兵考는 밝히고 있다. 즉 무신집권 이후에 驍軍·銳卒이 모두 삼별초에 소속되었으므로 祖宗의 옛날 군제가 허물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유명무실한 조종의 舊制 즉 2군 6위의 부병제가 삼별초의 창설로 인해서 새롭게 보강되었다는 말이 된다. 최씨정권이 강화천도를 단행하고, 그 저항세력을 위와 같이 섬멸하고 있었던 이 당시는, 몽고가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광분하고 있을 때이다. 이 같은 시기에 최씨정권은 몽고병의 방어·격퇴보다는 오히려 민중의 봉기를 진압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던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현은 삼별초에 관해서 “권신들이 驍勇之士를 모집·양성하여 自衛하였다”라고 한 듯하다. 이「自衛」는 권신 즉 최우 자신의 정권보위를 위해서 삼별초를 조직하였다는 뜻인 것이다. 이제현이 삼별초의 조직 목적을 이 같이 밝혀 놓은 것과≪高麗史≫찬자가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였다”라 하여 그것을 설치했다고 한 것이,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삼별초의 처음 설치목적은 최씨정권의 보위 즉 농민·천민의 봉기를 진압하고 몽고의 침략을 저지하려는데 있었다. 집권자들은 삼별초를 江都에서 육지로 파견하여 농민폭동군을 진압하고, 몽고병의 침략을 저지 격퇴케 하기도 하고, 그들의 정권장악에 삼별초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삼별초 중에서 집권자의 정치적 야욕(정적제거 등)에, 혹은 실력자의 정권 장악 행위(쿠데타) 등에 이용된 자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 대부분은 항상 대몽항쟁의 대열에 투입되어 있었다. 수도가 강화에 있을 때, 집권자들은 국내의 반정부세력보다는 몽고의 침략에 더 큰 불안과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당시의 국내정세는 삼별초로 하여금 정치적 작용, 즉 쿠데타 등에 참여하기 보다는 대몽항쟁의 대열에 종사하기를 요구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적 저항정신의 소유자로서 더욱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당시의 임금인 원종과 일부 문신들이 몽고와의 야합을 통해「出陸還都」의 길로 나서자, 이들은 반개경정부와 대몽항전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몽고의 침략세력에 의해 참담한 전화에 시달리고 있었던 전국 군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 속에 삼별초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327)
<金潤坤>
305) | ≪高麗史節要≫권 16, 고종 19년 6월.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怡. |
---|---|
306) | 金庠基, 앞의 글, 105쪽과 김재홍, 앞의 글, 46쪽, 그리고 閔丙河, 앞의 글, 184쪽, 金塘澤, 앞의 글, 187쪽에서는 야별초 설치시기를 고종 17년부터 동왕 19년 사이로 범위를 좁혀 추정하고 있다. |
307) | ≪高麗史節要≫권 17, 고종 44년 閏月. ≪高麗史≫권 129, 列傳 42, 叛逆 3, 崔忠獻 附 竩. |
308) | ≪高麗史≫권 24, 世家 24, 고종 45년 3월. |
309) | 金塘澤, 앞의 글, 200쪽. |
310) | 閔賢九,<蒙古軍·金方慶·三別抄>(≪韓國史市民講座≫8, 일조각, 1991), 90∼91쪽. |
311) | 金潤坤, 앞의 글(1981), 161∼163쪽. |
312) | 申安湜, 앞의 글, 76쪽. |
313) | 金潤坤, 앞의 글(1981), 160쪽. |
314) | 김재홍, 앞의 글, 47∼49쪽. |
315) |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원종 11년 5월. |
316) | 金潤坤, 앞의 글(1981), 153∼155쪽. |
317) | ≪高麗史≫권 81, 志 35, 兵 1, 五軍 원종 11년 5월. |
318) | 姜晋哲, 앞의 글, 382∼383쪽. |
319) | 申安湜, 앞의 글, 82쪽. |
320) | 金潤坤, 앞의 글(1981), 150∼153쪽. |
321) | 尹龍爀, 앞의 글, 312쪽. |
322) | ≪機翁稗說≫前集 2. |
323) | 閔丙河, 앞의 글, 196쪽. |
324) | 김재홍, 앞의 글, 49∼50쪽. |
325) | 金塘澤, 앞의 글, 190∼195쪽에서는, 야별초는 최우가 애초부터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에서 설치하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326) | 尹龍爀, 앞의 글, 309∼310쪽. |
327) | 이에 관해서는 金潤坤, 앞의 글(1981)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